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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과 인구

중국 지역차별의 근원

by 중은우시 2007. 3. 8.

글: 답설문매(踏雪問梅)

 

최근 몇년동안, 하나의 현상을 자주 보게된다. 이 현상은 바로 사회에서 한번은 하남사람을 욕하다가, 다시 동북사람을 욕하기도 하고, 이쪽에서 아직 욕하는게 끝나지도 않았는데, 저쪽에서는 다시 상해사람, 산동사람에 대하여 욕하기 시작한다. 만일 이 현상을 아주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어떤 지방의 사람이든 모두 욕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이렇게 욕하는 사람들이 속하는 지역도 물론 서로 다르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다. 당연히 이런 재미있는 현상 배후에는 일종의 비애가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지역차별"이라고 한다. 자연히 지역차별과 그 배후에는 근원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국인으로 하여금 이런 지역차별현상을 일으키게 하는가? 사실, 만일 자세히 분석하고 사고한다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런 지역차별은 지역적으로 나누어지는 것만은 아니고, 우리 생활의 곳곳에 존재하며, 그저 범위와 표현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먼저 지역을 확대해보자. 성(省)에서 국가로 단계를 올려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각도에서 보면, 무슨 하남사람, 상해사람, 동북사람의 지역적인 구별을 이미 말살된다. 여기에서는 미국인을 욕하고, 일본인을 욕하고, 한국인을 욕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우리는 다시 눈을 지역범위에서 좀 더 확대해보자. 국가를 동양, 서양으로 나누어보면, 너는 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는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의 간에 차이가 말살되어 버린다. 각도는 다시 동서방문화의 우월에 대한 비교로 나타나는 것이고, 자연히 동방문화에 대하여 우리는 자랑하게 되고, 서방문화에 대하여는 폄하하게 된다. 이것은 지역차별을 확대했을 때의 하나의 모습이다.

 

반대로, 우리는 다시 지역범위를 축소시켜보자. 성에서 현(縣)으로 좁히게 되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동일한 하나의 성에서 사람과 사람간에 또한 지역차별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에서 다시 촌(村)으로 내려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촌에서 다시 가정으로 내려가면, 동일한 마을 안의 사람들과 사람들 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집안과 다른 집안을 비교하면 어떻고 저떻고...그들 집안은 어떻고 저떻고...어쨌든 다른 집단에 대하여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역차별은 성급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구분이 있는 한, 그러한 차별은 모든 분야와 단계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역구분이 없으면, 이런 차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대학생들이 말하는 것만 봐도 "우리 청화는 어떻고 저떻고..." "우리 북대는 이렇고 저렇고...", "그들 학교는 어떻게 우리 학교는 어떻고..." 혹은 어떤 회사의 직원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회사는 어떻고 저떻고..." 경쟁상대인 "회사는 또 어떻고..."

 

즉, 중국인에게 있어서 그저 분류속성만 존재하면, 반드시 분류속성에 따르는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의 각도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각종 이런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문학계의 "해파(海派, 상해파)"와 "경파(京派, 북경파)"의 다툼이라든지, 오늘 날의 "80년대후" 작가와 "80년대전"작가의 다툼이라든지, 또는 역사상의 각종 당파, 학파간의 다툼이라든지, 이것은 모두 중국인의 뼛속에 스며있는 특색인 것이다.

 

중국인의 뼛속에 이런 특성이 형성된 것을 따져보면, 한두마디나, 한두편의 글로써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저 필자의 사고와 관점을 약간 얘기해서 다른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으면 한다.

 

중국의 전통문화에는 개인과 집단간의 존재방식이 아주 모순되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유가사상이 계속하여 제창한 것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와 같이 작은 데서 큰 곳으로 진행하여 나가는 방식이었다. 철학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를 가져오는" 규율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일종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모순은 "도덕의 개인성"과 "사상의 집단성"으로 나타난다. 유가사상은 개인의 도덕수양을 아주 중요시 한다. 즉, 네가 유가사상기준에 부합하는 군자가 되려면 반드시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이렇게 말할 때의 너의 존재가 체현하는 것은 개인적인 도덕성이지, 시대의 흐름이나 집단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사회의 일체의 현상에 대하여 그것들이 유가사상의 기준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별해야 한다. 개인적인 수양에 있어서 말하자면, 유가사상은 사고하고 판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큰 측면에서 보게 되면, 다시 말해서 집단성 즉 국가, 천하의 각도에서 보면, 유가사상은 또한 개인의 사고를 말살하는 것이다. 그저 유가사상만이 천하를 통일한 사상이 되어야 한다. 어떤 다른 사상도 이단이고 사설(邪說)이다. 이때는 반드시 개인적인 사고를 말살해야 한다.

 

이런 일종의 모순성은 중국인에게 또 다른 특성을 갖게 했다. 전통문화사상에서 개인의 수신과정은 중국인의 개인적인 자존(自尊)이라는 특징을 결정했다. 그러나, 전통문화사상의 개인적 사고에 대한 말살은 또한 중국인들의 자비(自卑)의 특징을 갖게 했다. 자존과 자비의 두 개의 모순된 특징은 중국인의 몸에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존의 특성이 있으므로 일체의 외재적인 것에 대하여 스스로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것같은 태도로 대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수천년의 문화우월감과 폐문쇄국은 사실 모두 이런 자존이라는 특성의 표현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문화가 외래문화에 대하여 융합하거나 거절할 때, 모두 자기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라는 심리적인 기초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던가? 자비의 특성으로 인하여 중국은 수천년동안 겨우 두세 명의 사상가,철학가만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집단적으로 사고가 상실된 환경하에서 어찌 새로운 사상이 출현할 수 있겠는가?

 

자연히 이로부터 지역차별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지역차별은 사실 자존의 특성이다. 한 마디로 하면 모두 내가 낫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당연히 나보다 못하게 된다. 동시에 사상의 자비성(自卑性)으로 인하여, 지역차별하는 사람들은 지역차별을 할 때 절대로 개인적인 방식이나 개인적인 사상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왕삭(王朔)은 80년후의 작가들을 욕할 때, 자연히 50, 60, 70년대작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것은 뼛속까지 파고든 자비사상의 자연적인 반응이다. 동시에 80년대후작가들의 반응도 80년대후라는 이 집단을 바탕으로 지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남사람을 욕하거나, 상해 또는 산동사람을 욕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자기 성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학파간의 논쟁은 마찬가지로 동일한 등급의 학파들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도 정상적인 것이다. 자연히 남자들이 여자들에 대하여 뭐라고 말 할 때는 이렇게 하게 된다.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도 반박할 때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여자들은...."  결국 말할 때마다 자신은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것은 모두 사상에서의 자비감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런 지역차별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역성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자아의 범위에 있다. 지역적자아를 범위속성으로 하면 지역차별이 되는 것이고 연령자아를 범위속성으로 하면 연령차별이 되는 것이고, 학술관점자아를 범위속성으로 하면 학술차별이 나타나는 것이다.

 

뿌리를 찾아보자면, 이것은 중국인의 자존과 자비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자존과 자비는 모두 독립적인 사고를 잃어버린데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중국인의 진정한 비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