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인
석인
녹석
아미나(阿米娜)는 유목민이다. 그녀의 집은 알타이산 자락의 광활한 평원에 있다. 그러나, 아미나의 가족들은 방목을 하지는 않고, 일년내내 산언덕에 있는 흑색의 거석을 지키고 있다.
검은 돌을 참관하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것이 아미나 전가족의 수입원으로 되었다. 그녀는 관광객들에게 이곳에는 한무더기의 철운석(鐵隕石)이 있다고 말하고, 관광객들을 위하여 쇠방망이를 하나 준비한다. 왜냐하면, 흑석(黑石)을 치면 듣기 좋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이것은 아마도 섬장암(閃長巖)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금속의 함량이 비교적 많은 돌이라는 것이고, 알타이산의 자연석이라는 것이다. 신강에서 40여년간 고고활동을 해온 전문가인 왕명철(王明哲)에 따르면, 흑석이 주의를 끄는 점은 그 돌 중에서 하나의 돌에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로 이 석인(石人)이 유라시아 대초원의 수천년간의 풍운변환을 말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미나의 집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에는 많은 곳에 흑석이 매장되어 있다. 그 중에 어떤 돌매이에는 보일듯, 말듯한 간략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알타이산을 따라 계속 북으로 전진하면, 카나스풍경지구에 아공개제(阿貢蓋提)라는 초원이 있다. 여기에는 십여개의 석인이 광야의 한가운데 서있다.
석인의 존재는 일찌감치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신강의 천산과 알타이산을 제외하고, 동쪽으로는 인접한 몽골공화국, 남시베리아초원, 및 중국의 내몽고의 일부지역,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지역을 지나 카스피해와 흑해연안까지 모두 석인(石人)이 존재한다. 그들은 국경의 구분이 없고, 북방초원의 독특한 풍경이 되었다.
현재 석인지구에 생활하는 민족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 위구르, 몽골등은 모두 석인을 세우는 습속이 없다. 그래서, 석인을 세운 족속은 고대민족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북방초원에 일찌기 생활했었던 귀방(鬼方), 새종(塞種), 흉노(匈奴), 회흘(回鶻), 몽고(蒙古)등의 유목민족이 있다. 이들 민족은 장기간 빈번하게 이주하며 전쟁하였다. 누가 이 초원에 세운 석인의 주인인가?
석인의 뒤에는 항상 묘장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하여, 한때는 전문가들이 먼저 묘혈에서 증거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석인과 묘장이 너무 적었다. 예를 들어 아공개제초원에 있는 석인은 모두 서로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었다. 설사 유사한 유적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문화재보호의 필요에 따라, 전문가들은 그저 응급구조적인 발굴만 할 수 있었고, 도굴되거나 파괴된 묘장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족의 장례풍속은 원래 매우 간단해서, 이렇게 파괴된 묘혈안에서 직접적인 증거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일시에 석인의 신분을 감정하는 문제는 큰 난제에 봉착한 것이다.
야외에서 고고학적인 증거를 찾는 동시에, 전문가들은 눈을 역사문서자료에 돌리기 시작했다. <<주서.돌궐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돌궐인들은 사후에 '묘소에 돌을 세워 표지로 삼았다(於墓所立石建標)". 전문가들은 이 한마디의 문구를 보배처럼 여겼다. 이것은 고대 돌궐인들이 묘소에 돌을 세우는 풍속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수서. 돌궐전>>에도 이런 기재가 있다. 돌궐인들은 무를 숭상하고 전투를 좋아했다. 죽은 후에는 죽은 자의 형태와 모습과 그가 살았을 때 거친 전투의 형태를 그렸다. 이런 문구를 연결시켜보면, 묘지에 세운 돌에 새긴 것은 바로 묘의 주인의 모습이라고 추단할 수 있을 것인가? 20세기중엽, 몽골공화국에서 일련의 석인이 서 있는 고대의 묘를 발굴한 적이 있고, 묘안에서 출토된 비문에는 명확하게 이것이 돌궐귀족의 묘장임을 밝힌 바 있다.
알타이시의 문화재관리소에는 몇 개의 석상이 있고, 이것은 비교적 전형적인 돌궐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오른 손은 잔을 들고, 왼손은 검을 들었다. 왕명철은 이런 무사형 석인은 바로 돌궐석인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한다. 석인이 검을 쥐고 있는 것은 아마도 돌궐인들의 상무(尙武)의 풍속을 말해주는 것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잔을 들고 있는 것은 아마도 권력의 상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명철은 각화석인(刻畵石人)의 의미에 대하여, 대체로 통령(通靈)의 작용을 했을 것으로 믿는다. 즉,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석인에 붙어서, 석인만 쓰러지지 않으면, 그의 영혼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무사형 석인은 돌궐인들의 일부 생활습성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발견된 석인은 이런 유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미나의 집 주위에 있는 흑석석인상은 재료를 아주 특수하게 골랐고, 조각도 원래 무사가 아니다. 마치 훨씬 더 오래된 고대에서 온 것같다.
1960년대에 고고학자들은 이 묘지를 주의하기 시작했다. 조사가 깊이 진행될 수록, 그들은 평원깊은 곳에 고묘장군(古墓葬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묘장군의 근거지는 지명을 따서 "절목이절극(切木爾切克)묘장군"이라고 불렀다. 전형적인 한 곳의 묘장의 앞에는 5개의 석인이 묘의 동쪽에 서 있다. 모두 흑색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지방에서는 진흙이 묻어서 누런 색을 띄고 있다. 석인의 얼굴윤곽과 눈은 모두 원형을 나타낸다. 뺨에는 삼각형의 장식무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여성 석인이다.
전문가들은 모두 30여개의 묘장을 발굴했다. 출토된 문물중에는 도관(陶罐)이 있어 주의를 끌었다. 이 도관은 감람형(橄欖形)을 하고 있고, 위에는 물결모양의 호선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연구를 거쳐, 그들은 이 도관이 일종의 카라수크문화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했는데, 카라수크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1000년경의 것이다. 그런데, 돌궐인은 수,당시대에 살았으므로 그들과는 최소한 천여년의 차이가 난다. 흑석석인은 당연히 돌궐인의 유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3천여년전에 누가 흑석위에 자기의 모습을 남겼단 말인가?
중국의 오래된 서적인 <<장자.소요유>>를 보면 북극지방에 "궁발국(窮髮國)"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고대그리스역사학자인 헤로도투스가 그의 저작 <<역사>>에서 알타이산아래에는 일종의 "독두인(禿頭人, 대머리 사람)"이 있다고 한다. "독두"는 "궁발"과 아마도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즉, 머리카락을 남기지 않는 습속을 지니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둘은 의미가 같고, 이상하게 들어맞는다.
이 흑석석인의 전형적인 특색은 바로 원형의 머리위에 아무런 머리장식도 없다는 점이다. 헤로도투스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두인들은 사자코와 거대한 아랫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몽고인종의 얼굴형은 바로 이 석인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아주 재미있는 점은 헤로도투스가 말한 독두인은 산에서 황금을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알타이산은 원래 자고이래로 황금광으로 유명하다. 학술계에서 말한 초원의 실크로드는 4천년이전부터 존재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거래한 것은 비단일리가 없는 것이다. 일부 생활용품을 제외하고는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이 황금이다. 그래서 초원실크로드는 황금의 길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당연히, 중국과 외국의 고대서적에서는 신강의 청동기시대에 거주한 주민에 대한 칭호가 각양각핵이다. 신강의 초기석인을 모두 소위 "독두인"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것은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닌가?
서방의 사료중에는 일찌기 유라시아초원의 유목민족중에 "스키타이"라고 부르는 족속이 있다. 중국의 일부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중국의 선진사료에 나타나는 새인(塞人)이라고 본다. 그들은 알타이산, 천산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렇다면, 새인과 독두인은 어떤 관계일까?
신강의 호도벽현의 천산 깊은 곳에는 강가석문자(康家石門子)라고 부르는 지방이 있다. 석문자의 애벽(崖壁)에는 면적이 100여평방미터에 달하는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고증에 의하면 이것은 세계에서 드물게 보는 생식숭배의 암각화이고, 그 창작자는 바로 3천여년전에 이 곳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새인이라는 것이다.
암각화의 인물은 모두 몸이 길고, 코가 높고, 눈이 깊다. 이것은 유럽인종의 특징이며, 이것은 마치 새인과 독두인이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은 초기석인의 몸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포이진현의 문화재관리소에는 두 개의 독특한 소형석인을 보관하고 있다. 그들은 3천년전의 고묘장안에 배장품으로 있던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담황색의 석인으로 코가 높고, 눈이 깊다. 강가석문자의 암각화에 있는 인종과 매우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것을 고대 새인의 유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실 묘지석인이건 부장석인이건간에 모두 영혼보호의 의미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근원은 바로 돌맹이 자체에 대한 숭배이고, 돌맹이에는 통령(영혼과 통하는)의 작용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석인의 뒤에 있는 묘장도 돌로 쌓아서 만든다.
이런 석축의 주위에는 반쯤 숨고 반쯤 드러나는 흩어져 있는 돌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석축과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둥근 원과 석촉은 방사성 모양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구성하는 도형은 높은 곳에 올라가야 비로소 자세히 볼 수 있다.
하나의 견해는 이렇다. 석인을 세운 묘장은 죽은자의 분묘일 뿐아니라, 아마도 부락의 제사장소일 것이다. 제사에 사용되던 신물도 묘장주위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어떤 묘지에는 아마도 석인과 나란히 혹은 단독으로 있던 기이한 돌기둥(石柱)이 있기도 한다. 지금은 보호의 필요에 의하여, 그들은 대부분 박물관에서 수장하고 있다. 석주에는 기보넉으로 모두 사슴형(鹿形)의 도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녹석(鹿石)이라고 부른다.
녹석의 위에는 사슴무리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더욱 기이한 것은 모든 사슴의 입은 가늘고 길게 새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슴몸에 새입은 연혼에게 날개를 날아주는 역할을 한다.
학술계에서는 비록 녹석과 석인이 병존하는 시대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말하면, 녹석은 석인보다 먼저 출현했고, 아마도 석인의 전신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는 비전형적인 녹석이다. 석주에는 그냥 추상적인 부호만 있고, 이 부호는 세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위에는 세줄의 사선이 그어져 있고, 중간에는 조그만 원이 있고, 아래는 검이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선은 오관 또는 사람의 얼굴을 상징하고, 작은 원은 목위의 목걸이를 상징하며, 검은 하반신을 상징한다고. 이 세부분은 바로 추상화된 인체를 표현한다고.
석인의 통령작용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최초에 출현한 연대는 기원전1천년경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문제는 바로 석인은 언제 사라졌느냐는 것이다. 돌궐석인이 바로 최후의 것은 아닐까?
학술계에서 비교적 일치하는 견해는 돌궐석인이후, 석인문화는 확실히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어서 이슬람교가 초원에 급속이 전파되었고, 석인은 철저히 소멸되었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우상숭배가 없고, 사람모습을 새기는 것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하한은 대체로 기원후11세기 경이다.
석인이 존재하던 상하2천년간, 초원의 민족간에는 빈번하게 전쟁, 이주와 융합이 있었다. 그래서 석인연구는 상당히 많은 문제를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초원에 서 있는 석인은 하나의 풍경이 되었고, 신비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신강박물관의 젊은 연구원인 장휘(張暉)는 대담한 주장을 펼쳐서 눈길을 끈다. 그는 석인과 그와 관련된 유적은 바로 고대인의 외계문명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장휘는 머리와 목에 장식을 한 석인을 새긴 것은 바로 그들이 우주모와 우주복을 입은 외계인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석묘에 대하여도 그는 대량의 통계분석을 통하여,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았을 때 석묘의 형상은 전설중의 외계인의 유적 즉 Crop Circle(보리밭의 둥근원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녹석에 대하여 장휘는 이것은 바로 외계비행선이 지구동물을 학살하는 장면을 그렸다는 것이다. 외계인의 비행선이 지구에 왔을 때 거대한 흡인력을 가지고 지구상의 동물을 하늘로 빨아들였다고 한다. 녹석의 사슴무리는 위로 올라가고 있고, 입이 거대하게 끌려가는 것처럼 길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휘의 견해가 제기되자, 학술계는 놀라움에 빠졌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어쨌든 도시에서 피곤해져서 초원을 찾아온 관광객이라면, 석인의 흔적을 찾을 때, 역사적인 고증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석인이 과거에 고대선주민의 영혼의 수호신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현대인의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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