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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종합)

중국의 사대서원(四大書院)

by 중은우시 2007. 3. 22.

 

서원은 당송명청에 출현한 일종의 독립적인 교육기구이다. 사인이나 관부에서 설치하여 학생을 모아 강의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장소이다. 서원과 장서각은 천백년전의 최고학부와 도서관이었다. 이곳은 유명학자들이 경전을 강의하고 도를 논하던 장소이며, 문인학사들이 그리워하돈 곳이었다.

 

중국에는 송나라때의 유명한 사대서원이 있다.

 

강서여산의 백록동서원

호남선화의 악록서원

하남등봉의 숭양서원

하남상구의 응천서원

 

첫째, 악록서원(岳麓書院)

 

 

 

악록산에 맑은 물과 무성한 수풀 속에 하나의 천년정원이 있다. 대문에는 대련이 걸려 있는데 "유초유재, 우사위성(惟楚有才, 于斯爲盛)"이라고 쓰여 있다. 이 곳은 북송 개보9년, 담주태수 주동이 승려들이 공부하던 곳에 창립한 악록서원이다.

 

이곳은 호남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이다. 외지인이라면 그들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에도 하지만, 역사자료를 뒤적여보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청나라때만 보더라도 서원에서는 17만명의 학생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는 도주, 위원, 증국번, 좌종당, 곽숭도, 당재상, 심진, 양창재, 정잠등 걸출한 인재들이 나왔다.

 

둘째,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당나라 정원연간 낙양사람 이발과 그의 형인 이섭은 이곳에 은거하여 책을 읽었고, 흰사슴(백록)을 기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 사슴은 아주 총명하여 항상 좌우를 따라 다녔고, 수십리 떨어진 성자현성에 가서 주인이 사려고 하는 서, 지, 필, 묵등을 필요한 만큼 사가지고 왔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이발을 백록선생이라고 불렀고, 거주지를 백록동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이발은 강주자사를 하였다. 남당에 이르러 이 곳에 학교를 세우니 "여산국학(廬山國學)"이라고 하였으니, 백록동서원의 전신이다.

 

백록동서원이 가장 흥성했을 때는 360여간의 건축이 있었다. 지금은 예성전, 어서각, 주자사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셋째, 숭양서원(嵩陽書院)

 

 

 

숭양서원의 원래 이름은 숭양사이다. 하남성 등봉시에서 북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숭산의 남록에 있으며 준극봉을 등에 지고, 쌍계하를 마주하고 있다. 숭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숭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숭양서원은 역사적으로 이학(理學)으로 유명했다. 북송의 유교 낙파의 대가인 정호, 정이가 이곳에서 강의하여, 서원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북송의 유명한 유학자인 사마광, 범중엄, 한유, 이광, 주희, 여회등이 모두 이 곳에서 강의한 바 있다. 숭양서원은 유학의 중요한 전파성지였다.

 

숭양서원은 주체건물외에 주위의 여러개의 개별건축군이 모여서 이루어졌다. 지리분포도 매우 넓다. 크게 보면 숭양서원건축외에 비교적 유명한 것으로는 숭양서원 동북 소요곡 반석계의 천광운영정, 관란정, 천상정과 태실산 호두봉 서록의 숭양서원별서인 군자정, 서원서북쪽 옥주봉아래 칠성령 삼공석 남쪽의 인지정등의 건축이 있다.

 

넷째, 응천서원(應天書院)

 

 

 

응천서원의 전신은 후진의 양각이 연 사학이다. 북송정권은 과거를 통하여 선비를 뽑았는데, 응천서원은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백여명의 학자들 중 과거에 급제한 자가 5,60명에 달하였다. 1009년, 북송의 진종은 정식으로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응천부서원"이라고 하였다. 송인종때인 1043년에는 응천서원은 남경국자감으로 변경되어, 북숭의 최고학부의 하나가 된다. 나중에 이 서원은 다시 유명한 문학가인 안수등의 지원하에, 확장하게 된다. 저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인 범중엄등 명인명사들이 이 곳에서 강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