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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남경"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7. 1. 30.

현재 중국의 도시중 이름에 "경(京)"자가 들어간 것은 두 곳 뿐이다: 하나는 북경이고 하나는 남경이다. "남경"의 의미는 아주 분명하다, 바로 "남쪽의 수도"라는 뜻이다. 그래서, 남경을 이야기 하자면, 남경의 수도로서의 역사부터 얘기해야 한다.

 

229년, 손권은 남경에서 동오(東吳)제국을 건립한다. 이것은 남경이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의 수도가 된 경우었다. 이후, 동진(東晋), 남조(南朝, 즉, 宋齊梁陳), 남당(南唐), 명(明), 태평천국(太平天國), 중화민국(中華民國)등이 각각 남경을 수도로 정했었다. 그 중에 동진은 남경이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정통(주류)왕조의 수도가 된 것이었다. 당시 북방의 호인들은 진나라 왕실의 내란을 틈타 수도 낙양으로 들어왔고, 서진은 멸망했다. 대량의 중원선비들은 남으로 내려와서 강회지역으로 왔다. 진나라 왕실도 남경으로 옮겨왔다. 역사상 '동진'이라고 부르는 왕조이다. 이후, 끊이지 않고, 송,제,양,진이 모두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 동오, 동진, 송, 제, 양, 진은 시간상 비교적 연속되었으므로 통칭하여 육조(六朝)라고 불리웠다. 남경은 이로 인하여 "육조고도(六朝古都)"라는 별칭을 얻었다. 육조는 400여년의 강성한 한나라의 문명을 승계하고, 당시 위기에 처해있던 한족을 구원했다. 남경을 중심으로 한 육조가 한족의 문명을 보전하지 않았더라면, 이후 당나라의 흥성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남경에는 할거정권이 들어섰다. 역사가 얘기하는 "남당"이다. 이후 북송이 멸망한 후 남쪽으로 이전한 송나라 황실이 잠시 남경을 수도로 삼은 적이 있었다. 이후 더욱 남쪽의 항주로 이전했다. 남경이 처음으로 전국적인 도성이 된 것은 명나라때이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물리쳤고, "호로를 축출하고 중화를 회복하자"는 위업을 달성했고, 근백년간 노예생활을 하던 한족을 구해냈다. 명초의 남경은 역사상 가장 휘황한 시기였다. 이것은 중국이 진나라로부터 청나라에 이르는 2천여년의 기간중에서 첫번째로 유일하게 남쪽에 수도를 정한 전국적인 통일왕조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십여년후, 연왕 주체가 찬위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그러나, 명나라의 멸망 때까지 남경은 계속 완전한 배도(陪都)로서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남경의 주변(강소, 상해, 안휘)은 남직예(南直隸)라고 불렀다.

 

명나라 이후, 중국은 다시 소수민족의 통치를 받았다. 청나라 말에, 십여년간 지속된 농민반란정권인 태평천국도 남경을 수도로 정했다. 이 농민반란의 발생과 멸망은 남경과 중국에서 가장 부유했던 강남지역에 파괴적인 타격을 주었다. 마침내 1912년, 중국인은 다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는 구호를 가지고 청나라를 전복시켰고, 중국의 2천년간의 제국시대를 끝냈다. 남경에는 중화민국이 건립되었다. 중화민국은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고, 남경은 근대중국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원세개의 정권탈취로 정치중심은 다시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북양정부시기이다. 1928년,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하였고, 수도는 다시 남경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은 남경의 역사상 두번째 가장 휘황한 시기였다. 민국의 "황금10년"이다. 마찬가지로 이 좋은 시절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일본의 침입으로 수도였던 남경은 함락되고 학살되었다. 이후 항전8년, 내전4년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북경에서 성립되고 천도하였다. 남경은 두번째로 전국적 수도의 시대가 끝가 것이다.

 

남경의 수도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남경의 수도역사에서 몇가지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남경의 수도역사는 연대가 걸치는 기간이 아주 길다. 진나라때부터 계산한다면, 남경은 중국의 고도중 수도로서의 연대가 가장 길게 걸치는 것중의 하나이다. 서안, 낙양의 수도로서의 역사는 송나라이전의 1천여간이었고, 북경의 수도로서의 역사는 송나라 이후의 1천년간이다. 유일하게 남경은 229년부터 1949년까지 수도로의 연대가 1720년에 걸치고, 지금으로부터 겨우 수십년전까지 중국의 수도였다.

 

둘째, 남경은 4대고도중 유일하게 전부 한족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이다.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의 북조), 에 서안을 수도로 정한 전조(흉노), 전진(저), 서위(선비), 북주(선비), 낙양을 수도로 정한 북위(선비)등은 모두 소수민족이 건립한 것이다. 북경에 수도를 정한 것은 명나라와 중화인민공화국외에 요(거란), 금(여진), 원(몽고), 청(만주)등 모두 소수민족들이다. 오직 남경에 수도를 정한 모든 정권은 전부 한족정권인 것이다. 이뿐아니라, 남경에 수도를 정한 동진,남조는 한족문명을 전승, 보존하였고, 남경에 수도를 정한 명, 민국은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부흥한 정권이었다. 남경은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민족의 성지로 칭해지고 있다.

 

셋째, 남경에 수도를 정한 왕조는 모두 단명했다. 아마도 두 가지 원인이 있는 듯하다. 하나는 남경에 수도를 정한 정권은 대다수가 남쪽으로 이전한 망명정권이었다. 그래서 그 자체로 실력이 부족했다. 다른 하나는 남경이 강남에 있어, 지리상 인구에서 우세를 점한 중원지구를 유효하게 통제하기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남경이 '단명수도'라면, 왜 그렇게 많은 왕조가 서로 이어서 남경을 수도로 정했는가? 이것은 남경의 왕기(王氣)와 관련된다. "금릉왕기(金陵王氣)"에 관한 설이다. 중국역사상 비교적 영향력이 큰 것이다. 이에 따르면, 진시황은 당시 남경의 왕기를 두려워하여 진회하를 파서 남경의 풍수를 파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과 손중산은 모두 남경의 형세를 높이 평가했다. 호거용반(虎踞龍蟠,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려있는 땅), 바로 제왕의 집이라는 것이다.

 

먼저 남경부근의 산맥을 살펴보면, 현재 비교적 공인되는 것은 곤륜-진령-대별산을 잇는 것이 중앙조산대(中央造山帶) 것이다. 이사광(李四光)은 "이것은 동앙아시아대륙에서 가장 단단한 산맥체계라고 한다. 이것은 동으로 바다를 넘어 일본과 한국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산용맥중의 중맥(천산-연산을 북맥이라고 하고, 남령을 남맥이라고 한다)이다. 곤륜산은 청장고원에 놓여 있고, 옛사람들은 '만산의 조종'이라고 불렀고, 숭고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곤륜산 아래의 청장고원의 뒤에 있는 것이 바로 진령이다. 이것도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남북분계선이 된다. 진령이 다시 동쪽으로 오면 거의 소실하게 되는데 이 곳이 남양분지이다. 이후 동남쪽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대별산이 된다. 대별산이 다시 동쪽으로 잘려서 소환의 사이의 강회구릉이 된다. 이 곳이 것으 남경의 강북지구이다. 즉, 남경은 곤륜의 산룡중 중맥을 잇는 끝부분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중국 4대고도중 2개(서안, 낙양)도 이 산룡중의 중맥에 있다. 이외에 남경은 동시에 중국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용맥 즉, 장강과 관련이 된다. 이 청장고원에서 출발하는 중국최대의 강은 수룡맥중의 중맥(황하는 북맥이고 주강은 남맥이다)이 된다. 이것은 '금릉왕기'라는 지리상의 해석이다. 남경은 중국의 산룡의 중맥과 수룡의 중맥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것은 남경이 지리상 중국의 핵심, 정통을 대표하는 도시가 될 수밖에 없게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풍수학상 산은 고귀함을 물은 재물을 가리킨다고 한다. 남경의 수맥인 장강이 천하제일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경의 산맥은 곤륜에서 시작하고 이 산맥은 중간에 동쪽으로 오면서 남경에 오면 거의 끊어질 듯 말듯 이어진다. 아마도 이것이 남경황조가 단명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왕기가 약한 역사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룡중 중맥이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것처럼 중국2천녕의 수도역사중 남경의 수도역사는 빛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다. 비록 연속되지는 않지만 기적적으로 2천년을 계속되어 왔다. 그리하여 '견강(堅强)한 은선(隱線)'이라고 볼 수 있다.

 

"견강한 은선"은 남경대학을 생각나게 한다. 민국시대 남경정부시기에는 국립중앙대학이 그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앙대학의 역사에 대하여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기도 했다. 즉, 258년 동오정권은 한나라의 태학을 모방하여 남경에 중앙최고학부를 설립했다. 동진, 남조를 거쳐 명나라의 국자감에 이르고 민국의 중앙대학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의 전승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태학"(역사상 국자학, 국자감으로 고쳐부르기도 했다)은 한나라때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중국역대의 최고학부이다. 현대대학과 태학은 연원관계를 얘기하는 것은 마치 자기가 황족후예라고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지금의 남경대학, 동남대학등 중앙대학의 후예들은 자주 이것을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오늘 날의 남경대학을 태학의 후신이라고 하는 것은 학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지리적인 이유로 인한 것이다. 남경이 수도였던 때에는 이런 학부가 최고학부인 태학, 국자감등이었다. 그러나 다른 시기에는 그저 이 학부는 부학(府學), 심지어 현학(縣學)에 불과했다. 그 지위도 태학과 비교할 수 없다. 중앙대학의 전신인 삼강사범학당은 전혀 최고학부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다. 삼강사범학당의 연원은 청나라때 강녕부학현과 같은 것이고 태학이 아니었다. 비록 이러하지만, 남경대학이 현재 중국에서 북경대학을 제외하고는 태학과 관계가 가장 가까운 대학인 것은 맞다. 동오, 동진, 남조, 명, 민국에서 지금까지 이것이 바로 '견강한 은선'이다.

 

오늘의 남경은 이미 '명선(明線)' 수도가 아니라. 그저 '은선'일 뿐이다. 강소성의 성회(省會, 성정부 소재지)이다. 21세기에 화동지구에서는 상해가 아무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도시이고, 남경의 지위는 암담해졌다. 강소성내부에서도 남경은 이단이다. 남경은 영진산맥의 서부에 있는데, 강소성의 다른 지역과는 떨어져 있다. 토질, 지형등도 모두 다른 강소성의 주요지구와 다르다. 현재, 일반적으로 남경도 장강삼각주 경제지구로 분류하고 있는데, 사실상 남경은 지리적으로 장강삼각주에 속하지 않는다. 지리적으로 장강삼각주는 장강의 충격으로 형성된 것인데, 남경은 대체로 암질지표를 가지고 있다. 만일 상해를 장강삼각주의 해상대문이라면, 남경은 장강삼각주의 복지대문이다. 장강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장강은 남경을 지날 때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진강, 양주를 지난 후에 남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래서, 남경, 진강, 양주일대의 장강은 장강이 청장고원에서 나온 후 가장 북쪽지역을 흐르게 되는 것이다. 남경은 사실상 중원복지와 장강삼각주도시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상해에서 북방으로 흐르는 물류, 인류는 상당한 량이 남경을 거치게 된다.

 

만일 장강삼각주에서 상해를 진취의 검이라면, 남경은 후중의 방패이다. 중요한 고도로서의 남경의 존재는 장강삼각주의 역사와 지리상에서 정통의 지위를 부여해준다. 중국현재의 삼대도시군중에서 발해만도시군, 장강삼각주도시군, 주강삼각주도시군이 있다. 발해만은 수도라는 요소로 인하여, 내부를 중시하고, 정치를 중시한다. 주강삼각주는 홍콩이라는 요소로 인하여, 외부를 중시하고, 경제를 중시한다. 그렀다면 남경과 상해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장강상각주는 내부,외부를 겸비하고, 고로와 신예를 겸비하며, 심후와 영교를 겸비하고, 남북의 중간에서 정치와 경제를 결합하여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