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등규의 아들인 기파민(紀坡民)의 부친에 대한 회고의 글이 나온 이후, 사람들이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역사를 찬개(纂改)하고 문혁과정에서 엄중한 잘못을 저지르고 극좌노선을 일관되게 집행한 인물을 분식하는 것은 드물게 보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는 충분했다. 기등규는 살아있을 때, 당시의 중앙지도자들에 의하여 왕 장 강 요와 나란히 “5인방”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전안조(專案組)의 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9.13사건이후 중앙은 3대전안조(제1조: 왕동흥; 제2조:
이제, 우리는 다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관건적인 역사적인 단계에서 호요방이 어떻게 기등규를 평가하였느냐는 것을 살펴보겠다. 호요방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상당한 장기간동안 혹은 최소 1년동안, 화국봉 동지는 주로 왕동흥 동지, 기등규 동지, 오덕 동지, 소진화동지에 의지했다. 다시 두 사람을 추가시킨다면, 한 사람은 이신 동지이고, 또 한 사람은 곽옥봉 동지이다. 이들은 두 개를 장악했는데, 하나는 여론도구로 주로 왕동흥 동지와 이신 동지이며, 오덕 동지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사도구인데 주로 왕동흥 동지, 기등규 동지와 곽옥봉이다. 이 두개의 팀은 기세가 대단했다. 이 몇몇 사람이 일을 했으며, 그들은 신비막측하였고, 고심막측하였으며, 일체를 처리했다. 내일 무슨 내용을 발표할지를 심지어 선전부의 책임자인 경삽동지도 알지 못했다. 이런 업무방식은 전형적으로 ‘사인방’을 분쇄하기 이전의 방식이었다. 기등규 동지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를 방문한 사람들이 이 분은 폼을 잡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였었다.”
위의 말에서 세번이나 기등규가 언급되는데,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의 호요방은 그저 중앙조직부의 부장이었는데, 기등규의 면모는 이미 지상에서 활발하게 나타났다. 기등규의 아들이 쓴 글에서 기등규는 계속 열심히 일을 하고, 착실하게 행동하는 ‘노간부’의 인상인데, 그렇다면 진실한 기등규는 어떠했는가? 우리가 함께 역사를 환원시켜 보자.
기등규의 등장은 화국봉과 유사하다. 그들은 모두 지방시의 일급간부에서 떠올랐다. 모택동은 기등규를 “옛 친구”라고 불렀는데, 화국봉을 “우리의 부모 같은 관리”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를 중용하겠다는 징조는 아니었다. 기등규가 발탁된 것은 하남의 제1호 조반파인
기등규는 모택동이 인정한 “구노선”하의 혁명 혹은 계속혁명에 개조하여 중용할 수 있는 기층간부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기등규의 충성은 모택동이 그를 좋게 본 이유중의 하나이다. 특히 제9기 2중전회에서 임표사건이후 기등규는 강청을 통하여
장사사건이전에, 4인방이 기등규를 찾아와서 상의하였다. 기등규는 이번 거동은 아주 모험적이라고 생각해서 강청과 장춘교에게 가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장춘교는 듣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기등규와 강청의 관계는 현재 얘기하는 것처럼, 서로 타협하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했던 관계가 아니라, 계속하여 복종하고 따르고, 시키는대로 했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주은래도 사인방의 앞에서는 마음에 없는 말을 많이 하였지만, 그러나 이 점은 이미 역사가 밝혀주고 있다. 기등규는 비록 죽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그의 생전의 행위에 대하여 무죄라고 변호하는 것은 너무나 당돌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모택동은 나중에 사인방을 이름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동시에 두 사람을 얘기했다. 한 사람은 기등규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강생이다. 모택동은 “기등규는 어떤 일은 나에게 얘기하지 않고, 총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청, 장춘교에게 얘기한다. 정치국의 다수인들과 얘기하지 않고 다수와 단결하지 않고 그저 소수인을 찾았다. 이것은 어떤 성격인가? 하나의 정치국위원은 정치국과 당중앙과 일치해야한다는 것이고, 몇 사람과 일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말에서 우리는 일찍이 “오인방”의 하나로까지 얘기되었던 기등규의 일면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비록 기등규를 질책하였지만, 그에 대한 신임이 감소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등소평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기등규의 건재한 모습을 보게 된다.
기등규는 1976년 3월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등소평 동지는 옛 병이 재발했다. 1966년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등규는 비록 사인방을 따랐지만, 그는 그들과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는 했다. 특히 화국봉이 중앙후계자로 확정된 후, 기등규는 충성을 표시하고, 모원신의 거취와 강청의 구체적인 업무배치를 토론할 때, 그는 태도를 바꿔 화국봉을 지지하였다. 이로써 강청등은 한을 품고 말하였다. “정말 사람이 떠나면 차가 식는 법이구나. 주석의 시신이 아직 식지 않았는데, 기등규 마저도 우리와 맞서려고 하는구나” 그래서 사인방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화국봉, 왕동흥, 섭검영은 기등규에게 충분한 신임을 주었다.
1977년 2월, 기등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화국봉 주석의 영명한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확립되었다. 왕동흥 동지의 지위도 확립해야 한다.” 그는 여러 차례 공개장소에서 왕동흥은
진정으로 기등규를 보호한 것은 오히려 상대방 진영의 조자양이었다. 조자양은 일찍이 기등규와 함께 일한 바 있었다. 중요한 것은 장춘교가 조자양의 잘못을 추궁하려할 때, 기등규가 적극 나서서 조자양을 도와주었었다. 그래서 기등규가 제11기 3중전회에서 기본적으로 권리를 상실한 후에, 조자양은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었다. 소위 기등규의 장점을 발휘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조자양이 제안하여 설립한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중심에서 일하게 해준다. 왕진은 중앙을 대표하여 기등규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정부급(正部級, 장관급)의 대우를 해준다.
주의할 것은, 마찬가지의 잘못을 범한 왕동흥, 오덕, 진석련은 나중에 대우나 직무배치에서 모두 기등규보다 더 나았다. 악명을 떨친 4.5사건의 진압자 오덕은 1982년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왕동흥과 동렬이었다. 그리고 진석련은 두 번에 걸쳐 중앙고문위원회 상임위원이 된다. 이전에 사임한 중앙정치국 위원의 대우를 받는다. 등소평이 사망한 후, 진석련은 당당하게 CCTV의 인터뷰를 받고, 옛 부하의 신분으로 “등소평 정치국위원의 당년”을 회고했다. 1999년 진석련이 사망한 후의 격식은 80년대의 기등규에 대한 격식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이점에서 볼 때, 기등규는 극좌노선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지를 알 수 있다.
기등규는 일찍이 왕동흥 등의 사람들과 예언한 바 있다. “
기등규의 사후에 <<인민일보>> 제4판에는 하나의 보통의 부고가 실렸다. 우수한 공산당원이라고만 호칭되었고, 그의 잘못이 언급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이전의 부총리 겸 모택동의 ‘옛친구’의 체면을 완전히 깍아버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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