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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카미카제(神風) : 몽고의 제1차 일본침공

by 중은우시 2007. 3. 8.

지원3년(1266년), 쿠빌라이는 병부시랑 혁덕(赫德), 예부시랑 은홍(殷洪)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쿠빌라이는 국서에서 이번 사신파견의 목적을 명확히 밝히면서 일본이 고려를 본받아 원나라와 통호(通好)하자고 하였고, 만일 통호하지 않으면, 장차 군대를 보내어 일본을 취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국서의 글내용이 무례하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고, 돌려보냈다. 이후에도 몇번 사신이 갔으나 모두 일본에 의하여 거절당한다.

 

지원10년(1273년), 쿠빌라이는 일본정벌전쟁준비에 착수한다. 지원10년 4월에 이르러, 탐라도의 임연(林衍)이 반란을 일으켰고, 고려왕의 정통에 반기를 들었다. 쿠빌라이는 이 틈을 타서 원나라 군대를 고려에 보내어 주둔시킨다. 이후, 원나라군대는 탐라도에 초토사(招討司)를 설치하고, 1700여명의 주둔군을 두면서, 일본과 남송간의 해상통로를 장악한다. 이로써 원나라군대는 직접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한다. 이후 쿠빌라이는 흔도(都), 김방경(金方慶)을 원나라의 대도로 불러 일본정벌에 관하여 협의한다. 지원11년(1274년) 정월, 쿠빌라이는 고려왕에게 명하여 9백척의 배를 건조하게 한다. 그중 대함으로 천석 또는 사천석을 실을 수 있는 3백척은 김방경으로 하여금 책임지고 건조하게 하고, 쾌속선 3백척과 급수소선 3백척은 홍차구(洪茶丘)로 하여금 책임지고 건조하게 한다. 그리고 정월 15일에 착수하여, 기한내에 완성하도록 명한다.

 

6월, 9백척의 군함이 건조되었고, 원세조 쿠빌라이에게 보고하였다. 쿠빌라이는 몽고, 한족, 고려의 3족군대로 구성된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을 정벌하도록 명한다. 연합군의 핵심은 몽고원나라부대의 몽고/한족부대 2만명이었다. 고려군은 5,600명이었다. 여기에 고려수군 6700명을 합하여 모두 32,300명이었다. 정동도원수는 흔도, 우부사는 홍차구, 좌부사는 유복형(劉復亨)이 지휘하였고, 8월에 출발한다.

 

당시의 몽고군대는 징기스칸의 훈련을 받아 군기가 삼엄하였다. 매 10인, 100인, 1000인, 10000인을 하나의 전투대로 하여 매 전투대에는 한 명의 대장이 통솔하였으며 조직이 아주 엄밀하였다. 그리하여, 용감하게 잘 싸웠고, 전투력이 매우 강했다. 이외에, 원나라는 당시 화기사용기술이 세계최고수준이었고, 일찌기 유럽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래서 화포는 이번 일본정벌작전의 중요한 비밀무기가 되어 원나라군대에 배치된다.

 

일본의 사무라이부대의 기초는 수(守), 개지두제(介地頭制, 庄頭制)였다. 이것은 원뢰조(源賴朝)가 건립한 막부시기에 형성된 병사제도였다. 임수, 개지두의 직을 가진 사무라이는 많은 사람들이 역대 쇼군이나 집권자의 가신이었다. 즉, 어가인(御家人)이었다. 수(守)는 한 지방의 병마대권을 장악한 최고행정장관이다. 그러나 관직의 품계로 보면, 종오품에서 정육품까지의 중하급관리였다. 지두는 공사토지에 대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였다. 그리고 그가 관리하는 토지에 대하여 경찰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직위는 더 낮아서, 수에 예속되었다. 그들은 그가 관리하는 토지면적의 대소에 따라 사병을 길렀다. 한 수가 군대를 데리고 출정하면, 그 일종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바로 당해 수부대의 핵심이 되어 함께 출정했다. 수가 관할하는 지두도 역시 그의 가족등을 데리고 하나의 무리를 이루러 함께 전투에 나섰으며 수의 지휘를 받았다. 이런 주종관계로 구성된 부대는 조직이 공고하고, 쉽게 궤멸되지 않았으며 흩어졌다가도 다시 뭉치곤 했다. 가신은 죽음으로써 군주의 말앞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으므로 전투력이 매우 강했다. 그러나, 이런 부대는 각자 따로 싸웠고, 지휘권이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전투시 일기가 일기를 맞이하는 단독전투방식을 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투시 혼란이 나타나고, 무조직, 무기율의 현상이 있어서 지휘가 쉽지 않았다. 전술이랄 것도 없었고, 근본적으로 원나라군대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전체 전투력으로 따지면 아주 약한 편이었다.

 

지원11년(1274년), 일본을 침입한 원나라군대는 흔도, 홍차구, 유복형의 세 장군의 지휘하에 10월 3일, 고려의 합포(合浦, 지금의 진해만 마산포부근)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한다. 10월 5일, 대마도에 접근한다. 현지의 지두(地頭)인 종마윤조국(宗馬允助國)은 팔십여기를 조직하여 원나라군대가 상륙하는 지점으로 갔고, 쌍방은 격전을 벌인다. 중과부적이어서 종마윤조국 및 그의 적자, 양자등 모두 12명이 전사하고, 대마도를 사수하던 군대는 전부 섬멸된다. 6일 대마도를 점령한다. 어떤 사료에 의하면, 종마윤조국이 일기도(壹岐島)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14일저녁 , 원나라군대는 일기도를 공격한다. 원나라군대의 두척의 배에서 약 400명이 먼저 상륙하고, 부대는 상륙한 후 대오를 갖춘 후 붉은 기를 세우는 것을 신호로, 수호군좌위문 위평경고(평내좌위문경륭)가 이끄는 백여기와 격전을 벌인다. 경고는 숫적으로 불리하자 성내로 물러나 방어한다. 15일에 성이 함락되고, 경고는 자살한다. 16일, 원나라군대는 비전의 연해도서와 서북연해일대를 압박한다.

 

비전(肥前)은 일본 큐슈의 서남연해지구의 고지명이다. 현재의 나가사키(長岐)와 사하(佐賀)의 두 개 현을 포함한다. 당시 일본도 폐문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큐슈의 태재부(太宰府)에는 총독부를 설립해서 큐슈의 군사방어와 국가외교를 책임졌다. 그리하여, 비전지역은 실제로 일본의 대외교류의 창구역할을 했다. 여러번 외래문화의 침식을 받고 군사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사세보 군항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국 태평양함대의 중요기지이며, 나카사키는 바로 원자탄이 떨어졌던 바로 그 도시이다.

 

태재부의 서수호소 소이(少貳) 겸 "삼전이도"의 수호인 등원경자(藤原經資)는 원나라군대가 대마도를 공격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편으로 막부에 보고하고, 다른 한편으로 방어진을 쳤다. 보고서는 10월 17일 겸창(카마쿠라)막부에 도달했다. 18일에는 교토에까지 도착한다. 10월 22일에서야 대마도가 원나라군대에 점령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때는 원나라와 일본군의 제1차전쟁이 이미 끝난 뒤었다. 이 상황으로 보면, 일본조정과 막부는 원나라군대의 일본침입전쟁에 대하여 아무런 구체적인 조치나 지휘를 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투의 주력은 태재부의 소이 등원경자의 지휘하에 진행되었다.

 

원나라군대는 비전에서 상륙한 후 종심으로 진격하지 않고, 주역부대를 하카다(博多)항으로 이동시켰다. 10월 19일, 원나라군대의 함선은 하카다항을 공격하였으며, 해변의 수비군대를 죽이고 금진(今津)일대를 점령하였다. 금진일대의 지형은 대부대가 작전을 전개하기에 불편하였고, 태재부에서 아직도 하루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군대는 그날로 배에 돌아갔고, 다음 날 태재부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20일 아침, 원나라군대는 상륙전을 전개하였다. 일부 원나라군대는 하카다항의 서부 백도원빈해일대로 상륙하였다. 전날 저녁에 이미 이 곳에 포진한 제1선지휘관 등원경자가 이끄는 5백명의 기병은 원나라군대가 상륙할 때 그 중간을 자르지 못하고, 원나라군대가 상륙을 마치고 부대진형을 정비한 후에야 일본당시의 회전관례에 따라 주공부대가 명적(鳴鏑)을 울리며 진공을 개시했다. 이런 전술은 중국 춘추시대 송양공의 판박이였다. 일본군은 한 명의 무사가 단기로 전투에 들어가고, 전면을 뚫으려했다. 그후 대대의 기병이 이어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다. 당시 일본사무라이기병부대가 가까이 올 때, 원나라군대는 북소리를 크게 내며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활과 대포가 크게 울렸다. 일본사무라이들은 원나라군대의 전술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하였고, 그저 놀라고만 있으며, 말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두 군대가 막 만나자, 일본사무라이군대는 사상자가 엄청났다. 백도원의 전장터에서는 일본군의 시신이 그득했고, 원나라군대는 금박 녹원까지 진격했다.

 

또 다른 원나라부대는 백도원서부의 적판(赤坂)으로 진공했다. 비후(肥後)의 무사인 국지이랑은 자기의 무사 130여기를 이끌고 원나라군대와 전투를 전개했다. 태재부의 소이인 등원경자가 이끄는 사무라이부대는 일족일문의 전투조직형식이었다. 돌아가면서 적판을 점령한 원나라군대와 사수전을 벌였다. 마침내 이 원나라군대는 녹원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화포는 전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나라군대가 철수할 때, 비후무사인 죽기계장은 자기의 친척 4기를 이끌고 원나라군대의 뒤를 추적하여는데, 화포에 부상당해 낙마하였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원나라와 일본의 전투이고, 죽기계장은 자기가 참전한 전투의 경험과 목도한 실황을 바탕으로 <<몽고습래회사>>를 그렸다. 이것은 원나라와 일본의 전쟁을 연구하는데 아주 생생한 사료가 된다. 그중의 한 폭의 왼쪽에는 막 불꽃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폭발하는 구형의 철화포를 그려놓았으니, 이 전투에서의 화포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태평기>>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북을 친 후에 병사들의 칼이 서로 맞부딪치고, 구형의 철포를 쏘아대며, 산언덕을 따라 내려오니, 형세가 차량바퀴와 같았고, 소리는 벽력과 같으며, 빛은 번개와 같았다. 한번에 두,세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으니, 일본병의 피해자가 여럿이고, 성위의 창고에 불이붙으면 원래 불을 꺼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녹원 및 조사 일대의 원나라군대는 계속 상륙하였고, 점령면적을 확대하였다. 일본 키타큐슈각지의 사무라이들, 예를 들어 이토송포당, 원전일족, 일전, 율미, 산전등이 이끄는 무사들이 전장터로 몰려왔다. 한

무리 한무리의 부대들이 돌아가면서 원나라군대와 싸웠다. 비록 사무라이군대의 인원수는 적지 않았지만, 한 부대로 놓고 보면 원나라군대에 비하여 수가 형편없이 적어서, 사상자가 아주 많이 발생하였다.

 

이때, 또 다른 원나라군대는 하카다항의 동쪽 상기(箱岐) 방향으로 상륙하였다. 해안의 송림을 점령하고, 배후에서 백도원의 원나라군대와 전투하던 일본사무라이를 공격하였다. 이 지역의 수군인 대우뇌태의 사무라이부대는 원나라군대의 협공을 버티지 못하고, 동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대우뇌태부대가 철군하면서, 백도원의 원나라군대와 싸우던 일본군은 앞뒤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었고, 할 수없이 태재부 수정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20일, 원나라군대는 일본군과 하루 종일 격렬한 전투를 치른 후에, 거의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하카다만의 상기등지를 원나라군대의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일본군은 할 수 없이 전군이 물러났다. 그러나, 원나라군대는 그들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철수하는 일본군을 계속 핍박하였다. 원나라군대의 좌부원수, 작전지휘관인 유복형은 작전을 쉽게 지휘하기 위하여, 높은 언덕에서 아래쪽으로 말을 몰며 전진하였다. 이 상황은 일본군의 전선지휘관인 등원경자에게 발각된다. 그는 즉시 말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서 그를 활로 쏘아 낙마시킨다. 원나라군대는 지휘관이 부상을 당하자, 진공의 기세는 약간 꺽이게 된다. 여기에 날씨가 어두워지면서 진격을 중지하게 된다. 이 때, 일본군은 막 원나라군대의 추격을 벗어나서, 급히 태재부의 수성으로 퇴각한다. 일본군이 퇴각한 후, 아직 도망치지 못한, 노인, 어린이, 부녀등 약 1500명은 포로로 잡힌다.

 

밤의 어둠이 내린 후, 전투는 기본적으로 중지되었다. 상처를 입은 좌부원수 유복형은 먼저 배에 올랐다. 원나라군대의 대원수 총사령관인 흔도는 나머지 장수들을 불러모아 다음 날의 군사행동에 대하여 논의한다. 하루의 전투를 겪은 후, 원나라군대는 일본사무라이의 완강하고 용감한 전투력에 대하여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한부대씩 참전하는 사무라이부대는 도대체 그 수가 얼마인지도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원나라군대보다 몇 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동시에 원나라군대는 비록 진지를 확보하였지만, 사상자가 적지 않았고, 병사들이 피로해하고, 화살도 거의 떨어졌으며, 부지휘관도 상처를 입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해온 원나라의 총사령관 흔도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전쟁쌍방의 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고려장군 김방경은 비교적 냉정했다. 그는 당시의 전쟁형세가 원나라군대에 유리한 것을 보고서, 결국 힘들지만 전투를 거쳐 태재부를 점령한 후, 진지를 지키면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김방경은 "우리 군대는 비록 적지만, 이미 적의 땅으로 들어왔고, 스스로 싸워야 한다. 맹명이 배를 불태우고, 회음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김방경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피로한 군사를 이끌고 적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되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생각해서 흔도는 전군을 배로 퇴각하도록 하고, 그 다음 날 돌아가려고 한다.

 

만일 원나라군대가 이렇게 돌아갔다면,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최소한 비긴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풍운은 예측할 수 없어서, 바로 흔도가 물러나기로 결정한 날의 하루 전날 밤에, 하카다만에는 흔치 않은 태풍폭우가 몰아닥쳤다. 일본군도는 사면이 바다로 쌓여 있어서, 동북부의 연안해안을 제외하고는 모두 열대태평양의 난류에 둘러쌓였고, 그래서 흑조의 영향을 받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면서 습한 해양성 계절풍기후를 형성하고 있다. 매년 8, 9, 10월이면, 일본서부와 남부는 자주 태풍의 내습을 받는다. 하카다만은 바로 태풍이 오는 길목이고, 마침 원나라군대가 귀국하려고 준비하는 마지막 순간에, 태풍이 도착했다.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바람에, 원나라군대가 하카다항구에 정박해두었던 함대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서로 부딪쳐 뒤집어지고, 큰 풍랑에 침몰되기도 한다. 태풍이 점차 멈추자 폭우가 또 내렸고, 하늘을 칠흑같이 어두었다. 바라도 떨어진 병졸들은 구할 방법도 없었다. 흔도는 일본군이 이 기회를 틈타 내습할 것을 두려워하여 비를 무릅쓰고 철군하여 귀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하여 원나라군대는 병졸이 13,500명이 사망한다. 일본사서에서는 "문영지역(文永之役)"이라고 부른다.

 

다음 날인 22일 아침, 일본군은 태재부수성에서 진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원나라군대가 진공하지 않았다. 정찰대원을 파견하여 알아보니 하카타바다에는 원나라 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나라군대가 철수한 것이다. 일본의 조야는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으로 원나라군대를 쫓아낸 것이 아주 기뻐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활동을 벌이고 이것을 "카미카제(神風)"이라고 불렀다. 이후 "카미카제"라는 말은 일본인들과 670년간을 계속했고, 1945년에까지 이르게 된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제1차군대를 파견할 때, 일본을 겁주어서 통호하려고만 생각한 것이지 일본을 점령하거나 멸말시킬 생각은 없었다. 흔도등 원나라 사령관은 쿠빌라이의 이러한 생각을 고려하여, 교묘하게 태풍을 만나 패퇴한 사정을 숨기고, '일본으로 들어가 그들을 패배시켰다"고 전적을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 쿠빌라이는 이를 믿고, 일본군이 원나라군의 공격하에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즉시 원나라와 통호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일본정벌에 나섰던 군사들에게 크게 상을 내리고, 동시에 예부시랑 두세충(杜世忠), 병부시랑 하문저(何文著)등에게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4월, 원나라의 사신 두세충 일행이 태재부를 돌아 장문실진(長門室津, 일본 혼슈의 야마쿠치현)으로 향했다. 순조롭게 관문을 통과해서 교토나 카마쿠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문의 수호는 원나라 사신인 두세충등을 태재부로 압송한다. 그 후 막부에 보고하였다. 북조시종(北條時宗)은 이 소식을 듣고, 원나라 사신을 카마쿠라로 압송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북조시종은 국서를 받지도 않고, 다른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원나라 사신 두세충 일행 30여명을 카마쿠라의 용구에서 참수하도록 하며, 4명의 고려관원들만 풀어준다.

 

이것이 원나라의 제1차 일본침입에 관한 내용이다. 5년후에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을 원정하나, 역시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