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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천안문 비밀 중건공사의 내막

by 중은우시 2006. 12. 22.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천안문(天安門) 성루는 병화전란으로 오랫동안 수리하지 못하여, 건축구조가 이미 많이 변형되었었다. 여기에 지하수를 너무 많이 뽑아올렸는데다가 성루 자신의 중량이 있어 건축주체부분은 이미 많이 침하되어 있었다. 해방후에 여러차례 조금씩 수리는 했지만, 철저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1969년의 하북형태지진이 6 내지 7.5급의 강렬한 지진이어서, 천안문성루의 변형과 손상이 더욱 심해졌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1969년말 국무원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천안문 성루를 철저히 해체한 후, 원 자리에 원래의 규격과 원래의 건축형식대로 다시 천안문성루를 중건하며, 건축재료는 전부 새 것으로 교체한다."

 

모택동지시: 원양부동, 척촌불변(原樣不動, 尺寸不變)

 

천안문성루의 구조는 복잡했고, 공사의 난이도가 컸다. 어떤 사람은 외국인에게 도급을 맡기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5년 내지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고, 가장 빠른 시일내에 마쳐도 2년이 걸린다고 했다.

 

주은래총리는 "우리는 외국을 숭배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중공중앙과 국무원은 총참모본부, 북경위수구, 북경시혁명위원회등 관련 기관이 참여한 "천안문성루중건영도소조"를 조직하였고, 이번 정치임미를 수행할 곳으로 북경제5건축공정공사(현, 북경건공집단오건공사)를 지정했다.

 

북경제오건축공정공사는 부대편제에 따라, 목공연대, 와공연대, 채유연대, 가자공연대와 혼합연대의 5개 시공대를 구성했다.

 

천안문성루는 길이 66미터, 넓이 37미터, 높이 32미터였다. 이런 거대한 건물을 모두 가리려면 '세기적인 수술'을 감행해야 했다.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쇠파이프로 작업하려면 1개월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공기가 짧았고, 임무가 중했으므로, 시공대는 여러 개의 삼나무를 묶고, 층층이 연결시키며, 갈대자리로 장막을 만드는 방식을 썼다. 재료를 들고 나가는 순환길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루가 꼭꼭 쌓여버렸다. 이 정도의 규모의 장막을 만들었으니, 아마도 세계최대의 텐트였을 것인데, 단지 8일의 시간을 소요했다.

 

당시 중국은 내우(문화대혁명)와 외환(중소관계악화)을 동시에 겪고 있었고, 이 중요한 정치임무를 완성하는 것은 의미가 컸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북경시민들이 모르게 했을 뿐아니라, 바로 지척에 있는 중산공원, 민족문화국의 업무인원들도 갈대자리로 둘러싼 천안문 안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모든 중건공사에 참가한 인원은 비밀을 지키도록 했다. 아무와도 말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인 임무였기 때문이다.

 

성루를 해체하기 전에 먼저 측량을 진행하였다. 측량후의 데이터가 직접 모주석에게 보고되었다. 모주석의 지시사항은 간단했다: 원양부동, 척촌불변(원래의 모습을 변경시키지 말고, 크기도 바꾸지 말라)

 

중건에 12근의 황금을 사용하다.

 

천안문성루는 바닥이 벽돌혼합구조인 이외에 전체 성루는 나무구조이다. 이번 중건에도 바닥을 그대로 둔 이외에는 전부 새로 만들었다. 천안문성루는 도대체 몇개의 나무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해체된 두(斗), 공(拱), 성(聲), 주(柱)는 서로 이빨이 맞추어져 있었고, 아래 위로 층층이 쌓였으며 서로 꽉 맞물려 있었다. 이런 방대한 나무구조물에서 단 하나의 못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런 복잡한 공정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었던가? 목공연대의 조장인 팔급목공 요래천도 도저히 알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크레인으로 먼저 성루 서남쪽의 전체 각을 들어올린 다음, 중산공원 수사(水사) 북쪽으로 옮겼고, 나무 1개를 해체할 때마다 옆에서 원래대로 복구를 한 다음에야 해체를 끝냈다. 그런세 원래 모습대로 복구하지를 못했다. 고건축전문가인 곽모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말했다. 해체한 성, 두, 공은 비록 순서가 맞아도 어떤 경우에는 방향이 틀렸다. 나중에는 해체한 후의 매 1개 나무를 모두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내, 외, 상, 하, 좌, 우를 다 분명히 한 다음 해체복원을 반복하여 원래대로 되고나서야 확실히 끝냈다.

 

천안문 성루는 60여개의 기둥이 있는데, 가장 두터운 것은 1.2미터이고 가장 작은 것이 0,.6미터이다. 매 기둥은 12미터 길이였고, 7톤이상의 무게였다. 15톤 트럭으로는 그저 1개의 기둥밖에 옮기지 못했다. 당시 해남도와 서쌍판납의 원시삼림에서 품질이 비교적 괜찮고 심지어 더 나은 원목을 발견했었다. 그러나, 운송이 문제였고, 기차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헬리콥터로는 매달아 올 수가 없었다. 결국은 많은 나무들은 가봉과 북보르네오섬에서 수입했다. 이 나무들은 홍목과 비슷해서 나무가 단단하고 색깔이 붉은 색이나 황색이었다. 불에도 붙지 않고 그저 연기만 날 뿐이었다. 여러해동안 목공일을 했던 요래천은 이전에 이렇게 좋은 나무는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국우원의 "건축재료는 모두 새 것으로 한다"는 지시에 따라, 해체된 나무들은 북경건축설계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북경광화목재창에서 원래 그림에 따라 가공을 했다. 새로 만든 모든 나무기둥과 나무부품은 통나무 목재를 사용하였고, 모든 나무는 방부, 방충, 방화처리를 거쳤다. 설치할 때 그중 2개의 나무기둥에 직경 약2센티미터의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재료를 바꾸려면 수백명이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총리에게 보고한 후 지시를 받아, 구멍을 5밀리미터의 구멍으로 확장하여 구멍을 연결시킨 후, 안에 방부제를 넣어서 막았다.

 

큰 나무들을 조립할 때도 난제가 있었다. 당시 중국의 크레인은 팔이 가장 긴 것이 25미터였는데, 앞부분을 들면, 뒷부분은 들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기울기"방식을 사용하여 두 대의 크레인으로 동시에 하나를 들어올려서 60여개의 기둥을 하나하나 기둥기석위에 세원호을 수 있었다.

 

지붕의 척추의 양끝을 막은 것은 원래 용이었다. 어떤 사람은 용은 사구(四舊, 문혁때 타파대상인 옛날 것 4가지)에 속하므로, 해바라기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주은래총리가 이 것을 들은 후, 용으로 그냥 쓰라고 한다. 용은 중화민족의 상징이고, 원래의 주체부분은 고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계속 우겨서 지붕위의 금룡합새(金龍合璽)도안은 서번련(西蕃蓮)도안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1984년에 다시 수리할 때 원래의 모양으로 바꾸었다). 당시의 부총리인 사부치는 나무구조물을 유리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또 주장했다. 주총리가 이를 들은 후에 "원래의 나무로 만들어라. 어떤 구조도 변경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서산장(西山墻)을 해체할 때, 한 노동자가 파 내려가는데 갑자기 금속음이 들렸다. 살짝 꺼내보니 원래 직경 9.5센티미터, 높이 45센티미터의 완전한 포탄이었다. 지휘부는 즉시 공안기관에 연락해서 흙을 전부 파내고 연구했다. 나중에 해체하면서 모두 6개의 크기가 똑같은 포탄이 더 발견되었다. 이 7개의 포탄은 계속 수수께끼였다. 당시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정치환경에서 이런 소식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현재 이 7개의 포탄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목공일이 끝나고, 유채유화를 하는데, 모든 용과 봉황을 그린 그림은 엄격한 1마5회13도의 공정순서를 지켰다. 마지막으로 금박을 입혔다. 중건한 성루에는 12근의 황금을 사용했다.

 

금속탐지기로 검수하다.

 

당시의 정치분위기에 따라, 공사가 끝난 후, 지휘부는 9인의 검사소조를 조직했다. 금속탐지기는 모든 도면순서에 따라 검사했다. 금속탐지기는 매우 민감했다. 아주 작은 쇠못도 놓치지 않았다. 한번은 하나의 두공을 검사하는데 탐지기가 울렸다. 색칠을 새로한 두공은 즉시 다시 해체되었고, 거기서 목공이 쓰는 편산이 나왔다. 누가 일부러 한 일인지, 아니면 무심코 실수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천안문중건공사는 1969년 12월 15일에 정식 착공하여, 1970년 3월 7일 준공하였고, 공기는 합계 112일이었다. 국무원의 검수를 거쳐 최종합격한 후 1970년 3월 11일 오후 3시, 주은래총리는 처음으로 천안문 성루에 올라가서 시찰했다. 그는 현장의 노동자들과 하나하나 악수를 했고, "동지들 수고했습니다. 내가 와서 봤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천안문성루건설을 이렇게 잘 해놓다니.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주은래총리는 동마도를 통하여 성루에 올랐고, 상세하게 공사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 후 서마도로 내려갔고, 지휘부의 간부들에게 모두 며칠 쉬게 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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