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노사(老舍)의 죽음

중은우시 2007. 3. 12. 00:00

글: 장니(蔣泥)

 

노사가 박해를 당한 것은 이미 기소당했던 북경시 전시장 팽진(彭眞)의 '공모자이고, 또한 <<북경문예>>의 주편으로 그는 <<해서파관(海瑞罷官)>>의 발표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으며, 이런 일들로 인하여 계속 전전긍긍했었다.

 

1966년 7월 10일, 수도의 각계대표는 인민대회당에 모여서 월남반미전쟁지원대회를 개최하였다. 노사는 출석하였고, 주석단에 앉았다. 이때, 이런 경우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이미 오랜만의 일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같이 대회에 참가했던 파금(巴金)에게 "친구들에게 난 문제없다고 전해주게. 나는 아주 좋아. 난 금방 총리와 진부총리까지 봤다고."

 

이 어조를 지금 사람들이 듣는다면 비량(悲凉), 처참(凄慘), 실기(失氣)를 느낄 수 있다.

 

7월 13일 그는 집에서 선혈을 토하여, 병원에 보내진다. 다 낫기도 전에 그는 외부의 운동이 걱정되어 퇴원한다.

 

8월 21일이 되어,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가나서 말한다: "사구(四舊, 네가지 낡은 것)을 파괴하고, 이걸 깨고, 저걸 부시고, 도대체 누가 이렇게 큰 권력을 주었는가? 또 사람을 죽이고, 특히 열성적이고 깨끗한 사람들을"

 

죽음에 대하여, 노사는 일찌감치 언급한 바 있었다. 굴원의 "사절(死節)"은 그의 마음 속에서 위대한 인격의 표본이었다. 당연히 그 안에는 잘못이해한 곳도 있었다. 이것은 바로 "절"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굴원은 멍청하고 무능한 초회왕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의 재주라면 제후에게 유세하면, 어느 나라인들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은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의 "절개"의 의미는 임금에 충성하는데 한정되었고, 자기의 일생을 그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기탁했다. 이것은 너무나 편협한 이해였다. 그러나, 사람은 왕왕 환경과 시대의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시절에, 임금에 충성하는 것은 바로 자기의 조국에 충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곧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굽은 길을 가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절개있고 고상한 사람들은 자기의 청백한 인격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개와 절개를 꺽지않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살을 택하곤 하였다. 후기로 갈수록, 노사의 작품에는 자살하는 심리강도가 갈수록 커졌다.

 

<<노장의철학>>의 이정, <<조자왈>>안의 이경순에서 <<묘성기>>의 대응, <<사세동당>>의 기천우, <<차관>>의 왕리발등의 죽음은 모두 자기신앙과 인격에 대하여 자기의 몸으로 간하고 순난하는 성격의 것이며, 종교정신을 가지고 있고, 노사자신의 자살에 대한 '리허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가 일찌기 구가한 바 있는 '삼반', '오반'에서 어떤 친구가 모함을 받아 변명이 통하지 않자, 호성하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이 하책이라고 말들이 많았는데, 노사는 이것도 의견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인정하였다. 생각도 못하게, 그도 이 길을 걸었다. '문혁'때 문화계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사람이 된다. 그 뿐아니라, 그가 피해를 입은 방식도, 위에서 친구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군중집회를 통하여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사람마다 욕하고 때리는 방식이었다.

 

8월 23일, 이미 출근할 곳도 없는데도 노사는 갔다. 문련(文聯)의 건물안에는 대자보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없어보였고, 이상해보였다. 노사는 사무실안에서 죽어라 담배를 피웠다. 정오가 되었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운전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오후 한 무리의 홍위병들이 문련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한세대를 미치광이처럼 방향을 읽고 더 이상 공부하지는 않았던 여팔중(女八中)의 중학생들이었다. 원래 성현가의 공묘에서 경극의 복장과 도구등 "사구"를 불태웠다. 그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자기의 파괴성운동이 당과 국가를 정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문화국의 몇명 간부를 불러다 비판대회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문화국과 문련은 거리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서, 가보았다. 그리고 몇명 유명인사를 붙잡아서 비판대회를 하고자 하였다. 노사는 그의 친구까지 이름이 불리는 것을 보고, 스스로 일어섰다. 한 학생이 발견해서는 소리쳤다. "저자가 노사이다. 그들의 주석이다. 대반동권위이다. 그를 차에 태워라"

 

이렇게 그와 소군(蕭軍), 낙빈기(駱賓基)등 30여명의 예술가들이 트럭에 실렸다. 그리고, 안정문바깥의 국자감대원으로 끌려갔다. 홍위병들은 문련도서관의 책을 가지고 나와서 불태우고자 하였다. 노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늙었다. 이것은 국가의 문화이니, 파괴해서는 안된다. 만일 원한다면 책을 가져가라. 절대 태우지는 말아라." 대원에 도착한 후, 홍위병은 책을 대리석주랑에 쌓아두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노사는 미친듯이 가서 구하려고 하다가 얻어맞았다. 홍위병은 "혁명"을 시작했다. 예술가들을 사방이 불붙은 곳에서 무릎을 꿇게 하고, 도구를 들어서 그들을 때렸다. 노사는 맞아서 머리가 깨지고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안색은 창백했고, 선혈이 와이셔츠를 적셨다. 그래서 경극을 부를 때 쓰는 소매로 싸맸다.

 

혁명위원회의 사람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얻어맞자, 사람이 죽으면 책임지기 힘들다는 생각에서 노사처럼 고혈압인 사람들을 먼저 돌려보냈다. 원래는 선의였는데, 생각도 못하게 이미 가득찬 수백명의 14,5세의 여홍위병들은 "자산계급"작가, 예술가에 대한 비판투쟁을 더욱 강렬하게 진행하였다.

 

노사는 소매로 얼굴을 묶어서 주의를 쉽게 끌었다. 한 30여세의 키큰 사람이 노사를 본 후에 소리쳤다:
"혁명소장들이여, 너희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반혁명흑방분자인 노사이다. 그는 오늘 오후 비판회에서 아주 솔직하지 못하였다...."

 

노사는 머리를 들어 변명했다: "나는 솔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라. 없는 일을 내가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키큰 사람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소리쳤다. 몇 학생들도 몰려왔다. 그의 손을 잡고, "분기식(噴氣式)"으로 앉혀서 소리높여 "흑방분자타도"를 외쳤다. "노사가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그를 죽이자"고 키큰 사람은 다시 격려했다. 홍위병들은 노사에 대한 비판투쟁회를 개최했다. 그들의 열정은 고조되었고, 끌고 밀면서 노사를 앞으로 내보냈다. 한걸을 나갈때마다 머리는 한대씩 맞고, 엉덩이도 한대씩 맞았다. 그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세번은 흔들였다.

 

사람이 가득찼고, 노사의 목에는 목패가 걸렸다. 거기에는 "반혁명흑방분자"라는 몇개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가는 철사가 그의 피부로 파고들었다. 그는 온몸에 땀을 흘리며, 큰 숨을 내쉬었다. 머리위의 붕대는 이미 찢어지고, 헝겁조각이 얼굴위에 걸렸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현장에서 한 작가가 일어섰다. 그리고, 비분강개하여 노사가 달러를 가져갔다고 비판했다. 노사는 아주 고집스러웠다. 두 눈을 똑바로뜨고 반박했다. "없다. 나는 달러를 가져간 적이 없다"

 

한 40여세된 여자도 소리쳤다: "나도 고발하겠다. 노사는 해방전에 <<낙타상자>>의 판권을 미국에 팔아넘겼다"

 

군중은 폭발했고, 여러 사람은 고함을 질렀다. 사실대로 말하라고 요구했다. 홍위병들은 그의 팔을 잡은 후 힘을 주고, 발길질을 했다. 노사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땅바닥에 쓰러졌다. 좌우에서 그를 붙잡던 홍위병은 또 그에게 발길질하고,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거의 땅바닥에 엎드린 노사의 얼굴은 창백하였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땀을 계속 흘렸다. 두 다리는 떨렸다. 그러나 온힘을 다하여 한마디 한마디 했다. "나는 매국한 적이 없다. 사실관계는 이렇다..."

 

홍위병은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뛰어올랐다. 그의 머리를 땅바닥에 눌렀다. 노사는 돌연 반항하기 시작했고, 완강하게 몸을 폈으며, 고개를 들었다. 심장과 폐를 다 찢어내는 것처럼 소리질렀다. "너희는 도대체 나보고 뭘 말하라는 거냐" 그는 맹렬히 몸을 돌려 목패를 깨버렸고, 금방 그를 누르고 때리던 여홍위병의 머리위로 내리쳤다.

 

이 거동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정신차리고 나서, 홍위병들은 그에게 다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단상아래의 사람들도 모두 뛰어올라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누가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탁자를 하나 가져왔고, 노사는 사람들 틈에서 끌어올려졌고, 탁자위에 무릎을 꿇게 하였다. 그의 안경은 부서졌고, 얼굴은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 온몸은 흙이었고, 와이셔츠는 한줄한줄 찢어졌다. 신발은 한짝만 남았고, 머리는 들 힘도 없었다. 홍위병은 기운도 남지 않은 노인에게 소리쳤다. "너는 홍위병을 때렸다. 죄를 아느냐"

 

노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머리를 힘없이 두번 끄덕였다.

 

"너의 죄행을 써라" 종이를 펼쳤다. 노사는 한참 있다가 붓을 들었다. 매 1글자를 쓸때마다 전신의 힘을 다하였다. 5분이 걸려 여덟글자를 썼다. "나는 홍위병을 때렸다. 노사" 쓰고나서 그의 눈은 멍청해보였고, 탁자위에 쓰러졌다.

 

이 때, 지프차가 한 때 다가왔다. 조반파들은 귓속말을 몇마디 하더니, 차를 단상아래로 몰았고, 노사를 집어넣었다. "현행반혁명범"을 연행하는 것같았다. 그를 부근의 한 사합원의 파출소로 보냈다. 그 곳에는 한 무리의 "흑방분자"들이 무릎꿇고 있었다. 노사는 밀어넣어졌고, 뒤따라온 소년들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무정한 채찍을 내리쳤다. 돌아가면서 때렸고, 깊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나중에 노사는 통지를 받은 처자에 의하여 집으로 데려가진다. 한 삼륜차에 태워져서 아침에야 왔다. 처자들은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핏덩어리는 모두 말라붙었다. 면사는 살속으로 들어가서 꺼집어내지지가 않았다. 면화에 뜨거운 물을 붓고서야 하나하나 부드러워져서 살짝 떼어낼 수 있었다. 처자들은 울지도 못했고, 있는 힘을 다해 말하면서 온몸을 떨었다. 그들은 오래 얘기했다. 그것은 생과 사의 긴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에게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떠나기 전에, 파출소에서 통지가 왔다. 아침 일찍 "현행반혁명범"의 패를 받아서, 북경시문련에 가서 등록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그를 사망의 길로 내모는, 절대 다시는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직접적인 결심의 이유가 아닐까

 

다음 날인 8월 24일, 그는 시간에 맞추어 출근한다. 집을 나서기 전에 세 살된 어린 손녀를 불러서, 몸을 숙여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해야지"

 

그는 갔다. 그러나 문련으로 가지 않았고, 실종되었다. 집안사람들은 초조해졌다. 장남 서을(舒乙)은 즉시 편지를 하나 썼고, 직접 국무원접대소로 달려갔다. 책임자는 그의 진술을 다 들은 후, 서신을 받고, 즉시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몇 시간후 전화가 왔는데, 상부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를 찾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했다.

 

8월 25일, 시문련의 전화통지를 받고, 서을이 가서 종이를 한장 받아왔다. 거기에는 "우리 협회의 서사여(舒舍予, 노사의 이름)는 인민앞에 자결하였음. 이에 증명함" 그리고 그에게 즉시 덕승문 서쪽 할구밖의 태평호로 가서 후사를 처리하라고 하였다.

 

노사의 시신은 아침에 호수가에서 단련하던 한 연예인이 발견했다. 호수위에서 호숫가에서 10여보도 떨어지지 않은 수면에, 한 사람의 뒷뇌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허둥지둥하면서 건져올렸다. 시신은 이미 차가웠고, 호숫가에는 상의제복, 안경, 지팡이, 볼펜이 놓여 있었고, 주머니에는 공작증이 있어 그의 이름과 직위가 적혀 있었다. 둘러싼 사람들은 놀랐고, 그에게 자리를 덮어주어, 태양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해주었다. 오전과 정오까지 여기는 인산인해였고, 그날로 소식은 북경성의 서북쪽에 퍼져갔다.

 

그가 이곳을 자살장소로 택한 것은 아마도 그의 모친을 찾아온 것이었다. 여러해 후에, 서을은 오래된 북경지도를 하나 구했는데, 옛북경성 서북각의 바깥은 태평호였는데, 대응하는 성안은 바로 관음암이었다. 바로 노사가 교수가 된 후, 모친을 위하여 거주지로 마련해준 곳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잃은 때, 그리고 그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그는 돌연 자기가 돌아갈 곳이 이곳이라고 생각한 것같다. 여기는 그의 모친이 있었다. 그의 모친은 생명과 성격을 그에게 전해준 유일한 사람이고, 이것은 아마도 가장 원만한 종결이었을 것이다"

 

공원에서 출입을 담당하는 직원의 말에 의하면 24일 이 노인은 하루종일 여기 앉아있었다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움직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손에는 종이를 하나 들고 있었다. 25일 아침, 호숫가에는 이 종이가 떠올랐다. 건져올려보니, 모택동시사였고, 아주 잘 썼고, 노사가 친필로 쓴 것이었다.

 

당연히 노사처럼 선비기질을 가진 사람은 욕을 보기보다는 자살을 택하였다. 그 전무후무한 기간(문혁기간)동안 이런 사람이 줄을 이었다: 등탁(鄧拓), 부뢰(傅雷), 오함(吳), 문첩(聞捷). 전백찬(伯贊), 해묵(海默)...

 

세계문학사상, 잭 런던, 가와바타 야스나리, 헤밍웨이등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살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의 이유로 연이어 자살하는 현상은 중외역사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 구체적인 부분을 얘기하자면, 노사의 처는 그를 마지막으로 보도록 허락받지 못했다. 그녀는 시신을 확인하도록 불려온 후, 도착했을 때, 호숫가에 한 시신이 있고, 돗자리에 덮여있는 것을 본다. 들어서 확인하려고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시신의 발만을 만지도록 허락받았다. 양말은 말라 있었고, 물에 젖지 않았다. 이후 시신은 팔보산으로 보내어져 서둘러 화장했다. 왜냐하면 "자살"이고 "반혁명"이므로 유골은 남기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화장장에서 일하는 사람에 의하면, 전국정협의 상임위원급인 인물이 이렇게 처리된 것은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 "인민예술가"는 최후로 "인민앞에 자결했다"는 죄명으로 그의 인생역정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한 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않았으며, 유골도 남기지 못했다. 10년간 계속되는 재난에서 제1차로 화를 입은 사람의 한명이었다. 이후 197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예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