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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 종실 : 인구역사상의 기적

by 중은우시 2007. 1. 9.

명나라 종실(즉,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후손)의 규모는 가장 컸고,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예를 들어, 주원장은 26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그 중 24명의 아들이 후손을 두었다. 명인종 주고치는 10명의 아들을 낳았고, 명영종 주기진은 9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헌종 주견심은 14명의 아들을 낳았다. 명세종, 명신종도 각각 8명의 아들을 낳았다. 진왕부의 경성왕 주제현은 100여명의 아들을 낳아 종실중 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고, 형제간에도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서광계는 명나라 종실인구에 대하여 연구를 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원장의 시기(1382년경)에는 친왕군왕이하의 남녀가 58명에 불과하였는데, 영락(1412년)에 이르러 직위를 받은 자가 127명에 달하였다. 즉, 30년에 두 배로 는 것이다. 융경초(1567년)에 호적에 들어 있는자는 45000이었는데, 실제 남아 있는 자는 28000이었다. 만력갑오(1594년)에 호적에 들어있는 자는 10만3천이었는데,남아 있는 자는 6만2천이었다. 즉, 30년에 배로 늘어난 것이다. 갑신(1604년)에 호적에 들어있는 자는 13만이었는데, 남아 있는 자가 8만이상이었으니, 10년에 다시 1/3이 늘어난 것이다. 즉, 30년이면 다시 2배가 된다.

 

연구자에 따라 숫자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명조실록에 의하면, 만력23년에 157000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크로포드가 쓴 글에 따르면 1594년에 황실종친을 약 16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약2백년의 기간을 거치면서 주원장은 자신의 후손이 16만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뿐아니라, 주원장은 종실을 대거 친왕에 봉했다. 주원장의 자손들중에서 황제에 오른 자는 모두 17명(남명황제는 포함하지 않음), 친왕에 봉해진 자가 83명, 장공주(명나라 제도에 따르면 황제의 고모는 대장공주, 황제의 자매는 장공주, 황녀는 공주로 불렀다. 친왕의 딸은 군주, 군왕의 딸은 군군, 증손녀는 현군, 현손녀는 현군이라고 불렀다)가 80여명이다. 군왕에 봉해진 사람은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도 없다. 하남지구에만 친왕 5명, 군왕 80명, 장군, 중위, 군주, 현주, 현군이 모두 1890명이 있어 가장 많았다.

 

초기에는 번왕에게 내린 토지가 많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선종은 조왕에게 토지 80경(8000무, 1무는 약667평방미터, 200평, 1경은 2만평)이었다. 나중에 성화이후에는 매번 하사하는 토지가 수천경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덕왕에게 한번에 4100경을 내렸다.

 

만력제때는 노왕에게 장전 4만경을 내리고, 신종도 복왕에게 장전 4만경을 내렸다. 나중에 여러 신하들이 간하자 2만경으로 낮추었다.

 

천계제때는 계왕, 혜왕, 서왕의 장전이 모두 3만경이었다.

 

산서성의 좋은 전답은 모두 종실이 가졌다. 하남에는 72왕자가 있어서, 토지의 절반이 왕부에 속했다. 종실훈척들의 장전면적은 천계연간에 불완전한 통계이기는 하지만 약 50만경에 이르렀다.

 

종실인구의 식록(食祿)도 만만치 않았다. 종실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명나라 사회경제에 아주 큰 곤란을 끼쳤다. 가정23년에 전국의 세금수입은 22,850,595석이었다. 종실에 내리는 녹미만 그 중 1/3이상이었다. 개별 성으로 따지면 그 역조는 더욱 심하다. 산서성에는 세금으로 남기는 것이 152만석인데, 종실에 주는 녹미가 312만석이고, 하남성은 성에 남기는 것이 84만석인데, 종실녹미가 192만석이었다. 두 개의 성은 종실에 주는 것도 모자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