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수호전

무송(武松)은 어느 지방 사람인가?

by 중은우시 2007. 3. 11.

글: 오월(吳越)

 

많은 산동(山東) 친구들은 모두 무송이 그들과 동향이라고 얘기하고, 산동사람들은 산동에서 무송과 같은 영웅호걸이 나온 것을 자랑한다.

 

그렇다면, 무송은 당연히 산동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마디만 물어보자. 무송은 산동의 어느 현(縣) 사람인가? 아마도 산동친구들은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수호전>> 제22회에서 이미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송강(宋江)이 염파석(閻婆惜)을 죽이고, 형제 송청(宋淸)과 두 사람이 창주 시진(柴進)의 장(莊)으로 도망치다가 무송을 만난다.

 

송강은 그 사나이를 부축하며 물었다. "귀하는 누구이신지, 존성대명은?" 시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 이 사람은 청하현(淸河縣) 사림이며, 성은 무(武)이고 이름은 송(松)이다. 이미 여기에 온지 1년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다시 나온다. 청하현이 산동성에 속하는가?

 

지도를 뒤적여보면, 산동과 하북의 경계선은, 덕주(德州)에서 임청(臨淸)까지의 구간은 대운하를 경계로 하고 있다. 청하현은 대운하의 서쪽에 있는데, 청하현은 분명히 하북성에 속한다. 산동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산동사나이 무송이 산동사람이 아니라면, 이게 무슨 웃음거리인가? 만일 무송이 산동 양곡현에서 호랑이를 때려잡았고, 양곡현 지현이 그를 도두(都頭)에 임명하였으며, 무대랑도 이미 청하현에서 양곡현으로 이사와서 자리잡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산동 양곡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약간은 억지가 아닌가?

 

역사를 살펴보면, 청하현은 수문제(양견)의 개황초년에 설치된다. 한고조시대에, 이곳에는 먼저 청하군을 두고, 나중에 여러번 바뀌어 청하국이 된다. 한원제이후에는 군(郡)으로 정해진다. 관할지역은 오늘날의 하북성 청하현의 주변지역이며, 오늘날의 산동인근의 몇개 현, 시까지 포함된다. 동한이후에는 다시 청하국으로 개칭된다. 북위때는 여전히 청하군이라고 칭해진다. 수나라초기에 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없앴다가, 수나라 대업이후 다시 청하군으로 회복시킨다. 당나라초기에는 군을 없애고, 주를 설치했는데, 현은 주의 관할에 속했다. 당나라초의 청하현은 패주(貝州)에 속했고, 하북동로의 관할을 받았으며, 하북동로의 치소는 대명부(大名府)에 두었다.

 

송나라때에는 비록 산동성, 하북성의 건제를 두지 않았지만, 이미 "로(路)" 건제(로는 성보다 적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호전>>에서 "산동호보의, 하북옥기린"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의 산동과 하북은 성(省)이 아니라 로(路)를 말한다. 나중에 원나라때 성을 만들어, 요,송시대의 "로"의 기초위에서 나누어 구분한 것이다. 대운하는 수나라때 만들었다. 대운하를 산동과 하북의 경계선으로 삼은 것은 당연히 수나라이후의 일이다. 이렇게 보면, 청하현의 역사상 계속 하북성에 속했고, 산동성에 속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수호전>>은 원나라때 쓰여져서, 명나라때 출판되었다. 산동인들이 무송을 동향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명나라이후의 일일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기로예(산동,하북,하남)지방의 경계선은 자주 바뀌어서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도 이전에는 하남성에 속한 적이 있었고, 청하현도 한번은 산동성에 속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청하현지>>를 뒤적여보지는 않아서 아무렇게나 말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연혁으로 보면, 청하현은 주로 하북에 속했지, 산동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사실, 바로 당대에 방송되는 산동쾌서(快書)나 평화(評話)에서도 무송이 산동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고원균의 산동쾌서 <<무송전>>의 제1회에서 "그 무송은 집이 직예광부(直隸廣府) 청하현"이라고 한다. "직예"는 경사(京師)에 직속된 지역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으로 경사주위지역을 의미한다. 광부(廣府)는 광평부(廣平府)를 의미하며, 부의 치소는 지금의 하북형 영년현이다. 송나라때 이미 직예라는 부현이 있었다. 그러나 광평부와 청하현은 모두 직예에 속하지는 않았다. 하북성은 청나라때 "직예성"이라고 칭해졌다. 이로써 볼 때, 고원균의 말은 바로 그의 청나라때 조사로부터 전해내려온 '당시'의 칭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왕려당의 양주평화 <<무송>>의 제1회에서도: "무송이 어떤 사람인가? 바로 북직광평부 청하현사람이다" "북직"은 "북직예"를 말한다. 명나라때는 남경과 북경의 두 경사를 두었으므로, 오늘날의 강소성은 당시 "남직예"로 불리고, 지금의 하북성은 당시 "북직예"로 불리웠다. 이렇게 보면, 왕려당의 말도 아마도 그녀의 조사의 조사로부터 전해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금병매>>의 제1회에서는 "대송 휘종 황제정화연간, 산동성 동평부 청하현에는 한 풍류자제가 있는데...복성으로 서문이며 이름은 외자로 경이다."라고 하여, 청하현을 산동성 동평부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산동인들이 무송을 동향으로 여기는 것은 아마도 이에 근거한 것일지도 모른다. <<금병매>>는 명나라 숭정연간에 출판되었고, 작자는 명나라때 사람이다. 이미 "성"의 건제가 있었다. 동평부는 송나라때 설치되었고, 원나라때는 "로"로 개칭되고, 명나라때는 "주"로 개칭되었다. 아래에는 지금의 산동문상, 동음, 동평, 양산, 비성, 양곡, 동아의 7개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청하현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이로써 보면 "난릉소소생"도 줄줄이 말은 잘 했지만, 고증을 거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청하현을 산동에 속하는 것으로 하였을 뿐아니라, 무송의 원적을 양곡현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호랑이를 때려잡은 장소를 청하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양강(景陽岡)도 청하현으로 옮겨놓았다. 그는 창주에서 회고견으로 돌아오면서 형에게 들르는데, 길가는 도중에 청하현을 지나고, 그래서 우연히 호랑이를 때려죽인다. 난릉소소생(금병매의 작가)는 무송이 창주에서 청하의 고향집으로 가는 길에 양곡을 지나간 노선에서의 착오를 시정한 것이다. 그러나, 청하현을 산동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잘못을 범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청하현은 하북에 속하고, 산동에 속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