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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계공(啓功)의 구술(口述): 난정서(蘭亭序) 논쟁의 경위

by 중은우시 2007. 3. 22.

구술: 계공(啓功)

 

학술저작의 저술에 대하여 말하자면 아주 전설적인 색채가 있는 경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후 학술비판은 왕왕 정치운동과 연결되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치운동은 왕왕 학술문제를 가지고 발단이 되어, 학술문제가 최종적으로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예를 들면, 해방후 얼마되지 않아 영화 <<무훈전(武訓傳)>>이 이런 선례를 열었다. 무훈은 구걸로 살아왔고, 모든 재산을 교육사업에 썼다. 이것은 원래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었고, 기껏해야 무훈 본인이 봉건사회의 시대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이에 대하여 비판을 시작하였는데, 이미 영화 한편에 대한 평가를 넘어섰고, 정치상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판단했다.

 

1960년대가 되면서, 여산회의에서 팽덕회의 우경노선은 비판받았고, 팽덕회는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으로 인하여, 위에서는 다시 한번 정치운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돌파구 혹은 뚫고 들어갈 틈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 시대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결국 오함(吳)의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쪽으로 마지막 목표를 정했고, 이는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최초에 최종목표를 확정하기 전까지는, 여러차례 다른 이슈로 탐색을 해봤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1965년 일어난 왕희지의 <<난정서>> 진위논쟁이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자그마한 <<난정서>>와 정치투쟁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확실히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당시 의식상태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의 손에서는 이것도 유물사관과 유심사관의 크게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이슈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후의 <<수호전>>비판에서도 인증된다. 당시 의상상태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라은 강생, 진백달 등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곽말약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진백달이 중화서국에서 영인한 정무본 <<난정서>>를 얻었다. 뒤에는 청나라때 이문전(李文田)의 발문(跋文)이 있었다. 많은 청나라때의 비첩학자들은 모두 북비를 존중했다. 그들은 용문조상, 용문이십품과 같은 비각이 바로 진대이후 최고수준이고 주류풍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비는 모두 방필(方筆)이었고, 칼로 깍은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부드럽게 쓴 것은 모두 가짜라고 생각했다. <<난정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에 <<난정서>>는 그 자체로 전설이 있었다. 당태종이 일찌기 소익을 시켜 이 첩을 빼앗아 온 후에 배장해버렸다는 것이므로, 남아 있는 난정서는 전부 가짜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되었다. 이문전도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발문에서 <<난정서>>는 방필이 아니고 유필(柔筆)이므로 이것은 가짜라고 단정했다.

 

진백달은 이런 <<난정서>>와 발문을 곽말약에게 보냈다. 목적은 아주 분명했다. 바로 곽말약이 나서서 이 분야의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큰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드는지 보자는 것이었다. 곽말약은 이런 "성지"를 받고, 자연히 그 의미를 눈치챘다. 그래서 글을 썼다. 곽말약은 여기에 새로운 고증을 결합시켜서 <<왕사 묘지의 출토로 난정서의 진위를 논함>>이라는 글을 썼다. 남경에서 발굴된 왕씨의 한 묘비를 들어 그 곳의 글자는 모두 네모난 것이었다. 그래서 부드럽고 길다란 <<난정서>>는 분명히 가짜라는 것이었다. 글자만 가짜인 것이 아니라, 글도 후인이 임의로 고친 것이라고 썼다. 이전에 나(계공)는 <<난정첩고>>라는 글을 썼고, <<난정서>>는 진짜라고 했었다(<<난정서첩>> 원작은 왕희지가 썼으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모두 원작을 모방하여 쓴 것이라는 것임). 그리고 상세하게 현재 전해지는 각종 난정서 판본을 분석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이 있었다. 글에서는 자연히 이문전등 청나라 사람들의 관점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가 토론이슈로 등장하자 나는 다시금 태도를 표명해야 했다. 당시 곽말약은 십찰해(什刹海)에 살고 있었다. 전행촌(錢杏村, 阿英) 선생은 면화후통의 동쪽입구에 살고 있었는데, 곽말약은 전행촌을 보내어 나보고 얘기하라고 했다.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전선생은 나를 그의 집으로 오라고 했다. 문을 들어서자 그는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것처럼 나를 끌고 쇼파에 앉혔다. 그리고는 아주 정중하고 진정이 담긴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내가 말하겠는데, 우리는 이번에 서로 마음이 통하는 동지로서 얘기하는 것이다. 넌 이번에 반드시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일이 아주 중대하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의 말투를 보니, 사정이 얼마나 중대한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물었다: "그 말만 하루종일 할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는 그제서야 말했다: "너는 지금 바로 <<난정서>>에 관해서 글을 하나 새로 써야 겠다. 이번에는 반드시 <<난정서>>가 가짜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다." 나는 연신 물었다. "무슨 말인가?" 그는 그제서야 일의 배경과 곽말약이 그에게 나를 찾아 얘기하라고 했다는 말을 하나하나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와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원래 나는<<난정서>>가 가짜라고 마음대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존하는 정무본과 당모본은 모두 왕희지의 원작의 복제품이라는 견해를 견지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어떻게 고비를 넘긴단 말인가? 그러나, 형세는 아주 분명했다. 이것은 이미 서예사나 학술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학술문제가 정치화된 것이었다. 게다가 '직접 지명하여' 글을 쓰라고 했다. 나는 전선생의 집에서 돌아와서 곽말약의 글을 자세히 연구했다. 마침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냈다. 곽말약의 글에는 하나의 명백한 빈틈(loophole)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왕희지의 <<난정서>>는 방필(네모난 글)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짜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희지의 글로써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난정서>>뿐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상란첩(喪亂帖)>>이 있는데, 이것은 당나라때 왕희지의 진적을 보고 모방한 것이다. 그것도 부드러운 필법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곽말약은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상란첩>>과 북비본의 "이첩(二)"비 <<첩보자(寶子)>>, <<첩용안(爨龍顔)은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곽말약이 당시에 이렇게 말한 것은 아마도 그의 내심에 어긋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비첩을 조금이라도 섭렵한 사람이라면 이 두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맥상통'한다고 말하려면 아마도 눈을 감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좋다. 나는 아예 이걸 가지고 글을 쓰기로 했다. 눈이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면 한번만 보면 내가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썼다: "곽말약동지의 글을 읽었다. <<상란첩>>과 <<보자>. <<양양>>등의 비문이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해를 훨씬 활발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을 붙잡은 나의 생각은 과연 '활발'하였다. 4천여자의 고증문장을 그날로 완성했고, <<난정의 미신은 파괴제거되어야 한다>>고 제목을 붙였다. 저녁에 아영이 사람을 보내서 가져갔고, 직접 곽말약의 집으로 보냈다. 곽말약은 보자 매우 기뻐했다. 다음 날(토요일) 아침 일찍 원고를 광명일보에 보냈다. 다음 날(일요일) 신문을 보니 그것은 특별투고작이었다.

 

며칠이 지나서 곽말약이 진교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사는곳이 멀지 않았다. 곽말약은 십찰해에 살고 있었고, 진교장은 보인대학 건너편의 흥화사에 살고 있었다. 곽말약은 진교장을 보자 기뻐서 말했다: "네 학생 계공은 아주 좋다. 그는 <<난정서>>가 가짜라고 말했어. 아주 좋아, 아주 좋아" 진교장은 원래 <<난정서>>는 진짜라고 주장하는 일파였다. 누군가가 그에게 무슨 첩을 가지고 서예연습을 하면 좋을지 물어보면 그는 자주 사람들에게 <<난정서>>를 추천했다. 지금은 그저 미소로 수염만 쓰다듬으며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가 전문가이지" 곽말약은 기회를 붙잡아 말했다. "당신도 하나 쓰면 어떤가?" 진교장은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늙었어. 눈도 잘 안보이고, 쓸 수가 없어. 몸이 좀 나아지면 그 때 보자" 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며칠 후, 진교장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여전히 수염을 매만지며, 웃음띤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곽말약이 너를 칭찬하더군" 나는 무슨 일인지 여쭈었다. 그는 나에게 유내화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유내화가 경위를 말해주었고,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한참을 웃고 진교장이 다시 말했다. "너는 다음에 글을 발표하려면 반드시 내게 먼저 보여줘라. 그렇지 않으면 발표하지 말라." 나는 연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런 마음에도 없는 아부하는 글을 당신께 보여드리면, 당신은 아마도 화가나서 수염을 떨텐데, 내게 발표하라고 하시겠습니까"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나는 당시 내가 상당히 '총명'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180도 전환할 수 있는 핑계를 찾은 것이고, 나의 이러한 변신이 완전히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라는 것까지 밝힌 것이다. 이것은 모두 곽말약의 글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첩>>과 <<상란첩>>이 일맥상통한다는 말은 나에게 여러가지 사고를 '활발'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것으로 나중에 말거리를 남겨두었던 것이며, 친구들간의 우스개소리로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그 뒤에 숨은 의미를 알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서단의 고서점에서 오랜 친구인 김협중을 만났다. 그는 우파로 몰린 후 왕진 장군에 의하여 신강으로 쫓겨났는데, 실은 그를 보호해준 것이었다. 당시 왕진은 많은 우파를 자기의 부하로 데려왔다. 유명한 시인 애청과 같은 사람이다. 애청은 나중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왕진장군이 나를 보호해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김협중은 나를 보자 아주 재미있게 말했다: "나의 이해가 많이 활발해졌다"고. 말을 마치고 크게 웃었다. 이것을 보면 사람들이 이 말에 숨은 뜻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 때 정말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쓰지 않았으면 안되었다. 사실은 그대로 증명한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쓰지 않았다면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남경에 고이적(高二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장사소(章士), 임산지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그것을 순수한 학술문제로 생각했다. 그래서 곽말약의 글을 읽어본 후에, 먼저 항의하는 글을 썼다. 대체적인 뜻은 당태종이 이 첩을 위하여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여 가져왔는데, 어찌 가짜이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는 글을 쓴 후에 장사소에게 보여준다. 장선생은 다시 모주석에게 보낸다. 그러나, 모주석은 아무런 의사표명도 하지 않는다. 다행히 그는 장사소라는 라인을 통하여 위로 보냈기에 그렇지 그렇지 않고 그냥 발표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났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증거는, 나중에 관련 문장을 모아서 <<난정논변>>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다. 그 중의 서문에는 명확하게 <<난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찬성 반대하는 것이 유심사관과 유물사관의 정치투쟁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서문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난정서진적설)은 역대 제왕, 중신들이 극력 숭상하고 봉건사대부들이 대거 선전하여, 불가침의 신물로 여기게 했다....(곽말약이 글을 발표한 후) 많은 사람들은 그가 변증유물주의의 비판태도로 역대제왕, 중신의 평가를 뒤집었다고 지지했다. 그러나 어떤 글은 반대의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당연히 지적할 것은, 이런 논쟁은 유물사관과 유심사관의 투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논쟁집은 또 곽말약의 견해에 동의하는 십여편의 문장은 "상편"에 다른 의견을 제시한 삼편을 "하편"에 실었다. 그 중에는 고이적과 장사소 선생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비판의 방향은 분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왜 이 이슈를 가지고 크게 일을 벌이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도 이 논쟁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의 범위가너무 좁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껏해야 서예계의 몇몇 유한한 사람들이고, 이것만으로는 대규모의 정치투쟁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이미 정치적인 의미를 잃어버렸으면,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깃발을 내리고 쉬면 된다. 나중에 그들은 과연 더 좋은 목표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해서파관>>이다. 이를 가지고 '문화대혁명'이라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붙였다. 다행히 난정논쟁은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만일 계속 되었다면 나도 아마 혁명의 소용돌이에 끼어들어갔을 것이고,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학술토론을 가지고 정치적인 물고기를 낚으려는 수단은 실로 지직인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가장 머리아파하는 짓이다. 나중에 나는 나의 문집을 편집할 때, 이 글은 확실하게 삭제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