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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천하제일행서: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by 중은우시 2006. 12. 21.

 

 

 

 

동진 영화 9년(기원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산음(山陰)에 거주하는 일부 문사들과 함께 난정으로 가서 수계(修禊)를 거행했다. 참가한 사람들은 흥이 일어 많은 시편을 썼다. <<난정서>>는 바로 왕희지가 이 시집을 위하여 쓴 서문의 원고이다. 서문은 당시 남방사족계층이 신봉하던 노장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문학사상으로도 일정한 지위를 차지한다.

 

전문은 몯 28행, 324자이다. 장법, 결구, 필법이 모두 완벽하다. 왕희지의 행서는 당시에 독보적이었으며, 후인들에 의하여도 "우군(왕희지)의 자체는 옛법을 한번 바꾸었다. 그의 웅혼하고 빼어난 기운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고금이래로 그의 글을 모범으로 삼는다" 역대의 서예가들은 <<난정서>>를 천하제일행서로 추앙했다.

 

<<난정서>>에 관하여는 세간에 형형색색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왕희지는 이 글을 쓰고 난 후에 자기의 이 작품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다시 몇 편을 써보았는데, 모두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천고의 걸작을 가보로 후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당태종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여기에는 당태종이 소익을 파견해서 난정서를 빼앗았다는 전설이 있다.

 

당태종은 왕희지의 서법을 추앙해서, 신하 조모, 풍승소등으로 하여금 임모본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는 이 임모본 또는 석각탁본을 일부 황족이나 총신에게 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에 이 "진본보다 한 단계 낮은" 임모본도 낙양의 지가를 높이게 하였다. 이외에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의 명가들의 임모본도 후세에 전한다.

 

그러나, 원적은 전설에 따르면 당태종이 죽을 때 순장품으로 넣어서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소위 <<난정서>>는 당나라때의 임모본을 제외하고, 석각탁본도 매우 진귀하다. 가장 전기적인 색채를 지닌 것은 <<송탁정무난정서>>이다. 임모본이건 탁본이건, 모두 왕희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하다. 동시에 역대서법을 연구하는데에도 진귀한 자료이다. 중국서법전적에는 <<난정서>>에 관한 자료가 아주 많다.

 

<<난정서>>를 왕희지가 쓴 것인지에 대하여는 역대이래로 논쟁이 많다. 청말과 60년대에는 상당히 격렬한 논쟁도 벌어졌었다. 위의 사진에 나온 것은 풍승소의 임모본으로 세칭 <<신룡본난정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