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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상주(常州)의 천고미성(千古謎城)

by 중은우시 2007. 1. 29.

엄성의 조감사진

 

 천하제일주(天下第一舟)

 

 

 

40여년전에 강소성 상주(常州)의 남쪽교외의 무진구(武進區) 엄성촌(淹城村)의 촌민이 진흙을 파다가, 의외의 보물을 발견했고, 이는 국내외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1986년에서 1991년까지, 중국의 고고학계는 엄성에 대하여 6년간의 발굴을 실시했고, 수천의 진귀한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엄성이 왜 "엄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떤 전설이 있는가? 엄성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려는 발걸음이 빨라졌고,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 해결되지 않은 이슈는 구름에 가리고 안개에 가려있다.

 

삼성삼하

 

상주의 남쪽에 있는 무진구의 호당진의 서쪽귀퉁이에 있는 "엄성고유적지"는 이 토지위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엄성은 안에서부터 바깥쪽으로 건축구도를 자성(子城), 자성하(子城河), 내성(內城), 내성하(內城河), 외성(外城)과 외성하(外城河)의 "삼성삼하(三城三河, 의 성, 세개의 호성하)"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의 고성 유적지에서 유일한 것이다. 만성유적지는 동서로 850미터, 남북으로 750미터이고, 전체면적이 65만평방미터이다. 엄성면적의 크기에 대하여는 <<맹자>>에 기재된 "삼리지성, 칠리지곽(三里之城, 七里之廓)"과 딱 들어맞는다. 자료에 의하면 엄성의 외성하의 둘레는 길이가 3000미터이고, 넓이가 50미터 내지 80미터이다. 내성하는 길이가 1500미터이고, 넓이는 50미터 내지  70미터이다. 자성하는 둘레가 500미터이고, 넓이가 30미터 내지 45미터이다. 호성하의 수심은 약 4미터이다.

 

엄성의 자성은 속칭 왕성(王城)이라고도 하고 나성(羅城)이라고도 한다. 정방형이고 둘레가 약 500미터이다. 내성은 이라성(里羅城)이라고도 부르며 역시 정방형이고 둘레가 약 1500미터이다. 외성은 외라성(外羅城)이라고도 부르며 타원형이며, 둘레가 2500미터이다. 이외에 하나의 외성곽이 있는데, 둘레가 약 3500미터이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엄성의 고성벽은 최고높이가 20미터이고, 성벽의 바닥두께는 25039미터이다. 모두 진흙으로 쌓아서 만들었다. 엄성의 가장 바깥쪽은 지금도 여전히 길지 않은 흙벽돌로 쌓여져 있다. 이것은 상주시정부가 거액을 들여서 새로 쌓은 것이다. 상주시 무진구박물관의 임지만 관장은 엄성에 대하여 20년을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초보적인 조사로 밝혀진 것은 엄성이 호성하를 파낸 흙으로 쌓았다는 것이다. 방법은 평지에 성을 쌓은 것이고, 한층한층 쌓아서 세단계의 계단형으로 쌓아올렸다. 수천년의 풍우를 거쳐, 지금 엄성고성유적지는 높이가 겨우 3 내지 5미터가 남았다. 성격의 넓이는 30내지 40미터이다.

 

천하제일주(天下第一舟)

 

엄성이 "묻혀서 잠들어 있은지" 수천년인데, 역사의 기록이 매우 적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여기서 출토된 내개의 이미 지하에 근 3천년을 묻혀 있던,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시대가 가장 빠르고 형태가 완전한 독목주(獨木舟)이다.

 

1935년, 위취현, 진지량등의 학자는 엄성에 대하여 고고학적 조사를 벌였다. 초보적으로 엄성은 고대 선주민이 활동했던 유적이라고 결론내렸다. 신중국성립이후, 다시 대량의 춘추시대의 진귀한 문물이 출토되었다.

 

1958년, 당시의 엄성촌 촌지서기 두포금이 이끈 촌민들은 호성하내의 물을 뽑아낸 후, 의외로 내성하에서 하나의 독목주와 일군의 청동기를 발굴했다. 모두 25건의 진귀한 문물이었다. 두포진은 "나는 당시 물안에서 비료로 쓸 것을 파낼려고 했다. 그런데, 물풀이 한 명을 휘감길래 뽑아내고나니 1의 독목주가 나왔다..." 이후 엄성의 내성하에서 그들은 3개의 독목주와 청동기, 도기등의 문물을 발굴했다. 4개의 독목주중에서 가장 긴 것은 11미터, 넓이 0.9미터이고, 두께는 0.3미터이고 깊이는 0.42미터이다. 탄소14로 측증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서주시대의 유물이고, 지금부터 2800년전의 것이다. 전체를 한 그루의 남목으로 깍아서 만들었고, 내벽에는 초탄(焦炭)과 도끼로 파낸 흔적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독목주는 불로 구운 이후에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역경>>에서 "과목위주(刳木爲舟)"라고 쓴 문자기재와 일치한다. 이 독목주는 "동방조선업의 비조" 또는 "천하제일주"라고 불리고 있다. 현재 중국국가역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엄성의 독목주 중에서 능형과 창미형의 두 가지 형태가 있으며, 모두 한그루의 남목, 저목 혹은 백목으로 깍아서 만들었다" 1940년대이전에 엄성의 삼성간에는 둑이 쌓여져 있지 않았다. 그 때는 삼성간의 교통은 독목주를 활용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의문을 가지는 것은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엄성은 전략적인 요충지인데, 민선만 갖추고 전선은 갖추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대제왕지도?

 

1986년 5월부터 1991년의 수년간, 중국의 고고학계에서는 엄성에서 6년간의 고고학적 발굴을 시행했다. 존, 삼륜반, 구금적등 청동기를 발굴하였다. 그리고 원시청자기와 기하문양도기등 네가지유형의 수천점의 춘추시대의 진귀한 문물을 발굴했다. 이로써 엄성의 역사적인 가치와 고고학적 가치는 분명해졌다.

 

고대에, 제왕의 수도만이 "삼하삼성"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엄성의 구조는 바로 삼성삼하이다. 설마 이것을 지은 사람이 고대의 제왕이란 말인가? 현재 엄성의 안팎에는 수선사백의 흙언덕이 쌓여 있다. 가장 큰 것은 "마반돈(磨盤墩)라고 부르는 것인데, 면적이 6만평방미터에 달한다. 작은 것도 수백평방미터에 달한다. 역사학자는 이것이 성의 방어와 관련있다고 본다. 1987년 11월 상순에서 12월말까지 고고학자는 그 중 하나인 간가돈을 발굴했고, 40여점의 정교한 도자기와 청자기를 발굴했고, 일부 뼈도 발굴했다. 이로써 이러한 흙돈대는 고대의 묘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외성의 바깥에는 "용천" "용담"이라는 곳이 있다. 현지의 노인에 의하면 1934년 가뭄때, 당시 천리의 수백개 하도가 이미 마르고 균열되었는데, 오직 엄성 내외 호성하의 물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맑았다는 것이다. 원인은 바로 이 "용천"에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곳에는 "용녀가 물을 가지고 놀고, 옥거북이 호성하를 만들었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현지에는 지금까지 "용천의 물은 동해에서 온다. 만년동안 마르지 않고 향기롭고 달다. 양안의 만물에 영양을 제공하고, 금적용녀와 백옥구이다" 여기에는 엄군의 딸인 백령공주가 배를 타던 곳이라고 한다. 엄성에서 발굴된 진귀한 문물에는 이외에 7개의 편종, 삼륜동반등 대량의 청동기도 있다. 이것은 주인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어떤 전문가는 엄성이 세 단계로 축성되었으며, 자성은 오국이 월나라의 인질을 가두기 위하여 쌓았다는 것이고, 내성은 한나라가 비릉현을 만들면서 만든 것이고, 외성은 수나라말의 심법흥이 왕으로 자처하며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86년에서 1991년에 남경박물관이 5차에 걸쳐 고고학적 발굴을 한 바에 의하면, 이 주장은 부정되었다. 전문가들은 엄성은 한꺼번에 흙을 쌓아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크고 작은 10여개의 해발 약 100미터가량의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는 200여개의 석실토돈묘가 있다. 이것은 마치 서주고묘와 비슷하다. 석실토돈은 산동엄인(奄人)장례풍습이다. 구멍을 파지 않고, 산꼭대기에 만들었다. 왜 흙을 쌓아서 묘를 만들고, 흙속에 묻는 것이 유행하던 태호유엯에 이런 석실토돈이 나타났는가? 혹시, 여기는 고대 엄군(奄君, 엄나라의 임금)의 도성이었는가?

 

천고미성

 

지금까지 엄성의 역사에 대하여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춘추시대 오나라가 만든 성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나라 말, 주나라 초에 당시의 엄나라 사람들이 북방에서 상주로 도망쳐온 후에 만든 도성이라는 것이며 지금으로부터 3000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것이다. <<월절서>>의 기재에 따르면, "비릉현의 남성은 고대 엄나라 군주의 땅이다"라는 말이 있다. 엄나라는 상나라 후기의 옛 나라의 이름이다. 지금의 산동 곡부의 옛성의 동쪽에 위치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엄나라임금은 주성왕때 상나라의 후예인 무경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주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엄나라임금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산동에서 강남으로 도망쳤고, 여기에서 흙을 쌓아 성을 만들고 역시 엄(奄)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엄성(淹城)"으로 바꿔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많은 학자들이 엄군(엄나라임금)설을 지지하고 있다. 엄나라가 멸망한 후, 엄나라의 일부분은 노나라의 노예가 되었고, 엄나라의 귀족과 일부분 백성은 생존을 위하여 남쪽의 회이(淮夷)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다시 수도를 만들고 정주했다. 엄나라 새 임금이 열심히 경영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고, 다시 회이와 서국과 연합하여 주나라에 반항했다. 이 때는 주성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노나라에 회의를 치게 하고, 왕이 친히 엄을 정벌하게 하는 결정을 내린다. 엄나라는 다시 멸망했다. 당시 엄나라의 지리적인 위치는, 북쪽은 노나라와 제나라가 있고, 동쪽은 회이가 있으며, 남쪽은 서국이 있었고, 서쪽은 바로 주성왕이 엄을 정벌하던 노선이었다. 엄나라의 유일한 활로는 서나라의 허가를 받아 그 땅을 지나 장강을 넘어 강남으로 가는 것이었다. 현재 강남에서 발견된 춘추이전의 고성유적중 엄과 관련이 있는 것은 엄성유적지뿐이다. 엄성에서 출토된 독목주의 연대도 엄나라가 남쪽으로 이동한 시기와 들어맞는다. 엄성의 토돈대묘에는 묘실이 있고, 묘실에는 적탄이 있고, 관등의 장례도구가 있는데, 이것은 선명한 중원문화의 특색이다. 그리고 고엄성의 성문은 서북으로 열려 있는데, 이것은 바로 엄나라의 옛 땅을 향한 것이고, 마치 권토중래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엄나라는 오(吳)멸망했는가? 의(宜)에 멸망했는가?

 

안문 교수는 엄성과 마주한 격호(鬲湖)도 만만찮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격"은 "격(隔)"과 같은 뜻이며 "헌(獻)"과 뜻이 통한다. 바로 서주인들이 주공에 멸망된 엄등 17국의 귀족포로를 부르는 말이다. 이것은 "은완(殷頑)"이라고도 한다. "격"은 낮춤말이다. 절대로 엄나라 사람이나 엄성의 주민들이 붙인 말은 아닐 것이다. 최초로 상주를 개발한 것은 바로 남쪽으로 이동한 고대 엄족이다. 국도는 바로 엄성이다. 엄나라 사람들의 활동은 무진구의 남쪽일 것이다. 남경박물관의 고증에 따르면, 엄성은 춘추시대 초기에 축성도었고, 춘추시대 말기에 무너졌다. 엄성 또는 엄국은 아마도 나중에 나타난 오나라에게 춘추말기에 점령당했을 것이다. 엄성의 사람들은 격호의 주위에서 노예가 되었다. 조상이 "은완"의 신분이었으므로 이 호는 후대 정통인사들에 의하여 "격호"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959년, 진강 단도현의 대항연돈산에서 의후시묘(宜侯矢墓)가 발견되었고, 서주 초기의 청동기가 발굴되었다. 그 중의 한 청동기에 "의후시"라는 명문 120글자가 발견되었다. 곽말약, 당란, 진몽가, 고길강등의 사람들은 명문을 고증한 후, 주나라 초기에 진강의 단도일대에 일찌기 주나라의 제후인 의국(宜國)이 있었다. 의후는 우후시(虞侯矢)가 이름을 고쳐서 작위를 받은 것이다. 그 때 주성왕이 동으로 엄을 치러갔는데, 엄은 장강을 넘었다. 단기간내에 주에 대하여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성왕은 쫓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남겨서 "의국"이라는 새 나라를 만들었다. 의국은 먼저 강북의 의정일대에 있었다. 나중에 장강을 넘어 단도로 천도한다. 그 목적은 남으로 도망친 엄족을 감시하는 것이었고, 철저하게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1981년, 진강시 박물관은 무진 내모산과 사정산의 묘실에 대하여 발굴하였는데, 엄국은 춘추중기에서 후기에 소멸되었고, 멸말시간과 지리적위치로 볼 때 엄국은 의국에 멸망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엄국이 도대체 오에 멸망하였는지, 의에 멸망하였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