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산동성의 임성(臨城)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열차강도사건이 발생하였다. 토비(土匪) 손미요(孫美瑤)가 지휘하는 “산동건국자치군”의 1000여명은 열차에 타고 있던 중국인과 외국인 근 100명을 인질로 잡고 당시의 북경정부와 37일간을 대치하였다.
손씨형제는 나중에 원래의 몇 갈래의 토비들과 합쳐서 3000여명에 이르렀다.
1922년 7월,
열차안에는 산동 황하 궁가패제방의 낙성식에 참석하려는 여러명의 중국과 외국의 기자들과 외국여행객이 있었다. 1등침대차에 타고 있던 한 영국인이 반항을 기도하여 토비들이 현장에서 사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의 승객 39명과 중국여객 30명을 인질로 잡았다. 인질로 잡한 외국인들중에는 유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두 명의 미국육군중령과 미국 <<The China Weekly Review>>의 고급기자인 파월, 미국석유왕 록펠러의 며느리 루시 올드리치도 있었다. 루시 올드리치의 부친은 미국상원의원이었다.
소식이 전해진 후, 북경, 상해, 제남등지의 각 신문은 모두 이 소식을 크게 전했다. 일시간에 여론이 분분했고, 국내외가 모두 놀랐다. 각국 공사들은 자기들 교민의 생명을 걱정해서 무력을 사용하는데 극력 반대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여원홍 총통에게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핍박했다. 5월 7일, 8일에는 영, 미, 프, 이, 벨기에의 오개국 공사가 북경정부에 엄중히 항의했고, 미국국방장관 테비스는 공공연히 국무장관에게 중국에 파병할 것을 요청했다. 일본은 비록 교민이 인질로 잡히지는 않았지만, 일본신문도 국제연합군을 파견하여 중국철로를 공동관리할 것을 고취하였다.
5월 9일, 5개국 공사는 북경정부에 3일내에 모든 외국인인질을 구출해내라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매24시간마다 배상금액을 증가시키겠다고 하였다. 북경정부는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외국인인질을 구출하는데 집중했다.
붙잡힌 중국외국인질은 모두 토비에 의하여 독고산에 압송되었다. 손미요는 인질로 잡는데 성공한 후 손계지의 아이디어에 따라, 먼저 4명의 외국승객을 석방했고, 그녀들을 통하여 정부에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신속히 포위한 관병을 10마일 바깥으로 철수시킬 것, 둘째, 토비들을 정규군 1개여단으로 받아들여주고 손미요를 여단장으로 삼을 것, 셋째, 무기를 보충해줄 것. 파월 기자는 서신을 써서 정부군에게 산을 공격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부탁했다. 여기에는 모든 외국인 인질이 서명했다.
북경정부와 토비는 5월 15일에 정식 담판을 시작했다. 담판지점은 중흥탄광회사였다. 정부대표는 산동독군인 전중옥(田中玉)과 산동성장 웅병기(熊炳琦)였다. 토비측의 대표는 주천송(周天松)이었다. 토비측이 제출한 몇 개의 조건은 정부측이 모두 받아들였다. 담판이 성공한 후, 교통총장 오육린은 스스로 산으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하였고, 외국인질은 그와 교환으로 먼저 석방해달라고 하였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여원홍은 즉시 전보를 보내 치하하였다. 사실 오육린이 조장에 온 것은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꽃차”에 앉아서 카드놀이를 했고, 근본적으로 담판에 대하여 묻지도 않았다. 그저 중요한 순간에 나서서 일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그는 북경으로부터 “교환인질을 하지 말라”는 전보를 받은 후에 ‘영예를 가득 안고’ 북경으로 귀환했다.
5월 16일, 산동독군 전중옥은 정부군에게 포위를 풀고 철수하라고 명을 내렸고, 손미요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런데 손미요는 마음을 바꾸어 정부측 대표의 면전에서 위임장을 찢어버렸다. 손미요의 변심은 정부측이 더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더욱 가혹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담판은 합의에 이르기 힘들어졌다.
정부가 외국인질을 빼앗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5월 20일, 토비측은 3명의 외국인질을 산속의 동굴로 옮겼다. 쌍방이 대치하는 기간동안 임성으로 오는 외부인사는 갈수록 많아졌다. 대량의 국내외기자들이 작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상해총상회의 구조대, 미국적십자회등도 임성으로 왔다. 그들은 산위의 인질들에게 먹을 것과 약품을 전달하는 것을 허용받았다. 조건은 인질에게 주는 것은 토비에게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국인질들은 언론과 통신의 자유는 보장받았다. 파월 기자는 먼저 ‘비굴통신’을 발표하였고, 인질생활과 산중풍경을 묘사했다.
5월 25일, 토비측은 파월로 하여금 하산하여 정부측에 새 조건을 제시하도록 하고, 24시간내에 돌아오겠다고 맹세시켰다. 그러면서 토비측은 두 사람을 딸려보냈다. 정부는 토비측의 요구를 거절했고, 파월은 맹세한데로, 토비굴로 돌아갔다. 다음 날, 전중옥은 북경에서 조장으로 돌아왔고, 정부군에게 포위를 강화하도록 지시했고, 비행기를 보내어 산을 돌며 전단을 뿌렸다. 비적들은 놀라고 당황했다. 외국인질들에게 서신을 써서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요청하도록 하는 외에 파월을 다시 내려보내어 두 개의 비교적 양보된 조건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이 두 개의 조건은 정부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할 것과 여단으로 받아들여줄 것에 한하였다. 정부측도 두 개의 조건을 역제시 하였다. 먼저 서양인질 2/3를 석방할 것, 토비들 중 총을 지닌 자에 한하여 정부군으로 받아준다는 것등이었다.
5월 31일, 토비측은 산에 있던 3명의 외국인 인질을 하산시킨다.
토비측과 관방측은 서로를 믿지 못하였다. 미국인 앤더슨은 쌍방이 보증서를 제공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앤더슨은 토비를 정규군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토비의 과거 일체의 죄행을 사면할 것을 보증하고, 손계지는 토비측이 정규군이 된 후 군기를 준수하고 국가에 충성할 거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심계가 깊은 손계지는 이런 종이상의 글자를 믿지는 않았고, 인질 석방을 계속 미루었다. 그래서 서해진수사인 진조원이 강소교섭원
6월 2일, 손미요는 진조원을 따라 하산했고, 정사기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2일, 마지막 남은 8명의 외국인질이 모두 석방되어, 13일 상해로 돌아갔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기차인질사건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37일이 걸렸다.
토비들은 6월 27일 정식으로 산동의 제11여단으로 개편되었다. 손미요는 여단장이 되고, 손계지는 여단의 군수장이 되었다. 북양정부는 이 심복대환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하였다. 조곤이 군정대권을 빼앗은 후 그 해 12월 19일, 연주진수사
그러나, 손계지는 여전히 도망쳤다. 그는 약간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노남산지역에서 여러해를 더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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