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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진석련(陳錫聯) : 모택동 말년의 4 총신(寵臣)

by 중은우시 2006. 12. 18.

 

 

진석련 사람은 당내에서 계속 쌍면호(雙面狐)” 불리운다. 측면으로는 그가 전쟁시대때 보인 모습과 건국후기의 모습이고, 다른 측면으로는 사람에 대하여는 이렇고, 사람에 대하여는 저렇다는 점이다. 사람됨이 매우 매끄러웠고, 심지어 교활하다고까지 있을 정도이다.

 

진석련이 군대에 들어간 이후 가장 뛰어난 전적을 보인 것은 양명보에 대한 야습전투였다. 일거에 일본군 비행기 24대를 파괴하고, 국공양당의 풍운인물로 등장하였다. 그의 나이 22세때이다. 공산당이 태행산에 근거지를 창건할 , 진석련은 공이 매우 컸다고 있다. 그래서 나이 31세인 진석련은 해방군의 가장 젊은 종대사령원이 되고, 중원을 치고들어가는 중임을 맡는다. 진석련은 전투를 지휘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였고, 인간관계를 처리하는데 조심하였다. 군대의 명장중에는 성격이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매우 불같아서 한마디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욕을 해댔다.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진석련등 일부 사람만 그렇지 않았다. 진석련은 상급지휘관의 배치를 받을 , 전투국면에 관련되는 사항이 아니면, 거의 의견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백승이나 등소평 같은 상급지휘관이나, 두의덕과 같은 동급 장군들도 진석련에 대하여 매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1959, 진석련은 심양군구사령관 군구당위 2서기로 간다. 다음 송임궁(宋任窮) 대행정구를 회복한 후에 동북국 1서기 심양군구 1정위, 당위 1서기가 된다. 송임궁은 정공간부출신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군에서의 공적은 없다. 전공을 매우 중시하던 시기에 이것은 아주 결함이었다. 그러나, 진석련은 같은 상장 계급인 송임궁에게 아주 대하였고, 그는 송임궁의 2기부의 업무에 대하여도 매우 높은 평가를 해주었다. 점을 송임궁도 아주 좋게 그를 보는 요소였다. 811중전회에서 송임궁이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자, 그는 진석련을 그의 뒤를 이어 군대업무를 하도록 추천해주었다. 그러나, 좋은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송임궁이 금방 타도되었고, 진석련은 전혀 연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석련은 이미 황영승 사부치의 라인을 탔기 때문이다.

 

1966 이후, 진석련의 관운은 형통했다. 동북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것이다. 심양부대의 1인자이면서 요녕혁명위원회 주임 군관회 주임 성위 1서기가 되었다. 기간동안 그는 모원신을 발견했다. 상장의 계급에 있으면서도 젊은이를 모시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진석련의 이런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비열하게 비칠 있지만, 그는 이로써 많은 덕을 보게 된다. 그는 모원신의 새로운 요녕업무를 새로운 요심전투라고까지 치켜세우자, 황영승, 오법헌 등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모택동과 강청등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사부치와는 장기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로써 진석련의 이름이 하늘(모택동)에게 까지 알려진다. 그가 모원신을 보호하는데 주력한 것이 그의 이후의 정치생활의 보장이 되었다는 것을 있다.

 

임표를 해결한 , 진석련은 금방 사부치가 맡았던 북경군구사령관이 된다. 이전에 비록 새로 설립된 군위판공회 10명의 구성원중에 진석련이 없었지만, 모택동은 그를 잊지 않았다. 10차전당대회에서 진석련은 모택동의 지명을 받아 정치국위원의 후보자가 된다. 조금 , 군사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어 국방공업을 주재한다. 4기인민대표대회이후 진석련은 다시 부총리가 되고, 당년의 사부치가 가졌던 모든 것들은 진석련이 갖게 된다.

 

등소평이 다시 나와 군사위원회 업무를 주재한 이후, 진석련은 사인방이 없는 상황에서 여러 차례 등소평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그는 다시 등소평 정치위원의 아래에서 일을 하게 것은 아주 유쾌한 일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모주석, 주총리의 영명한 결단이라고 치켜세웠다. 명백히 진석련의 행동은 등소평을 감동시켰다. 적어도 진석련은 왕력처럼 소인득지(小人得志)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석련은 모택동이 주은래, 섭검영, 등소평, 이선념이 국무원, 군사위원회를 운영하는데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이후에는 진석련은 즉시 총리의 인식착오와 이선념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오에 끼어버린다.

 

1976년후, 모택동은 섭검영을 배제하고 진석련으로 하여금 군사위원회의 일상업무를 주재하도록 한다. 진석련은 군사위원회에서 가장 뜨는 인물이 것이다. 그러나, 쌍면호인 진석련은 이로써 섭검영의 미움을 받게 된다. 모택동이 죽은 얼마되지 않아서, 섭검영은 중앙의 문건이 아직 취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외빈을 회견하면서 자신이 여전히 군대를 주관한다고 말한다. 군사위원회 판공청이 문건의 규격에 대하여 물어보자, 진석련은 고소를 지으며, “섭원수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겠다 말한다. 1973년이후, 진석련은 모택동의 뜻을 받들어, 북경군구, 북경위수구를 정돈하고, 원래의 인원을 정리한다. 정유산, 섭영진의 이중세력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로써 섭영진에게도 미움을 받는다. 그래서 나중에 진선련의 서산사건 발생하는 것이다. 섭검영등의 압력아래 진석련은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그는 화국봉에게 모든 것을 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이 결국 밝혀진다.

 

1978년후, 진석련은 휴직을 청하며 스스로 비판한다. 1979, 각각 심양군구, 북경군구, 북경위수구, 포병총부에서 진석련에게 이견을 제시한다. 진석련은 비판을 받으면서 매우 침통해하였다고 한다. 당시 북경군구의 부사령관 부숭벽 장군과 심양군구의 사령관 이덕생만이 회의상에서 진석련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의 결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전공이 뛰어났고, 사인방의 배를 타지 않았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게 연유는 양여부사건이후, 부숭벽이 심양군구에 좌천되어 있을 , 진석련은 부숭벽을 도와주었고, 이덕생이 하야해있을 진석련이 그를 돌봐 주었기 때문이다.

 

송임궁이 다시 나온 , 중앙정치국위원을 맡고, 서기처 서기, 중앙조직부 부장을 맡았다. 진석련은 다시 그의 문하로 들어간다. 그래서 송임궁의 계속되는 보살핌 속에서 진석련은 등소평등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 1982년과 1987 두번에 걸쳐 중앙고문위원회 상임위원이 되고, 계속 정치국위원의 대우를 받게 된다. 특히 섭검영이 사망한 , 진석련이 얼굴을 드러낼 기회는 더욱 많아졌다. 특히 군사위원회 주요지도자들이 그의 전반생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동흥, 기등규, 오덕, 진석련의 4명의 소집단에서 전혀 없는 유일한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