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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전족(纏足)의 기원

by 중은우시 2006. 12. 26.

전족은 중국고대의 일종의 누습이다. 즉, 여인의 두 발을 포백(布帛)으로 둘러싸서, 작고도 뾰족한 "삼촌금련(三寸金蓮)"으로 만드는 것이다. "삼촌금련"은 일찌기 중국고대에 여자에 대한 아름다움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고대 부녀들의 전족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왜 전족한 작은 발을 "금련"이라고 불리웠는지는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전족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수나라때부터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당나라때부터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오대(五代)부터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하(夏), 상(商)때의 우(禹)의 처, 달기도 전족한 발이었다고 한다. 여러 설이 난무하고, 통일된 학설이 없는 입장이다.

 

중국고대의 신화에서도 이에 대한 흔적이 발견된다. 전설에 의하면 대우(大禹)가 치수할 때 일찌기 도산씨의 딸을 후로 삼아서 아들 계를 얻었다. 도산씨의 딸은 여우가 변한 호리정(狐狸精)이었고, 발이 작았다고 한다. 또 은나라 말기의 주왕의 비인 달기도 여우가 변해서 된 호리정이었다고도 하고 꿩이 변한 치정(稚精)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발만은 사람으로 다 변하지 못하여 포백으로 감아싸두었다. 달기가 주왕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궁중의 여자들이 그녀의 발을 본떠서 포백으로 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민간의 전설이고 그저 옛날이야기적인 성분이 많고, 당시 여자들이 전족을 했었다는 증거로 삼기는 부족하다.

 

전족이 수나라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민간전설에서 연유한다. 전설에 의하면 수양제가 강도(양주)로 갔을 때, 100명의 미녀를 뽑아서 배를 끌게 했다. 오월랑(吳月娘)이라는 여자도 뽑혔는데, 그녀는 수양제의 폭정을 미워했다. 그래서 철장인인 부친으로 하여금 길이 3촌, 넓이 1촌의 연판소도(蓮瓣小刀)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긴 포로 칼을 발바닥아래에 감아서 숨겼다. 그러다보니 발을 가급적 작게 만들었고, 신발아래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러자 길을 걸을 때마다 연꽃이 아름답게 땅바닥에 나타났다. 수양제가 이 것을 보고는 매우 기뻐해서 그녀를 가까이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작을 발을 구경하려고 하였다. 오월랑은 천천히 발을 감은 포를 풀다가 돌연 연판소도를 꺼내어 수양제를 찔렀다. 수양제가 급히 피했으나 팔은 이미 칼에 찔렸다. 오월랑은 살해에 성공하지 못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이후 수양제는 명을 내려 이후 후궁을 뽑을 때, 여인이 아무리 예쁘더라도 발을 감은 여자는 다 탈락시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오월랑을 기념하기 위하여 발을 감기 시작했다. 이로써 여자의 전족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전족이 오대에 시작되었다는 설은 남당의 이후주의 비빈에서 비롯된다. 이후주는 비빈들이 춤을 추는데 사용할 높이 6척의 금련을 만들었고, 주보, 비단으로 장식을 한 다음 비빈들이 비단으로 발을 감고 발을 굽혀서 초승달모양으로 만들어서 양말을 신고 연화대위에서 춤을 추게 하였는데, 그 춤을 추는 동작이 아주 아름다웠다고 한다.

 

중국여인의 전족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문헌과 전설이 적지는 않다. 다른 것은 관두고 다른 사람의 글이 길고 냄새난다는 취지로 말할 때 "왕모낭낭의 발감았던 포"라는 말을 쓴다. 전설에 따르면 왕모낭낭은 황제(黃帝)때의 인물인데, 물론 그 때부터 전족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오래되었다는 표현일 뿐이다. 사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중국에서 전족의 풍속이 시작된 것은 개략 오대말년의 이후주시대이다.

 

당나라때, 사람들은 부녀의 궁혜(弓鞋)에 흥미를 느꼈다. 머리가 약간 솟아오른 궁혜는 처음에는 화장을 진하게 하고 몸이 풍만했던 당나라의 궁녀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엽기적인 것을 좋아하는 남자들의 감각에 자극을 주었던 모양이다. 남당통치자인 이욱은 이 궁혜를 길다란 포백으로 감기 시작했고, 이로써 양말을 대신했다. 남당은 단명한 왕조였지만, 두 가지를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나는 사(詞)이고, 다른 하나는 전족이다.

 

북송초에는 부녀덜의 전족이 아직 유행하지는 않았다. 송휘종 선화연간에 비로소 동경 변량(지금의 개봉)에 전족에 쓰는 전용 신발이 등장했고 이름은 "착도저(錯到底)"라 했다. 이 때부터 민간에 유행했다. 남송에 들어서 전족은 이미 수도 임안(항주)의 부녀들의 패션이 되었고, 이후 전국적인 전족의 풍속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속칭 "항주각(杭州脚)"이라고도 한다.

 

원나라를 건립한 몽고족의 전족풍습은 남송보다 훨씬 심했다. 가장 명확한 예는 원나라때의 잡극 산곡에서 사람을 묘사할 때 발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작은 발에 대하여 "삼촌금련"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에 들어서는 전족이 이미 일상화되었다. 전족은 사회지위, 귀천등급의 중요한 표지가 된다. 패션으로서 적지 않은 기녀들은 작은 발을 무기로 남자들을 끌었다. 전족한 여인은 당시 도시여성들이 서로 모방하는 대상이 된다.

 

청나라때, 부녀의 전족은 최고조에 달한다. 특히, 산서, 하북, 북경, 천진, 산동, 하남, 섬서, 감숙등지에서 가장 유행했다. 그 중 특히 산서가 가장 심했다. "종래로 전족이라고 하면 산서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산서에서도 대동(大同)이 가장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