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원(北元)정권의 멸망
1368년, 국운이 100년을 넘지 못했던 원나라는 주원장이끈 반란군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요, 금, 서하등의 소수민족정권과는 달리, 마지막 황제인 원순제(元順帝) 토군테무르(妥歡帖睦爾)는 전사하지도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으며, 왕족과 남은 부대를 이끌고 자기 조상이 일찌기 나라릉 일으킨 옛땅인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중국에서 외래정권으로써 그대로 몸을 빼서 물러난 "기적"을 이룬 것이다. 이는 징기스칸부터 거의 미친듯이 확장하여 몽고제국의 국경이 넓었고, 칸국, 부락이 수도 없이 들어섰는데, 원나라는 그 중 몽골제국의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고, 원나라의 황제는 몽골제국의 대칸이기도 했으며, 몽골의 각 칸국과 부락에 대하여 종주권을 행사하였었기 때문이다. 원나라의 멸망은 몽고제국으로 하여금 중국의 영토만을 잃었을 뿐이고, 몽고제국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였던 때문이다.
원순제는 원나라 황제중 드물게 한문화에 깊이 접촉했던 사람이다. 대도성이 함락된 후 황망하게 북으로 도망갔는데, 그 타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비록 여전히 몽고각부의 대칸이었으나, 그는 나라를 버리고 고향으로 되돌아간 우수를 달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명나라군대는 그에 대하여 계속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니, 더구나 편안히 세월을 보낼 수도 업었다. 마침내 1370년 5월 23일, 그는 비분과 우울함을 안고 사라무룬강변의 응창(應昌)에서 사망한다.
원순제의 아들인 애유식리달랍(愛猷識里達臘)은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카라코룸(哈拉和林)에서 즉위한다. 그는 북원정권을 다시 8년간 유지한고, 병사를 훈련시켜 언젠가 다시 중국의 황제위에 오를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 희망을 실현할 수 없었을 뿐아니라, 몽고지구로 깊이 진입해오는 명나라군대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했다. 1372년, 명나라의 대장군 서달(徐達)은 카라코룸을 공격한다. 이 몽고황금가족의 대본영은 권력과 영광의 상징이었는데, 명나라 군대에 짓밟힌다면, 몽고제국은 세계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몽고인들의 저항은 아주 격렬했다. 그러나, '만리장성'으로 칭해지던 서달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애유식리달랍은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명나라 대군은 전선이 너무 길어지게 됨에 따라 뒤를 받쳐주지 못하여 투라강변에서 저지되고 만다.
1378년, 애유식리달랍은 여한을 안고 사망한다. 그의 아들 투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爾)가 제위를 승계한다. 이 세번째 북원황제가 지배하는 영토는 이미 몽고제국이 처음 건국될 때의 수준으로 좁아졌고, 조상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보이게 되었다.
1388년, 10만명의 명나라군대가 남옥(藍玉) 대장의 지휘하에 하러카강과 커르룬강의 사이, 베르호의 남안에서 투구스의 군대를 대파했다. 북원의 여러 왕, 평장사이하 관리 3천여명 및 병사 7천여명은 포로가 되었고, 투구스테무르는 도주한 후 그의 부하장수에 의하여 목졸려 죽는다.
이번의 실패는 황금가족-쿠빌라이가족의 북원정권으로 하여금 몽고인들의 심중에서 지고무상의 지위를 상실해버린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몽고부락은 그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1399년, 예니세이강의 상류연안에 분포해있는 치르지스부의 수령인 구이리츠는 최후의 북원황제인 얼러보커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1399년 그를 무찌르고 죽여버리며, 각부를 통치하는 패권을 차지한다. 이로써 29년간 남은 숨을 몰아쉬던 북원정권은 멸망한다. 합법적인 몽고제국의 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몽고각부는 다시 몽고제국의 칸의 보좌를 차지하려는 투쟁에 접어들었다.
2. 군웅들이 칸의 지위를 노리다.
북원의 멸망은 명나라로 하여금 정치상의 적수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고, 몽고는 이미 '변경의 우환'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전왕조의 잔여세력이 아니었다. 이로 인하여 영락제는 귀이리츠에 대하여 아주 우호적으로 대하고, 그의 몽고각부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구이리츠도 칸의 지위를 오래 보전하지 못하고 만다. 1400년 아수터부의 수령인 아루타이와 오이라트부의 수령인 마하무의 연합군에 패배한다. 아수터부는 몽고화된 이란인이었고, 코카서스에서 기원했다. 몽고의 서정으로 중국에 들어왔고, 원나라군대에서 그들의 군단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이라트부는 삼림몽고인중의 강력한 부락이었고, 징기스칸시대에 "임목중의 백성"이라고 불리웠으며, 바이칼호의 서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루타이와 마하무는 모두 몽고제국의 칸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기들 부족이 몽고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는 것에 대한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구이리츠를 격하한 후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자기들은 몽고제국의 칸의 지위를 다투는 부족과 다르다고 알린다. 이런 귀순은 명나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고, 그들에게 많은 지원과 지지를 보낸다. 이런 지원에 의거하여, 오이라트부는 그 패권을 바이칼호의 서안에서 어얼치스강 상류의 전체 서몽고지역으로 확대한다.
그러나, 아수터부와 오이라트부의 몽고중부와 몽고동부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구이리츠의 아들인 어써쿠가 다시 일어나서, 아루타이와 마하무와 칸의 보좌를 다투기 시작하였다. 쌍방은 십여년간의 전쟁을 벌였고, 어써쿠가 1425년 병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써쿠는 계속적으로 아루타이 및 마하무와 최고종주권을 다투는 것과 동시에, 1403년, 북원의 마지막 황제인 어러보커의 아들인 본야시리로 하여금 칸의 지위에 오르게 한고, 자기가 몽고제국의 칸이라고 선언하게 한다. 황금가족의 후예로서, 본야시리는 아수터부나 오이라트부보다는 호소력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아루타이를 포함한 몽고부락은 이 정통대표자의 주변에 결집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족의 쇠망을 바라던 명나라로서는 이 새 몽고 대칸에 대하여 적대시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영락제는 본야시리에게 신하로 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의사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려던 본야시리가 어찌 자기가족을 멸망시킨 중국의 황제인 주씨가족에게 신하로 자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영락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몽고로 들어갔다. 징기스칸의 옛지역인 어넌강 상류의 평원에 이르고, 1410-1411년에 본야시리와 아루타이의 군대를 물리친다. 이번 실패는 본야시리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그에게서 칸의 권위를 잃어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412년, 오이라트부의 수령인 마하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격파하고 칸의 지위를 빼앗아 버렸다.
이전에 마하무는 계속 명나라의 영락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이미 몽고제국의 진정한 칸이 되었다. 그래서 아무런 망설임없이 명나라와 단교했다. 이것은 영락제로 하여금 재차 몽고를 친히 정벌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비록 마하무의 저항으로 인하여 명나라 군대는 많은 손실을 입혔지만, 그러나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는 군대를 투라강의 서쪽으로 철군시켜 휴식하게 한다. 마하무의 위신은 이번 전투로 약간 손상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는 명나라 군대가 몽고초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하무가 도망친 후, 칸의 지위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이 때 흥안령 동쪽에 거주하던, 만주변경의 넌강 부근의 커얼친부의 수령인 아타이가 1425년, 무리를 이끌고 몽고중동부지구를 장악했다. 시류의 흐름을 따르던 아수터부의 아루타이는 이번에는 아타이를 지원하고 본야시리를 죽여버리며, 아타이를 몽고제국의 칸으로 받든다. 커얼친사람은 징기스칸의 동생인 하사르의 후예들이고, 역시 황금가족에 속한다. 비록 영락황제가 웨이라터의 배반을 용인할 수 없었지만, 몽고인들중에 높은 위망을 가진 황금가족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다시 오이라트부를 지원한다. 자연히 이 지지에 대하여 오이라트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3. 오이라트의 정권장악
영락제가 관철하려 했던 것은 황금가족타도를 위하여 오이라트부의 세력을 지원하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그의 사후에 효과를 발휘한다. 1434년에서 1438년까지, 오이라트의 수령이며, 마하무의 아들인 투환은 군대를 이끌고 몽고동부로 진공하여, 제국의 칸 아타이와 그의 중요한 신하인 아루타이를 죽이고, 칸의 보좌를 빼앗는다. 비록, 황금가족인 쿠빌라이가족의 한 왕자이며, 어러보커의 아들이고, 본야시리의 형제인 아잔이 이 때 정통을 수호하는 수령들에 의하여 칸으로 옹립되지만, 사실상 몽고제국은 이미 황금가족인 쿠빌라이가족에서 오이라트의 줘로스가족의 수중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명나라 황제에게 있어서는 징기스칸의 황금가족은 이미 끝났다. 초원의 이러한 새 군주는 그다지 혁혁한 집안의 역사를 가지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은 몽고제국의 역사상 혁혁하지 않았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금가족처럼 지고무상의 위망과 호소력을 지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몽고인의 중원에 대한 위협은 이로써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이라트사람은 그들이 계승한 몽고제국의 칸의 지위를 잊지 않았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자신과 다른 몽고인들과 거리를 멀게 유지하였지만, 그들은 한 시도 몽고제국의 원래 강역을 회복하려는 바람을 버리지 않았다.
당연히 명제국이 아직 강대할 때에는 오이라트 사람들은 호랑이수염을 함부로 만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조상 마하무의 유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을 회복하려는 첫번째 칼은 그들이 동남지구의 차카타이 칸국으로 내려치게 된다. 두환의 아들 예센(也先 또는 額森)은 차카타이 칸국의 웨이스칸을 격파하고, 그의 누이인 하니무공주를 강제로 취한다. 웨이스칸은 황금가족이므로, 이번 혼인은 오이라트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몽고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혈통을 가지게 한 것이다.
예센은 부친인 투환의 칸을 계승한 후, 몽고제국의 강역은바르카스호수에서 바이칼호까지 넓어지고, 다시 바이칼호에서 장성부근지구까지 확대된다. 정통을 상징하는 도성인 카라코룸도 제국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1449년, 그는 중국의 공주를 취하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래서 예센은 산서북부와 대동부근의 중국변경을 유린한다. 명나라의 영종황제는 태감 왕진과 전투에 나선다. 토목보에서 전투를 개시하지만, 예샌은 명나라군대에 엄청난 타격을 가하며 명나라군대 10만을 섬멸하고, 영종황제를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포위공격에는 익숙치 않아서, 예센은 그 지역의 도시인 대동(大同)과 선화(宣化)는 함락시키지 못한다. 그리하여 포로인 영종황제를 데리고 몽고제국으로 되돌아간다.
3개월후, 그는 권토중래한다. 군대를 북경 서북부까지 진격시킨다. 그러나, 명나라의 명장 우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그리하여 여러번의 진격이 무위로 끝난다. 오래지 않아 명나라의 다른 지역의 군대가 보충되면서, 명나라의 군대가 수적으로 우세하게 되자, 예센은 거용관으로 철수한다. 1450년, 예센은 영종황제를 풀어주기로 결정한다. 1453년에는 중국과 평화협정을 맺어 자기는 중국의 신하라고 선포한다. 이 행동으로 그는 몽고제국의 종주권을 포기하게 되고, 자신은 독립한 칸이라고 하게 된다. 이런 행동은 전혀 똑똑한 행동이 아니었다. 원래 그의 부하가 되었던 황금가족의 부락과 칸국들은 다시 자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1455년, 예센이 암살된다. 예센의 아들인 아마상치 타이지는 부친의 칸위를 이어받는다. 1456년, 차카타이 칸국을 침범하는데, 이리강 부근에서 재위중이던 위노스칸을 패배시킨다. 그러나 이 때 황후인 하니무(차카타이 웨이스칸의 여동생)은 후방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그녀의 아들인 이부라신과 예리야스 형제가 아마상치에 반란을 일으키나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 내란으로 오이라트의 실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4. 황금가족의 복벽
오이라트의 실력이 약화될 때, 징기스칸의 후에들은 아직 제대로 반격을 조직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족내부의 다툼으로 서로 죽고죽이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1467년, 징기스칸의 제27대 후게자인 만두구러 칸은 그의 조카손자와 후게자 보르후지농을 토볼하는 전쟁중에 사망했다. 보러후지농은 그가 칸을 칭하기 전인 1470년에 암살된다. 후손들이 많았던 황금가족은 이제 겨우 5살된 남자아이 보러후지농의 아들 다옌(達延)만을 남기게 된다.
다옌의 운명도 가혹했다. 가족의 어른들은 모두 내분중에 사망했고, 어린 아이는 아무에게도 의탁하지 못하며, 그의 모친도 이미 그를 버리고 개가했다. 이것은 징기스칸의 어릴 때의 처지보다 더 비참한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만두구러칸의 젊은 과부인 만두하이사이인커둔이 그를 자기의 모호하에 둔 것이다. 만두하이사이인커둔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옌을 길렀을 뿐아니라, 1470년에는 그를 칸으로 선포한다. 가장 힘든 것은 그녀가 여인의 몸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이라트를 쳐부쉈다는 것이며, 오이라트부는 몽고의 중동부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된다. 다얜의 이후 통치에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다얜칸은 몽고제국을 통치한 기간이 가장 긴 칸이다. 1470년부터 1543년까지 73년에 달한다. 1481년에 친정을 시작한 이래로, 다옌칸은 우익투무터족, 우량하족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리고 1497년부터 1505년까지의 기간동안 그는 요동에서 감속에 이르는 명나라 변경지구에 아주 효과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명나라가 오이라트와 연락할 수 없도록 한다.
1543년에 다얜 칸이 사망한 후, 그의 손자인 보디는 칸을 계승한다. 비록 넓은 영토는 다얜 칸의 여러 아들들에게 나누어 졌지만, 1544년부터 1634년까지 몽고제국의 칸의 지위는 계속 안정적으로 다얜 칸의 장손후예인 차하얼부에서 전승된다. 역대로 보디 칸(1544-1548), 쿠등 칸(1548-1557), 투먼자사크투 칸(1557-1593), 체첸 칸(1593-1604), 린단 칸(1604-1634)
5. 몽고제국의 멸망
비록 다얜 칸의 장기통치가 몽고제국의 칸위 계승을 원활하게 하였지만, 몽고민족의 최대약점인 "가족간에 유산을 나누어 갖는 전통"을 깨트리지는 못했다. 제국의 창립자가 죽은 후, 제국은 연방식의 가족국가로 변모하는 것이고, 국내의 각급 수령은 모두 형제 또는 당형제이고, 그들은 차하얼부의 최고권리는 인정하지만 상당히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하얼부의 칸위 계승자들은 점차 전체 몽고를 통치할 역량을 잃어버리게 된다. 서방의 오이라트와 동방에서 일어난 퉁구스(만주)인들은 그들의 무서운 적이었다. 그러나, 이 때, 오이라트부는 마침 카자흐 칸국과 제정러시아의 짜르 및 내부의 줘로스가족과 허슈터가족의 권력투쟁에 휘말린다. 이로 인하여 몽고제국역사를 끝장낸 것은 퉁구스인들이 건립한 후금제국이 된다.
1604년 린단이 칸의 지위를 계승한다. 황교의 사르바후투크투의 종교의식을 받고, 린단쿠투크투 칸이라고 부르게 된다. 린단 칸은 멍청한 칸은 아니었다. 그는 일찌감치 후금제국의 몽고에 대한 야심을 눈치챘다. 그래서 제위를 계승한 때로부터 각부를 통일하기 시작하고, 스스로 "통령사십만중몽고바투루칭지스칸"이라고 칭한다. 1627년, 우익 어얼두스, 카라친, 투무터등의 부를 수습하고, 카르카부와는 연맹을 맺는다. 그리하여 그의 위세는 크게 떨치게 된다. 관할지역은 동으로 요동에서 서로는 감숙에 이른다. 그러나, 다음 해, 두앤우량하의 쑤부타이, 카라친의 다라이 타이지, 투무터의 허부스투 칸, 어얼두스의 어런친지농 및 용세부, 아수티, 아바카, 카르카등의 부족이 대군10만의 연합군을 구성하여 투무터의 소성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린단 칸은 4만여명의 정예를 잃게 된다. 이것은 린단 칸의 실력을 크게 감쇄시켰다. 그의 적은 몽고인들의 용맹함과 한족의 지혜를 결합시킨 후금황제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청태종)이었다. 이것은 용맹하지만 지략은 없었던 그로 하여금 실패하게 만드는 운명에 놓이게 한다.
누르하치때, 커얼친부, 자루트부는 혼인관계로 후금에 귀부한다. 투무터, 카라친, 우량하등은 린단 칸의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후금에 귀순한다. 1625년, 린단 칸은 넌강으로 병사를 파병하여 커얼친부를 공격한다. 후금은 병사를 보내어 커얼친을 도와준다. 린단 칸은 패주한다. 홍타이시는 직위후, 린간칸의 주요한 적이 된다. 1628년, 패륵 아지거를 보내어 노하강의 상류에서 린단한의 통치를 받던 카라친부와 결맹을 맺고, 함께 린단 칸을 공격하기로 한다. 9월, 홍타이시는 대군을 이끌고 차하얼의 통치를 받던 아오한, 나이만, 카르카, 차루터와 카라친등의 부의 두령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이로써 린단 칸은 칸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이미 고립되어 버리고, 시라무룬강유역으로 후퇴하고 귀화성(후허하오터)만을 고수하게 된다.
1632년 4월, 홍타이시는 대군을 다시 이끌고 서진한다. 도르곤도 함께 출정한다. 시라무룬강변에 이르러, 몽고여러부의 병사를 모아 함께 린단 칸을 공격한다. 세력이 자기보다 월등한 적군을 보고, 린단 칸은 어쩔 수 없이 귀화성을 버리고 인마 10만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이미 기세가 기운 것을 본 사람들은 10명중 7, 8명이 흩어져 버리게 된다. 린단 칸이 청해로 도망갔다가, 2년후에 청해에서 병사한다. 그는 죽기 전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와 마찬가지로, "짐이 망국의 군주는 아니라"고 한탄했다. 그들은 모두 노력은 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재능은 모두 그들 조상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명제국과 몽고제국은 이백여년을 투쟁하였는데, 누구도 상대방을 소멸시키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10년의 기간을 두고 청나라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다.
1635년, 도르곤과 웨투어등은 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린단 칸의 처자와 아들의 투항을 받고, 칸의 도장을 내놓게 한다. 전체 막남몽고는 완전히 후금제국의 판도에 들어간 것이다. 몽고제국의 칸의 지위는 이로써 단절되었고, 몽고제국은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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