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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원나라의 황제들은 왜 능묘가 없는가?

by 중은우시 2006. 9. 18.

봉건사회에서 황제는 지고무상의 지위를 누렸고, 살아서는 황금용을 새긴 의자에 앉았고, 죽어서는 황릉에 묻혔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원나라의 황제들은 능묘를 만들지 않았고, 관도 준비하지 않았으며, 순장품도 남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봉건황조는 황제가 죽은 후에 모두 능묘를 만들었다. 이러한 능묘중 많은 경우는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만들기 시작하며, 이후에도 매년 수리하고 늘여갔다. 그래서 재위기간이 길면 길수록 능묘의 규모도 더욱 커졌다. 그러나, 북경을 관광하게 되면 명나라 황릉과 청나라 황릉은 있는데, 왜 원나라 황릉은 없을까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된다.

 

원래, 원나라의 황제묘장제도는 역사상의 다른 나라와 많이 달랐다. 그들은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 천하의 모든 힘을 모아서 분묘를 만들고, 천하의 모든 재물을 모아서 관에 집어넣고, 후궁들을 모아서 순장을 시키더라도, 이후 몇번의 변란을 거치면 여러 경우에 파헤쳐지고, 유해가 노출되며, 심지어 분묘의 흙도 마르기전에 분묘가 이미 비어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비밀매장방식을 택하게 되어, 후인들이 발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원나라에서는 어떻게 황제를 묻었는가? 섭자기(葉子奇)의 초목자(草木子)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원나라의 황제가 죽으면, 관은 필요없었고, 순장기물도 필요없었다. 침목 2개를 준비해서, 가운데를 파내었고, 사람의 형태와 크기가 비슷하게 만들어서 합치면 관이 되었고, 그 가운데 유해를 두었다. 그 후에 묻을 장소로 옮겼다. 장소는 역사서에 의하면 "원나라의 여러 황제는 모두 막북 기련곡(漠北 起輦谷)에 묻었다"라고 되어 있다. 기련곡이 어디인지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커루룬하와 투라하의 사이에 있는 긍특산(肯特山, 현재 몽고공화국경내)으로 보고 있다. 그곳에 깊은 구덩이를 판 후에 파낸 흙을 순서대로 쌓아두었다가 관을 넣고 파낸 흙을 순서대로 다시 넣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표면은 원래의 흙과 동일한 흙이 되었다. 그리고는 부대를 파견하여 주위를 봉쇄한다. 다음 해에 풀이 나게 되면 묻은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다음 해에 제사를 지낼 때는 어떻게 하는가? 원래 매장하기 직전에, 한마리의 어린 낙타를 같이 순장시킨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는 그 어린 낙타의 어미 낙타를 데려가는데, 어미 낙타가 슬피 울며 움직이지 않는 곳이 바로 어린 낙타가 순장된 곳으로 보고 그 곳에서 제사를 지냈따. 그러나, 오래 지나서 제사도 중단되고 어미 낙타도 죽으면 더 이상 어디에 묻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몽고에 있는 징기스칸 묘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징기스칸묘에는 징기스칸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관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징기스칸의 유해는 도대체 어디에 묻혀 있을까?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상몽고사>>에 의하면 당시 징기스칸을 묻은 후에, 장지에 널리 나무를 심었고, 이후 나무가 자라면서 밀림이 되어, 어느 나무 밑에 묻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따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