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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호종남(胡宗南)의 결혼이야기

by 중은우시 2006. 12. 19.

호종남의 군대생애를 살펴보면, 전기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그가 장군에 이르기까지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줄 때마다. 그는 "국난이 닥쳤는데, 어찌 집안일을 우선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이 일은 자주 장개석이 모범으로 칭찬했는데, 사실, 호종남에게는 당시에 말못할 고충이 있었다.

 

공상희(孔祥熙), 송애령(宋靄齡) 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공령위(孔令偉)였으며, 둘째여서 사람들이 "공이소저(孔二小姐)"라고 불렀다. 그녀는 송미령의 총애을 받았고, 장개석/송미령의 양녀가 되었다. 송미령이 평생 자식을 두지 못했고, 장개석도 딸을 두지 못했으므로, 공이소저는 자주 스스로를 "황제의 딸"이라고 자칭했다. 가족의 혁혁한 지위에다가 그녀가 어려서부터 버릇없이 자란 탓에 그녀는 성격이 변화무쌍했고, 아무도 다룰 수 없었으며 세상을 그저 즐기며 살 뿐이었다. 보통의 관료자제는 아예 마음에 두지 않았으므로,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혼사는 오랫동안 미뤄지고 있었다.

 

하루는, 국민당 중앙상위, 조직부장인 진입부(陳立夫)가 서안으로 왔다. 호종남은 연회를 열고 잘 대접했다. 술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진입부는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호종남의 귀에 슬쩍 얘기했다. "공원장에게는 둘째 딸이 있는데, 이름이 공령위이고, 미국에 유학하였으며, 중경성내의 첫째 둘째가는 명문규수이다. 장선생과 부인이 당신을 아주 중시하고 있고, 내가 이 혼인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수산형의 뜻은 어떠한지?"

 

공원장은 바로 공상희이고, 당시 국민당정부의 행정원장 겸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다. 호종남은 마음 속으로 공이소저와 결혼한다면, 장, 송, 공씨집안과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렇다면 "서북왕(西北王)"의 정치, 군사적인 지위는 더욱 공고하게 될 것이고, 중앙최고층으로 올라가고 당과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래서 호종남은 공이소저와 만나겠다고 응락했다.

 

그러나, 총명했던 호종남은 '중매장이'인 진입부 한 사람의 말만 듣지는 않았고, 그는 몰래 중경의 대립(戴笠)에게 공이소저에 대한 사항을 알아보았다. 대립은 호종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공이소저는 성격이 오만하고 행동이 마음대로이며, 평소에도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고, 자주 서양 개를 하나 끌고, 시내를 활보한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 수산형, 공이소저와 결혼한다면, '녹색모자(처가 외간남자와 바람난 경우를 가리킴)'를 쓸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오' 호종남은 이 말을 듣고 아주 기분이 나빠졌다.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서 전구사령관으로서 어찌 미래의 부인이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공이소저는 호종남에 대하여 그가 키가 작다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호종남의 계급과 권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중경에서 서안으로 그를 만나러 날아갔다. 그리고 사령관부인이 되고 싶었다. 심계가 깊은 호종남은 공이소저가 이미 서안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변장을 하고 몰래 공이소저의 거처로 갔다. 안봤으면 모르지만, 한번 보고는 호종남은 영 역겨워했다. 이 공이소저가 단발에 서양옷을 입었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고, 생긴 것도 별로여서 도저히 그냥 참고볼 수 없었고, 인상이 요조숙녀라기 보다는 시정의 잡배처럼 느껴졌다.

 

호종남은 거처로 돌아온 후 부관에게 지시했다. "빨리 가라. 공이소저가 사람을 보내서 나를 찾으면, 내가 군무가 바쁘고, 전방에 일이 있어 임시로 출장갔다고 전해라" 공이소저는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아니라 미래의 백마탄 왕자님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우울하게 중경으로 되돌아 갔다. 그 후, 호종남은 진입부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공이소저는 명문의 규수이므로, 제가 감히 넘볼 수 없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대립의 수하에 섭하적(葉霞翟)이라고 부르는 여간첩이 있었다. 그녀는 청순하고 귀엽게 생겼으며, 국색천향이라고 할만했다. 그녀의 직무는 대립의 기요비서였으며 "정부"를 겸하고 있었다. 매번 호종남이 대립을 방문할 때, 대립은 섭하적으로 하여금 시중들게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호종남의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나중에 대립은 공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섭하적으로 하여금 호종남을 단독으로 접대하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호종남은 사랑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다. 대립은 호종남이 이미 미끼를 문 것으로 보고, 돌연 섭하적을 미국으로 유학보냈다. 섭여사는 미국유학을 떠난 후에도 호종남과 빈번하게 서신연락을 취했고, 서로 사랑한다고 밝혔으며, 사랑이 이어졌다. 이후 섭여사는 미국에 7년을 머무르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에야 귀국했다.

 

섭하적이 귀국한후에, 항전이 한창일 때였으므로, 호종남은 결혼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길게 낚시줄을 늘어뜨렸던 낚시꾼 대립은 1946년 3월 17일에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1947년초, 장개석은 실패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하여 국민대회개최, 연안타격의 두 가지 조치를 취한다. 3월 19일, 공을 세우기 좋아하는 호종남은 연안을 점령한다. 장개석은 그 소식을 들은 후, "하도훈장"을 호종남에게 수여하고, 그를 중장에서 이급상장으로 승진시킨다. 호종남은 스스로 공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 장개석에게 결혼하겠다고 청한다. 장개석은 즉시 승락하고, 후한 예물을 보낸다. 52세의 호종남은 두번째로 신랑이 되었다. 신부 섭하적은 이미 30여세였지만, 아름다운 풍모는 여전했다.

 

1949년, 장개석은 대륙에서 패하였다. 호종남도 결국 수십만 형제를 포기한 채 대만으로 도망치다. 1062년 2월, 67세의 호종남은 사망한다. 그와 부인 섭여사는 십여년간 조용하면서도 낙막한 생활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