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양강(楊剛) : 자살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7. 3. 10.

양강은 일찌기 <<대공보(大公報)>>의 문예부간편집, 주미특파원을 지냈고, 1940년대에 그녀의 "미국찰기(美國札記)"는 독자들의 광범위한 사랑을 받았었다. 그녀와 포희수(浦熙修), 자강(子岡), 과양(戈揚)은 신문역사상 드물게 보는 여기자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의 진실한 신분은 그러나 '중공지하당원'이었다. 중경에서건 북경에서건 그녀는 주은래가 중시했던 사람이었고, 모택동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당내에 드물게 보는 여간부'라는 평을 얻었다. 그녀는 1949년전에 왕운생을 설득하여 성공적으로 <<대공보>>를 좌파화시키는데 성공하고 넘겨받아, 개조하게 된다. 1949년후, 그녀는 주은래의 곁에서 일했다. 주은래는 국제선전과 외교방면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고, 그녀는 외교부정책연구위원회 주임비서, 총리판공실주임비서등을 지냈으며, 제1기전인대대표와 중공제8대대표를 지냈다.

 

그녀는 생전에 중국의 신문업계에서 이름이 찬란하고, 죽은 후에도 '당과 인민의 충실한 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녀의 불같은 신념에 동의하던 발든 그녀는 신념에 진실했고 집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신념은 사회주의신중국을 건립하는 것이었는데, 자살로 생을 마쳤다는 것은 하나의 의문부호를 남겨준다.

 

사인이 왜 수수께끼인가?

 

1957년 10월 7일, 반우파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50남짓한 양강(당시 인민일보 부총편집장)은 돌연 자살한다. 그날 오후, 등탁(鄧拓)이 <<인민일보>>에서 그녀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알릴 때, "그녀의 사인을 설명하지 않았고, 추도회도 개최하지 않았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녀의 자살에 대하여 이런저런 얘기가 떠돈다는 것이다. 1984년, 인민문학출판사의 <<양강문집>>에는 그녀의 생전의 친구, 친척들이 쓴 여러 편의 회고문이 있는데, 그의 예외없이 그녀가 자살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종결시켰다는 내용은 회피하고 있다.

 

호교목(胡喬木)은 1983년 6월에 쓴 서문에서 "그녀는 1955년 불행히 차량사고를 당해서 엄중한 뇌진탕을 입었다...1957년 10월 그녀는 우연히 한 중요한 필기본을 잃어버렸다. 비록 아무도 책임추궁하지 않았고, 많은 동지들이 그녀에게 조급해할 것없다고 얘기했지만, 그녀는 아주 긴장했다(이것은 당시의 아주 긴장된 정치적인 분위기와 관계있다), 마침내 10월 7일 정신이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하에서 불행히도 인간세상을 떠났다"라고 적었다.

 

호승(胡繩), 원수박(袁水拍)의 <<추억양강>>에서는 그녀의 사인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외부활동으로 차량사고를 당했다. 뇌진탕을 일으켰고, 그 후유증으로 불행히 병사했다"

 

그녀의 친척오빠인 양현동(楊顯東)은 <<육매(六妹, 여섯째 누이동생)을 회고하며...나의 혁명의 계몽선생>>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불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저 자신이 그 소식에 놀라는 광경만을 언급하고 있다:

 

"1957년 가을, 나는 과학대표단을 이끌고 출국하여 고찰하러 갔고, 비행기를 타려고 준비하였다. 내 처가 갑자기 공항으로 왔다. 처량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양강이 죽었다...' 눈물을 참고 비행기에 올랐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재능있고 포부있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일찍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비행기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나는 먼저 도착한 범장강(范長江) 동지에게 이 나쁜 소식을 전했다. 그는 실성해서 소리쳤다. '아깝군. 아깝군....'"

 

그녀의 오랜 친구인 소건은 <<문학가사전>>에서 양강의 소전을 쓰면서 그저 "1957년 10월 7일 서거"라고만 적었다.

 

그녀의 유일한 딸인 정광적(鄭光迪)이 쓴 <<나의 어머니를 추억하며>>라는 글에서는 그녀의 자살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 글을 쓴 때는 이미 그녀가 사망한지 27년이 지난 후였다.

 

1990년 12월, 중국대백과전서출판사가 출판한 <<중국대백과전서.신문출판권>>의 437페이지에는 "양광"이라는 항목에 그녀의 자살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저 담담하게 "그녀는 1957년 10월 7일 서거"했다는 것만 적고 있다.

 

단지, 신화출판사가 1989년에 출판한 <<신문계인물(10)>>에서 양강의 자살이 언급되어 있다. "그녀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는 너무 총망스럽게 갔다" 그리고 그녀의 자살원인에 대하여 평석을 했다.

 

1992년 12월에 출판한 <<금전여신-양강전기>>(오덕재 저)에서는 "그녀는 정신이 아주 비정상적이었고, 심정이 아주 우울한 상황하에서 10월 7일 돌연 세상을 버리고 떠났다" 라고 하여 호교목등의 견해를 그대로 채용했다. 양강이 도대체 정신이 비정상적인 상황하에서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그녀는 임종전에 자홍색의 옷으로 바꿔입고 아주 깔끔하게 입었다는데, 이런 세부적인 상황을 보면 이런 견해는 성립되기 힘든 것같다. 동시대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녀의 표면적인 자살원인은 최소한 이렇다:

 

첫째, 1957년 10월초 그녀는 우연히 중요한 필기본을 잃어버렸고, 이로 인하여 정서가 불안했고, 긴장되었다.

 

둘째, 1955년 차량사고로 뇌진탕을 입어 후유증을 앓았으며, 자주 두통이 왔고, 질병으로 고생해서 그녀는 반휴양상태에 있었다. 업무를 생명으로 생각하는 그녀에게는 이에 따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녀의 유일한 딸은 멀리 소련에 있었고,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가정의 온화함이 없었다.

 

넷째, 1957년 그녀가 자살하기 얼마전에 일찌기 <<북경일보>>가 거행한 "우파" 비판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대공보>>의 동료이며, 같이 중공지하당원이었던 저명한 여기자 자강을 비판했는데, 그녀가 주로 발언했다. 이미 1년여동안 그녀를 만나지 않았던 대공보의 동료기자인 오영량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미 완전히 희었다. 당시 그녀는 50남짓이었다. 그녀의 발언은 1시간조금 더 했다. 손에는 담배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녀가 비판한 제목은 팽자강이 어떻게 자산계급부녀에서 자산계급우파부녀로 전락하였는지 하는 것이다. 목소리가 매우 높았는데, 아마도 마음에 없는 얘기를 해서 그럴 것이다"

 

다섯째, 그녀는 자살전에 '정진(丁陳)반당집단"비판대회에 참가했다. 이번 회의에서 정령(丁玲)의 일찌감치 정치적으로 결론난 역사과오에 대하여 엄중한 비판을 받았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에게 타격을 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도 당의 조직에 의하여 출당되었던 경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호쾌한 성격이었고, 그녀는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도 경건했다. 이런 원인은 모두 그녀가 자살을 선택한 원인이 되기 힘들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는 또 다른 더 깊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설마 우리가 꿈꾸는 것도 과오인가"

 

1957년 6월 9일, 바로 반우파운동을 시작한 인민일보의 사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가 발표된 다음 날, 양강은 "금은화(金銀花)"라는 필명으로 <<인민일보>> 부간에 <<내가 몇 마디 화나는 얘기를 하도록 해달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것은 그녀가 발표한 마지막 글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는 세계의 중앙에 서있다"는 기세와 격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 때 우리가 함께 꾸던 꿈을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수억명의 꿈은 분명히 아주 클 것이다. 그 때, 미국인과 지주관료자본의 채찍은 우리를 때려서 땅바닥을 구르도록 했다. 우리의 고뇌는 하늘처럼 컸다. 우리의 꿈도 하늘처럼 컸다. 하늘에 큰 붉은 깃발을 날리고, 하늘의 장막과 연통이 서로 목을 끌어안고 얼싸안으며, 우리의 홍기를 둘러싸고 소리높여 소리높여 우리의 강렬한 시편을 분출한다. 강철의 화염과 구름: 우리는 모두 일어섰다. 자색빛이 영롱한 신새벽을 열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사회주의라고. 사회주의의 흐름은 인류를 영원으로 태워준다. 비록 우리는 싸우고, 일을 다투고, 먹을 것을 다투고, 관료주의에 반대하지만, 그러나,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 공산당이 없으면 사회주의도 없다. 형제들이여 우리 함께 꿈을 꾸자, 그리고 함께 꿈을 생활로 바꾸자. 이 것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꿈꾸는 것도 과오인가?..."

 

이 한마디 "우리가 꿈꾸는 것도 과오인가?"라는데서 우리는 그녀의 마음 속에 든 불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그녀는 현실에 대하의 의문을 품고 그녀의 꿈에 대하여도 곤혹해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당에 바친 여인으로써, 그녀는 죽을 때까지도 당의 도구가 되기를 원했으며, 방대한 기기에 영원히 녹슬지 않는 하나의 나사못이 되기를 원했었다. 이 때 갑자기 닥쳐온 돌연한 변화에 그녀는 확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날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아직 4개월전이다. 짧은 4개월간 발생한 놀랄만한 일들은 하나하나 일찌감치 역사책에 기록되었다.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많은 정직하고, 선량하고 일찌기 그녀와 함께 이상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친구, 동지들이 '우파'로 몰려 타도되는 것을 목격했다. 마음 속의 우울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녀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그녀를 잘아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그녀는 손에 담배를 들고, 비분강개하여 직언했고, 큰 소리로 말하고 크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로 인하여 '호연지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의 혁명경력은 아주 전설적인 색채가 있다. 그녀는 호북성의 아주 부유한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군벌시대에 성장(省長)을 지냈다. 그녀는 군벌통치하에서 자랐고, 내부에서 그 사악함을 보았다. 그녀는 "4.12"의 피바람이후, 그녀의 사랑하는 상대방이 영원히 실종된 것을 보고는 자기의 가족을 떠나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연경대학에서 비밀리에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하였고, 영어의 몸이 되고서도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1930년대, 그녀는 붓을 무기삼아,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좌익문학진영에서 금방 두각을 나타났고, 일찌기 스노우를 도와 <<살아있는 중국>>을 편역했다. 항전시기에, 소건의 추천을 받아, 그녀는 홍콩대공보의 <<문예>>부간의 주편을 맡았고, 이 자그마한 부간을 "갑옷을 입고, 전포를 걸치고" "하나의 마이크가 되었다" "하나의 붉은 비단을 걸치고 태양을 향하여 높이 소리치는 마이크"가 되어 대량의 연안작가의 작품을 실었다. 그녀는 1940년대에 미국에 파견가 있을 때 미국이라는 자본주의의 상흔을 드러냈고, 그녀는 미국의 신문계, 문예계와 원동문제연구전문학자들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미국이 장개석이 내전을 벌이는데 지원하는데 반대하고, 그들의 공산당에 대한 동정을 얻어내고자 노력했다. 1946년 1월, 국공내전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녀는 일찌기  <<대공보>>의 주미특파원의 신분이 아니라 중국공민의 신분으로 미국대통령 트루먼에게 서신을 보내어 미국이 중국을 도와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 좋은 정부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국민당정권에 대한 경제, 군사적인 원조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그녀의 서신을 받은 후, 상무장관에게 짧은 메모를 보냈다. "본인은 중국정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다. 내가 흥미를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민주정부를 가진 강대한 중국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화의 태평양정책에서 유일한 출로이다" 양강의 노력은 성과가 있었던지여부를 불문하고, 중공지하당원으로서 그녀는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시대변화의 관건적인 시기에, 그녀는 명을 받고 귀국했다. 그리고 공산당지휘부의 의도를 그대로 집행했고, 그녀 혼자서 <<대공보>>를 좌파화시키고 왕운생을 북상시켰으며, 천진<<대공보>>를 <<진보일보>>로 개조했으며, 상해<<대공보>>의 볼세비키화를 완성했다. 포연이 없는 전장터에서 그녀는 홍색강산을 건립하는데 피땀을 흘렸던 것이고, 모택동은 일찌기 서백파(西柏坡)에서 그녀를 친히 접견했었다.

 

그녀는 마치 불꽃을 달고 다니는 것같았고, 모든 생명을 자기의 이상에 바쳤다. "남자는 있었지만, 남자의 처가 되지는 않았고, 아이는 있었지만 아이의 모친이 되지는 않았다" 남편과 그녀는 이혼한 후 일본비행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어린 딸은 연안으로 보내졌고, 그녀 자신은 오랜 기간동안 독신으로 생활했다. 1949년 10월, 그녀는 신문계의 대표신분으로 개국대전에 참석했으며, 억제하기 힘든 흥분으로 <<모주석이 우리와 함께 하다>>라는 글을 썼다. 그 글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수천년동안의 희망, 우리의 수천년동안의 요구는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부강의 다섯 가지를 모두 갖춘 국가를 만들자는 요구였다. 과거 자주 사람들이 백일몽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저 소리높여 노래부르던 것인데, 현재 이 수천년의 큰 꿈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이 때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의 닻을 꺽은 때로부터 8년밖에 남지 않았을 때이다. 그녀는 여전히 "큰 꿈"의 실현을 위하여 환호하고, 높이 노래불렀는데, 순식간에 나뭇잎은 떨어져 흩날리고, 사람도 달라지고 상황도 달라졌으며, 꿈은 여전히 꿈이지만, "우리가 함께 꿈을 꾸고 함께 꿈을 생활로 바꾸려고 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과오인가? 설마 우리가 꿈꾸는 것도 과오인가?" 그녀가 내뱉은 의문은 너무나 침중했다.

 

"큰꿈"에 대한 진정

 

그녀는 이상주의자였다. 아무도 그녀가 추구하던 "큰 꿈"에 대한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일찌기 연경대학에서 공부할 때, 그녀와 미국적의 교수인 포귀사(包貴思)는 깊은 관계를 맺었다. 포귀사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이고, 양호한 서방인문주의교양을 가진 교수였다. 두 사람은 신앙은 전혀 달랐고, 많은 현실문제에 대한 견해도 달라서, 자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양강의 청성, 진솔, 그리고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성격, 이상을 추구하는 용기는 그녀를 깊이 감동시켰다. 그녀(포귀사)는 심지어 이 헌신정신을 가진 혁명학생의 이미지를 일생중 유일하게 쓴 그녀의 소설속에 그리기도 했다. 서로다른 신앙도 양강의 이 인격이 고상하고 학식이 깊었던 선생에 대한 존경의 념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녀들간에는 아주 친밀한 우정이 이십여년간 계속되었다. 이것은 소건의 마음에 품고 있던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는 그녀들의 교류에서 양강은 자기의 정치적인 견해를 감추지 않았을 뿐아니라, 시종 대의늠름했고, 기치가 선명했었다. 그녀들간의 우정은 진솔함에 그 가치가 있었다.

 

1945년 9월 3일, 양강은 항일전쟁의 종료에도 특별한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포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정부가 국민당정부를 지지하는데 강력한 불만을 표시했다. "부패하고 이기적인 정권을 중국인민의 머리위에 놓고 있다" 고 미국지식인 및 종교계인사의 수수방관을 비판했다. "눈을 시뻘겋게 뜨고 그들은 자기의 군대가 국민당을 도와 중국인민의 마음에서의 희망을 훼멸시키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 그녀가 보기에 이 "희망"은 바로 그녀가 몸담은 혁명당에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잘한 정객들이 모여서 더러운 정치각축을 벌이는 정당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수천년동안 그들은 자유와 존엄을 얻어본 바 없다)을 위하여 투쟁하는 위대한 민족의 화신이다"

 

1950년 1월, 양강과 포귀사는 마지막으로 만나서 또 논쟁을 벌였다. 왜냐하면 미국교수는 "공산당의 거대한 압박성의 사상통제"를 비난하였다. 한창 기세가 오르고 있고, "큰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중국학생은 오히려 반박했다. "월스트리트의 사상통제는 아주 고명하다"고. 그 때 그녀들은 누구도 이후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서로 몰랐다(포귀사는 얼마되지 않아 중국을 떠난다)

 

만일 수천수만의 그녀와 같은 천진난만하고 이 당을 희망의 화신이라고 보고 유혈희생도 서슴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우수한 청년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중의 천번지복의 승리는 얻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불행한 것은 현실은 그녀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점이다. 그녀들의 희망이 철저히 분쇄되기 전에 양강이 포귀사에게 한 이 말이 완전히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그녀는 진정으로 당시의 투쟁은 확실히 자기와 민족의 자유, 존엄을 위한 투쟁이라고 믿고 있었다. 혁명의 와중에서, 그녀들중 많은 사람들이 말려들었다. 위군의(韋君宜)와 같이 <<사통록(思痛錄)>>을 쓰고, 살아서 자기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생존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들이 그 때 혁명에 투신할 때 마음속에는 어찌 양강처럼 그런 아름다운 환상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역사의 법칙은 무정하다. 양강은 겨우 1957년까지밖에 살지 못했다. 그래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없었다.

 

"우리는 자살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

 

어떤 사람은 "그녀는 아마도 죽음으로써 해탈을 찾으려 한 것같다. 강하면 부러지기 쉽다. 그녀의 강렬할 개성은 구부러질 수 없었다" 이 말만으로는 양강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양강은 생전에 적어도 두번은 자살에 대하여 얘기했었다는 점이다.

 

1943년 8월, 그녀는 비정청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내 생각으로, 중국인은 생활에서 견지하는 신념은 어떤 이치를 보여주고 있다....우리는 자살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우리는 고의로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아주 드물다...우리는 쉽게 변화하거나 서양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적응할 것이나, 힘을 다하여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우리는 현실을 중시하고 상상을 경시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어서 "내가 보기에, 만일 이런 특징이 우리의 현실에 부합한다면 그들은 없어져야 한다. 비겁, 마비, 이기, 비열, 대담한 사고의 결핍, 세속의 욕망은 실제로 상상력이 풍부한 현실주의를 압도하고 있고, 야만적인 전제정치에 대하여 쉽게 타협하고 몸을 굽히게 된다. 중국인이 진정한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런 것들을 없애야 한다" 이 편지에서, 그녀는 "우리는 자살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고 적었고, 이것이 한민족의 약점의 하나라고 하였다. 분명히 그녀는 죽음보다 못하게 구차한 삶을 영위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50년 3월, 양강이 미국유학 때의 스승이고, 자유주의의 신봉자이며, 굳건히 미국당시의 전쟁정책에 반대했던 마티슨 교수가 보스톤에서 자살했을 때, 양강은 회고글 <<미국전쟁정책하에서 죽은 마티슨>>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자살했다. 그는 왜 그랬는가? 통상적으로 우리는 자살을 자살자의 연약함때문이라고 몰아부치는 경우가 많다. 일정한 의미에서 이것은 맞는 말이다. 특히 진보역량과 반동역량이 죽기살기로 투쟁하는때에는 기본적으로 진보역량에 속한 개인 또는 반동세력의 압박을 참을 수 없거나, 혹은 투쟁이 격렬하거나, 승부가 분명하지 않고, 형세가 혼란함으로 인하여 사상갈등이 생기고, 앞날을 볼 수 없는 상황하에서 죽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기로 결심할 수 있다. 이런 일은 모두 연약하고 힘이 없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단순하게 개인의 요소로 그 사람이 계속 살아가고싶어하지 아니하는 원인을 해석하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특히 마티슨은 본질적으로 미국자산계급민주사상의 우수한 계승자이다. 그가 죽은 것은 바로 잔혹한 계급투쟁과정에서 그가 계급투쟁의 사상내용을 얻지 못하고 그가 정신적인 의지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공산당원으로서 양강은 계급론의 관점에서 마티슨교수의 죽음을 분석했다. 그녀들 두 사람의 자살은 모두 이유가 있고, 비교해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어떤 사람이 지적한 것처럼 두 가지 점은 양강의 죽음을 분석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첫째, 자살은 반드시 개인의 연약함의 표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그녀는 일찌기 비정청에 대한 서신에서 중국인은 자살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고 적음으로써 뜻을 밝힌 바 있다.

 

둘째, 단순히 개인의 요소로 이 사람이 계속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원인을 해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강에 대하여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그녀가 최후로 자살을 결심한 요소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신병도 좋고 중요한 필기본을 잃어버린 것도 좋고, 가족이 곁에 없는 고독도 좋고, 동지들이 계속 우파로 몰려 타도되는 것에 대한 공포도 좋다. 이것들은 모두 치명적인 것들은 아니다. 그저 유인이 될 뿐이다. 이상주의의 파탄이 바로 그녀가 자살한 근본원인이다.

 

이상주의자로서, 연경대학에서 입당한 이래, 그녀는 자기의 이상에 이미 30년을 헌신했다. 당 밖에 있는 기간동안에도 이런 신념은 바뀐 적이 없다. 그녀는 시종일관하게 불꽃을 불태웠다. 1957년의 더웠던 여름이후, 그녀의 이상의 불꽃은 혹시 점점 사그러든 것은 아닐까? <<나에게 몇 마디 화나는 말을 하게 해달라>>는 글은 아마도 이 환멸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일찌기 힘들여 추구했던 꿈이 깨졌다. 그녀의 성격상으로 그녀의 이상에 대한 충성으로 보면 그녀는 눈앞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1940년대초, 그녀는 중경에서 일찌기 비정청과 중국지식인은 권력에 의탁하곤 했다는 점에 대하여 논의한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일체를 바쳐 독립인격을 유지하기 위하여 분투하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아무런 의문없이 그녀가 투신한 조직, 집단이 진정으로 전체 중국인에게 자유와 존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 시간이 빨리 흘렀고, 사상개조운동도 발생했고, 호풍분자도 제거되었다. 1957년 10월 7일, 밀려오는 반우파운동을 보면서 그녀는 돌연 자살방식으로 자기의 이상을 순장시키는 외에는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양강의 자살은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이상의 분석은 아마도 너무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리에는 맞는다.

 

양강이 죽은 후, <<인민일보>>는 또 어떤 사람이 그녀를 우파로 몰려고 했으나, 다행히 주은래가 말을 해주어서 화를 면한다. 그러나 문혁이 시작되고서는 어떤 사람이 그녀를 공개적으로 우파 행렬에 포함시켰다. 이런 상황으로 보면, 그녀가 살았더라면 반우파운동은 피해갔을지 몰라고, 문혁은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이후의 길고긴 자살자명단을 보면 일체는 분명해진다. (어찌 신문계뿐이겠는가), 양강과 함께 <<대공보>>에서 일하던 사람중에도 범장강, 맹추강, 유극림, 장음은등이 연이어 목을 매거나,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빌딩에서 투신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끝냈다. 양강의 죽음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