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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흉노제국 멸망의 진상

by 중은우시 2007. 5. 7.

1세기중엽, 몽고고원에서 활약하던 흉노는 중국의 동한왕조로부터 여러차례의 공격을 받고, 또한 몽고고원에 새로 등장한 선비족들에 밀려서, 부득이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300년간 역사서에서 흉노족의 거취에 대하여 언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4세기, 이 신비한 민족은 다시 유럽에 나타난다. 카스피해북부의 돈강의 초원에서 유목을 하게 된다.

 

375년, 흉노인들은 대규모로 확장한다. 그들은 서쪽으로 아란인(Aran)과 동고트인을 몰아내고 다뉴브강가에 국가를 설립한다. 그리고는 남으로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계속 진격하여 페르시아와 시리아에 이른다. 흉노인들의 잔혹함은 유명하고,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왕왕 폐허만 남았고, 백골만 남았다. 헝가리초원에 들어간 후, 흉노족들은 잠시 정착한다. 433년, 흉노의 대선우(大單于) 아틸라(Attila)는 각부의 수령이 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다. 434년 아틸라는 그의 형인 브레다(Bleda)와 공동으로 왕위를 승계한다. 441년경에 군대를 이끌고 다뉴브강 중류에서 강을 건너 남하하고 비잔틴제국을 공격하며, 신기두넘(Singidunum, 지금의 베오그라드)등지를 점령한다. 443년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진격하여, 비잔틴황제인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2세로부터 조공을 받기로 하고 화의를 맺는다. 445년경 브레다를 죽이고 왕권을 독차지한다. 447년에는 발칸반도를 침입하여 데오도시우스 2세로 하여금 영토를 대거 할양하고, 계속 조공을 바치도록 한다. 동으로는 볼가강에서 서로는 라인강, 남으로는 다뉴브강의 광활한 토지에 이르는 방대한 제국이 형성된 것이다. 아틸라가 통치하던 20년간, 흉노의 수도인 부다는 유럽의 정치중심이었고, 각국의 사자들이 운집했다. 서로 앞다투어 아틸라에 공물을 바쳤으며, 신하가 되기를 맹세했다. 흉노제국의 전성기이다.

 

5세기, 로마제국은 이미 바람앞의 등불이었다. 그는 야만민족과의 전투에서 점차 힘이 딸렸다. 그리하여 그들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로마제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출현한다. 그는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 390?-454))이다. 아르케스는 갈리아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서로마군대에서 전공을 많이 세우고 나중에는 서로마황제의 기병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아르케스는 청소년기에 고트인과 훈족이 있는 곳에서 지냈다. 아르케스는 흉노에 인질로 있는 동안, 많은 흉노귀족을 사귀었다. 흉노의 지지를 받아, 아르케스는 신속히 로마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서로마제국의 갈리아총독이 되었다. 그는 갈리아에서 서고트인, 프랑크인과 아란인등 야만족들과 전투를 하면서 연전연승했으며, 명성을 크게 떨쳤다.

 

아에티우스와 아틸라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잘 알았고, 두 사람은 교분이 두터웠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를 위하여 학식이 많은 개인비서를 구해주고, 아틸라의 외교정책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는 자기의 아들을 아틸라의 곁에 보내어 기마와 궁술을 배우게 했다. 아에티우스는 흉노제국과의 평화공존을 원했다. 그는 서로마가 국경내의 노르만족을 상대하는데도 이미 힘겹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흉노제국과 싸우기는 힘들었다. 청년시기에 인질로 있던 경력으로 아에티우스는 흉노제국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고, 흉노족의 전법도 잘 알았다. 그리고 흉노족의 약점이 무엇인지도 잘 알았다. 아에티우스의 노력으로 서로마제국은 20여년간의 평화를 누린다. 이 기간동안 아틸라는 여러차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침공했지만, 서로마제국과는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이익의 다툼은 이 사이좋은 두 친구를 갈라놓는다. 아에티우스의 풍부한 경력은 그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흉노의 극성이 되게 하였다.

 

야심만만한 아틸라는 일찌감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번영과 부유함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449년, 서로마제국의 황제의 여동생인 오노리아(Honoria)가 시종장과 사통한 것이 발각되어 발렌티니안은 그녀를 수도원에 연금해둔다. 풍류적이었던 오노리아는 암중에 아틸라에게 서신을 보내어 구해달라고 요청하며, 그에게 몸을 맡기겠다고 한다. 아틸라는 즉시 서로마황제에게 오노리아를 내놓으라고 하고, 서로마제국의 절반의 국토를 혼수로 가져오라고 한다. 이처럼 과분하고 치욕적인 요구는 당연히 서로마제국황제로부터 거절당한다. 그래서 아틸라는 이를 빌미로 서로마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450년, 아틸라는 흉노군과 피정복민족의 용병 50만명을 이끌고, 서로마의 갈리아로 진군한다. 갈리아의 각 도시는 하나하나 함락되었고, 아틸라의 군대는 창끝을 오를레앙으로 향하였다. 아틸라의 대군은 갈리아북부를 유린함으로써 서로마제국의 모든 야만족들은 놀라게 되어, 모두 홀로는 흉노족에 대항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아에티우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방을 뛰어다니며 각 야만족을 연합하여 흉노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형성한다. 갈리아와 스페인 각지의 노르만족, 심지어 브리튼의 켈트부락까지 병사를 파병해서 지원했고, 아에티우스와 20년간 싸워오던 서고트왕인 테오도릭(Theodoric)은 친히 병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아틸라가 오를레앙의 성아래에 군사를 주둔시킬 때 아에티우스의 서로마연합군은 이미 커져 있었고, 이미 50여만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흉노족을 향하여 정식으로 개전을 선언한다. 두 명의 옛 친구는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난 것이다.

 

아틸라는 서로마연합군이 오를레앙에 가까워오는 것을 알고는 즉시 포위를 풀고 북으로 갔다. 동시에 갈리아 각지에서 약탈중이던 흉노부대로 하여금 샹퍄뉴평원에 모이라고 명령한다. 아에티우스의 대군도 뒤따라 왔다. 양군은 마른강(Marne)변의 샬롱(Chalons)부근에서 만났고, 결전을 위한 진세를 펼쳤다. 서로마연합군측에는 아에티우스가 친히 서로마군단으로 좌익을 이루고, 서고트군대가 우익을 이루고, 중앙에는 아란족과 다른 야만족들이 자리했다. 아에티우스의 이런 배치는 상당히 모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서로마연합군의 가장 약한 부분을 중간에 배치하여 쉽게 흉노군대로부터 중심을 돌파당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서로마연합군의 허리가 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는 중심돌파하는 흉노부대도 서로마연합군으로부터 양쪽 날개에서 협공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옛친구 아틸라를 맞이하여, 위험한 배치를 선택한 것이다. 아틸라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친히 흉노정예기병을 이끌고 중앙에 위치하고, 동고트인을 좌익에 두고, 다른 야만족군대를 우익으로 하였다.

 

451년 9월 20일, 양군은 샬롱에서 전쟁을 개시한다. 쌍방이 이번 회전에 투입한 병력은 합쳐서 100만이 넘었다. 흉노연합군은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화살의 엄호하에, 흉노정예기병은 번개처럼 서로마연합군의 중앙을 공격했다. 야만족으로 이루어진 중앙전선은 버티지를 못했고, 흉노기병은 쐐기형으로 깊이 진입했다. 이때 흉노기병은 왼쪽으로 선회하며, 서고트군대를 포위한다. 아틸라는 전황을 명약관화하게 읽고 있었다. 그는 서로마군단은 흉노족의 맹렬한 공격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서고트족은 병력이 강하여,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섬멸시킬 수만 있다면 승리는 따놓은 것이었다. 그는 흉노연합군의 양익을 함께 밀어붙여서 회전은 혼전양상을 띄게 된다. 서로마연합군의 형세는 위급했다. 전투는 5시간동안 지속되었고, 시신이 온 벌판에 널렸으며, 피가 강을 이루었으며 약 16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강력한 서고트인들은 서로마연합군은 구원했다. 6순을 넘긴 서고트왕 테오도릭은 친히 철갑기병을 이끌고 반격했다. 그러다 화살을 맞고 낙마하고, 뒤따라오던 서고트철기병에 밟혀서 죽고 만다. 수령을 잃은 서고트인들은 잠깐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다. 바로 왕자 토리스몽(Torismond)의 지휘하에 신속하게 질서를 회복한다. 서고트기병의 반격은 흉노인들을 압박했고, 당황하여 갈길을 찾지 못하던 흉노기병은 좌퉁유돌하면서 좌익의 서로마군단의 방패방어선으로 돌진했으며, 표창의 공격하에 하나하나 무너지고 만다. 이때 흉노 좌익의 동고트인들도 서고트 철기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로써 샬롱전투의 승패가 갈린다.

 

아틸라는 어쩔 수 없이 흉노의 잔여병력을 이끌고 마른강변의 숙영지로 되돌아온다. 흉노인들의 마차를 연결시키고 궁수를 깔아서, 아주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다. 아틸라는 나무로 만든 말안장을 작은 산에 쌓아놓고 그의 모든 금은주보와 비빈을 그 위에 둔다. 자기가 그 중간에 앉는다. 서로마군대가 거의 부대방어선을 뚫으면, 스스로 불을 붙여 자결하려는 생각이었다.

 

아에티우스는 중요한 시기에 아틸라에게 기회를 한번 준다. 이 서로마의 걸출한 영수는 장기적인 정치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서로마제국의 심복대환은 흉노가 아니라 갈리아의 야만족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흉노라는 외환을 남겨두는 것이 서고트인을 두목으로 한 야만족들에게 거리낌을 남겨두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고, 그래야 서로마제국과 계속 협력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틸라가 만일 죽는다면 흉노제국도 붕괴될 것이고, 갈리아족은 반드시 창끝을 로마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틸라는 샬롱전투에는 요행히 살아서 도망친다. 그후에 겨우 2년을 더 살았다. 이 2년동안 그는 군대를 조직하여 동로마제국을 공격하기도 하고, 예전의 흉노제국의 위세를 되찾고자 하였다. 453년, 아틸라는 노르만족의 신부 일디코(Ildico)를 맞이한다. 결혼식에서 그는 술을 마시고 대취한다. 다음 날 여러 사람들이 신방에 들어갔을 때, 아틸라는 혈관이 폭발하여 핏속에 거꾸러져 죽어 있었다. 그의 신부는 침상의 구석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아틸라는 순환기계통의 질병으로 죽었다고도 말했고, 어떤 사람은 일디코가 독살했다고도 의심했다. 아틸라의 장례식대 흉노인들은 머리를 자르고 얼굴에 상처를 내면서 선혈로 그들의 왕을 추도했다. 아틸라의 관은 삼층으로 나뉘었는데, 가장 바깥은 철, 두번째 층은 은, 가장 안쪽은 금이었다. 이는 그의 불후의 위업을 상징하는 것이다. 흉노인들은 강물을 막고, 아틸라의 유테를 말라버린 강의 바닥에 묻었다. 그리고는 다시 갑문을 열어 물이 흐르게 하였다. 시공에 참여했던 모든 노예는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후세의 도굴자들이 그의 무덤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의 묘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아틸라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은 대선우의 지위를 쟁탈하기 위해 싸웠다. 내전이 시작되면서 흉노제국은 붕괴한다. 454년, 동고트, 게피다이(Gepidae)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헝가리에서 흉노를 격파한다. 이로써 흉노족은 남러시아초원으로 다시 물러나게 된다. 461년, 아틸라의 아들인 엘락(Ellac)이 흉노제국을 다시 건설하고자 하여, 댜뉴브강 유역의 동고트족과 전쟁을 하게 되나, 실패한다. 468년, 그는 다시 동로마제국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나, 그 자신이 전장터에서 사망하게 된다. 이로써 흉노족들은 사라지게 되고 역사에서 잊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