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흉노의 서천(西遷)과 흉노제국의 유럽전쟁기

중은우시 2007. 4. 1. 01:13

글: 신유천하(神遊天下)

 

흉노(匈奴)의 영문명은 Hun이며, 이는 파괴자와 야만인의 대명사이다. 이로써도 유럽인들의 흉노에 대한 공포스러운 기억을 알아볼 수 있다. 기원1세기, 동방에서는 이미 밀려난 북흉노는 점차 서쪽으로 도망하다, 마지막으로 유럽의 중심부로 이동한다. 여기서 옛날의 영광을 되찾았을 뿐아니라, 유럽사회의 대변혁을 일으키고, 이로써 유럽의 역사를 고쳐쓰게 만든다.

 

몽고고원에서 쫓겨난 북흉노

 

한무제는 흉노에 대하여 맹렬하게 반격하였고, 이로써 흉노의 원기는 크게 상하였다. 서한말기에 이르러 흉노는 분열하게 횐다.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는 부족을 이끌고 한나라에 귀순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를 돌아다리며 한나라를 적으로 삼았던 질지선우(支單于)도 역시 한나라 장수 진탕의 "강한 한나라를 침범하는 자는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주살한다(明犯强漢者, 雖遠必誅)"는 원칙에 따라 소멸당했다. 한-흉노관계는 이로써 해결된 것이다.

 

동한초기, 흉노귀족중 한나라에 반대하는 세력이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이로써 흉노는 다시 분열된다. 남흉노는 한나라에 귀순하고, 북흉노는 계속 한나라와 대적한다. 자주 남흉노와 한족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당시 동한은 막 건국되었고, 국력이 아직 회복기에 있으므로 한명제에 이르러 비로소 북흉노에 대한 반격전을 펼친다. 기원73년, 한군은 4로로 나누어 북흉노를 격퇴한다. 두고(竇固), 경충(耿忠)의 한나라군데는 천산일대까지 추격하고, 이오(伊吾, 현재의 신강성 하미)를 획득한다. 한화제때, 다시 북흉노에 대한 반격전을 펼쳐, 기원89년 두헌(竇憲), 경병(耿秉)은 한나라군대를 이끌고 북흉노를 대파하며, 연연산(燕然山, 지금의 몽고 항애산)까지 추격한다. 기원91년, 한나라군대는 다시 북흉노를 친다. 금미산(金微山, 지금의 알타이산)에서 북흉노를 대파한다. 북흉노는 할 수없이 서쪽으로 도망친다. 이에 이르러, 동한은 북흉노와의 전투에서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고, 한나라와 대적하던 북흉노는 한나라와 남흉노의 합격을 받아 더 이상 막북몽고고원에서 살 수가 없게 되어 몽고고원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북흉노 서천의 제1참: 이리하(伊犁河) 유역

 

서천(西遷)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서쪽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기원91년 북선우는 전투에서 패한 후, 잔여무리를 이끌고 이리하유역에 있던 오손국(烏孫國)까지 도망치며 이곳에 발을 붙인 후 여전히 천산의 남북에 출몰하며 약탈을 자행한다. 119년, 북흉노는 이오(신강 하미)를 함락시키고 한나라 장군 색반(索班)을 살해한다. 서역의 북흉노에 대하아기 위하여 동한조정은 반용(班勇)을 서역장사로 임명하여, 유중(柳中, 신강 투루판 일대)에 주둔시킨다. 반용은 124년, 126년 두번에 걸쳐 북흉노를 격파한다. 이로써 서역의 국면이 안정된다.

 

반용이 퇴직한 후, 북흉노의 세력이 다시 머리를 든다. 한나라 장군 배잠(裴岑)은 137년 군대를 이끌고 북흉노 호연왕(呼衍王)을 파리곤(巴里坤, 현재의 신강 파리곤)에서 격파한다. 151년, 한나라 장군 사마달은 한나라군대를 이끌고, 포류해(현재의 신강 파리곤호수)로 출격하여, 북흉노의 새 호연왕을 격파한다. 호연왕은 북흉노를 이끌고 다시 서쪽으로 철수한다. 이로써 제2차 서쪽도망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북흉노 서천의 제2참: 시르하(錫爾河, Syr Darya)유역

 

시르하는 중앙아시아의 내륙강이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을 거쳐 아랄해(咸海)로 흘러들어간다. 하나라때 이곳에는 강거국(康居國)이 있었다. 북흉노는 서역에서 한나라의 반격을 받아 이미 발붙일 곳이 없었다. 약160년경, 북흉노의 일부분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시르하유역의 강거국으로 왔다. 북흉노인의 강거국에서의 활동은 사료기재의 결핍으로 현재 알 수가 없다.

 

북흉노 서천이 제3참: 돈강(Don, 頓河)의 동쪽, 카스피해(里海)의 북쪽

 

개략 기원290년경, 북흉노는 돈강이동의 아란국(阿蘭國)에 나타났다. 이 역사는 중국의 <<북사. 서역전>>과 로마제국의 <<역사>>에도 모두 기재가 있다. 북흉노는 아란국의 국왕을 죽이고, 아란국을 철저히 정복한다.

 

북흉노 서천의 제4참: 돈강의 서쪽, 다뉴브강(多河)의 동쪽

 

아란국에서 휴식과 보급을 받은 후, 북흉노는 완전히 원기를 회복했다. 약탈과 탐욕의 본성은 그들로 하여금 돈강 서쪽의 초원에 침을 흘렸다. 374년, 흉노는 대선우 파람보르(巴蘭姆伯爾)의 지휘하에, 돈강을 건너고, 동코트인을 향하여 진공했다. 동고트인은 흉노의 적수가 아니었다. 전투를 거쳐 참패하고, 일부분 동고트인들은 서쪽으로 도망친다. 그리하여 서고트인들쪽으로 간다. 흉노는 그들을 추격해와서 서고트인의 거주지까지 간다. 서고트인은 드니에스터(Dniester, 루마니아러로는 Nistru)강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몰도바를 흐름)에 진을 쳤고, 흉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흉노인들은 밤을 틈타 몰래 드리에스터강의 상류를 건너고, 그 다음에 서고트인들의 진을 배후에서 치게 된다. 서고트인도 참패하였으며 어쩔 수 없이 다뉴브강까지 도망친다. 나중에 로마제국황제의 비준을 받아, 동, 서고트인은 다뉴브강을 건너서, 로마제국으로 들어가 난을 피한다. 이후, 로마제국은 고트인들에 대ㅏ여 잔혹하게 착취하여, 고트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378년, 로마제국의 황제는 친히 고트인들을 치러가나, 고트인들에게 살해된다. 로마제국은 큰 타격을 입는다. 이때의 흉노는 남러시아대초원을 점거했으므로 잠시 안정하고 있었다.

 

남러시아초원을 점거한 후의 흉노족의 활동

 

고트인을 격파하고, 남러시아초원을 점거한 후, 흉노족들은 휴식을 취하였고,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동시에, 소수의 흉노기병은 여전히 인근국가를 유린했다. 한 무리의 흉노기병은 다뉴브강을 건너 고트인들과 함께 로마제국을 교란시켰다. 다른 한 무리의 흉노족들은 기원384년, 메소포타미아로 진공하여, 에데사(Edessa)성을 점령한다. 그리고 다른 한무리의 흉노인들은 396년,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에 침입한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흉노족들은 이 시기에 기본적으로 남러시아초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위주로 하면서 다음 차례의 대규모 침략을 위하여 역량을 비축하고 있었다.

 

흉노 울딘(Uldin, 烏爾丁) 대선우의 활동

 

395년, 로마제국은 동,서로마로 분열된다. 이때의 흉노는 바로 울딘 대선우의 통치기간이었다. 울딘은 매우 야심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기 동로마제국의 트라키아총독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무릇 태양이 비칠 수 있는 곳은, 그가 원하면 모두 정복할 수있다"라고. 400년, 흉노는 울딘 대선우의 지휘하에, 다시 서쪽으로 대규모 침입을 감행한다. 일거에 전체 다뉴브강 분지를 차지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공격해 들어간다. 이 사건의 연쇄반응은 바로 다뉴브강유역의 각부족으로 하여금 흉노족을 피하기 위하여, 할 수없이 서로마의 중심지역으로 진군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410년, 서고트인이 서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함락시킨다. 서로마제국은 유례없는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울딘 대선우는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408년, 울딘이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제국을 교란하면서, 대량의 재물을 빼앗아 철수할 준비를 할 때, 로마인들의 습격을 받아, 울딘 대선우는 전장터에서 사망한다.

 

흉노제국의 건립

 

영토를 계속 확대하는 과정에서, 헝가리평원을 통치중심으로 하여 흉노제국이 건설된다. 오크타르 대선우시기에 기본적으로 건립되며, 선우의 왕정은 안정적으로 오늘날의 헝가리 부다페스트부근에 자리한다. 이 군사제국은 로마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이 된다. 울딘 대선우가 죽은 후, 흉노제국은 한동안 조용히 지낸다. 그러나 오크타르 대선우의 지휘하여 흉토제국은 다시 흥성한다. 오크타르가 죽은 후, 그의 형제인 루카가 왕위를 승계한다. 루카 대선우는 422년과 426년에 두번에 걸쳐 동로마제국의 트리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유린하며, 동로마제국황제로 하여금 매년 350파운드의 황금을 조공으로 바치도록 하게 된다. 이후, 동로마제국은 변경의 흉토제국에 시장을 개방하여 변경의 안정을 도모한다. 흉노인들의 영광은 마침내 서방에서 실현되었다.

 

아틸라 대선우통치의 확립

 

434년 루카 선우가 사망한다. 그의 두 조카인 아틸라(Attila)와 블레다(Bleda)는 공동으로 왕위를 승계하며 각각 일부분 영토를 관장한다. 두 명의 선우는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바로 동로마제국에 대한 침략을 시작한다. 동로마황제에게 흉노의 반역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매년 바치는 조공을 두 배로 늘여서 350파운드의 황금을 700파운드로 늘이라고 요구한다. 동로마황제는 무력위협 앞에 어쩔 수 없이 승락하게 된다. 445년, 블레다 선우는 신비롭게 칼을 맞아 죽는다. 아틸라는 흉토제국의 유일한 대선우가 된다. 아틸라는 더욱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 그의 지휘하에, 전체 유럽은 흉토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되고, 흉노제국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전성기의 흉노제국

 

아틸라 대선우는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즉시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창끝은 북유럽과 동유럽으로 향했다.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앵글로색슨족은 흉노족을 피해서 잉글란드섬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많은 노르만과 슬라브인의 부족은 전투에서 패하면서 흉노에 하나하나 투항한다. 동방과 북방을 공고히 한 후, 아틸라 대선우는 447년 대거 동로마제국으로 진입한다. 동로마군대는 연전연패한다. 흉노의 기병은 한꺼번에 다닐해협과 그리스의 온천관에 이른다. 이로써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르자, 동로마제국황제는 어쩔 수 없이 화평을 구한다. 쌍방은 448년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동로마제국은 즉시 흉노에 배상금 6000파운드황금을 지급하는 외에, 매년 700파운드의 황금을 다시 2100파운드로 증가시키게 된다. 이에 이르러, 흉노제국의 강역은 동으로는 카스피해, 북으로는 북해, 서로는 라인강, 남으로는 알프스산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장기간에 걸친 흉토의 약탈과 조공의 침중한 부담으로 재부는 기본적으로 바닥이 났다. 그래서, 아틸라는 다시 눈을 서로마제국으로 돌린다.

 

아틸라의 갈리아전기

 

450년, 아틸라는 동, 북, 남에 대한 정복을 완성한 후, 창끝을 서로마제국으로 돌렸다. 이 해에 아틸라는 사자를 로마로 보낸다. 서로마황제의 누이인 하노리아공주를 처로 삼겠다고 요청하고, 서로마제국의 절반의 땅을 시집올 때 같이 가져오라고 요구한다. 이와 같은 과분하고 치욕적인 요구를 서로마제국황제는 당연히 거절한다. 그래서 아틸라 대선우는 이를 핑계로 서로마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그해, 아틸라는 대량의 흉노전사 및 피정복민족의 군인을 모았는데, 50만대군이라 칭했다. 이들은 라인강을 건너, 서로마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를 향해 진공한다. 갈리아의 도시는 초원의 사냥감들처럼 흉노족에 의하여 하나하나 망가져갔다. 마침내 흉노족의 주력이 갈리아의 중심도시 오를레앙을 포위하였다. 이때, 공동의 적을 맞이한 서로마인과 서고트인은 잠시 그들간의 투쟁을 멈추고, 연합군을 조직하여 오를레앙을 지원하러간다.

 

연합군을 맞이하여, 아틸라는 오를레앙에 대한 포위공격을 중단하고, 기동, 우회작전을 써서 적과 결전을 벌일 기회를 찾는다. 451년 6월 20일, 아틸라의 흉노대군은 서로마, 서고트연합군과 지금의 파리시 교외에서 대결전을 벌인다. 전투는 아주 참혹했다. 하루만에 쌍방의 전사자가 15만에 달하였다. 최종적으로 서고트국왕이 전사하고, 잔여부족도 전장터를 떠난다. 그러나, 흉노의 손실도 참혹해서, 더 이상 진공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라인강으로 물러가서 다시 역량을 모았다.

 

하느님의 채찍. 서로마에 대한 징벌

 

452년, 휴식을 취한 흉노제국은 다시 서로마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하느님의 채찍"이라고 불리우던 아틸라는 서로마에 대한 징벌을 시작했다.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군대는 알프스산을 넘어 이탈리아로 침입해 들어간다. 이탈리아북부지구는 흉노인의 미친듯한 공격을 받게 된다. 북부의 모든 도시는 흉노족에 파괴당한다. 이후, 흉노족은 중요도시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병사를 몰아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쳐들어간다. 서로마황제는 당황하고 두려워 할 수없이 로마교황인 리오1세를 보내 흉노족들에게 화평을 요청한다. 이때, 흉노족의 군대에는 돌연 전염병이 발생한다. 동로마제국의 원군도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아틸라는 평화요청을 받다들인다. 다만, 철군전에 여전히 큰소리친다. 만일 서로마황제가 그녀의 누이인 하노리아공주를 흉노로 보내지 않으면, 그는 다시 서로마를 칠 것이라고. 이렇게 로마인들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흉노족들이 약탈한 재물을 가득 싣고 떠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북부는 모두 폐허로 변했다.

 

아틸라의 신비한 사망과 흉토제국의 와해

 

453년, 아틸라 대선우는 한 소녀를 비로 삼는다. 그런데, 신혼일 밤에 아틸라는 신비스럽게 죽은채로 침대에서 발견된다. 아틸라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은 대선우의 지위를 뺏기 위하여 싸우고, 내전에 돌입한다. 흉노제국은 순식간에 와해붕괴된다. 흉노제국의 내전은 피정복민족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454년, 동고트, 지피디인으로 연합군을 구성하여, 헝가리에서 흉노를 격하한다. 이로부터 흉노족들은 남러시아초원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461년, 아틸라의 한 아들이 다시 흉노제국을 재건하려고 하며, 다뉴브강유역에서 동고트인과 전쟁을 일으키나 실패로 끝난다. 468년, 그는 다시 동로마제국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나, 그 자신이 전장터에서 전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로부터 흉노는 점차 사라지며,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지게 된다.

 

후기

 

흉노제국이 붕괴한지 얼마되지 않아. 흉노의 침략을 받고, 흉노의 서천으로 인한 야만족의 침입으로 서로마제국은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는다. 476년, 노르만의 용병이 로마시를 점령한다. 마지막황제인 6살의 로몰로는 포로가 된다. 서로마제국은 이로써 멸망한다. 이것은 유럽에서 봉건시대가 개막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