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공무기(申公无忌)
청궁희(淸宮戱, 청나라궁중을 배경으로 한 희극)에 나오는 인물중에 범호정(范浩正)이 있는데, 인상이 아주 깊다. 그런데, 이 인물은 허구의 인물이고, 그의 원형은 바로 청나라초기의 명신 범문정이다. 어떤 사람은 범호정이 범문정과 홍승주 두 사람을 합하여 만들어냈다고도 한다. 어쨌든 저명한 청나라역사학자인 대일(戴逸) 선생은 그의 <<범문정대전>>에서 그를 "만청개국공신(滿淸開國公臣)"으로 칭했다. 그는 또한 중국역사에서 공인된 "십대모사(十大謀士)"중 한 명이다.
범문정은 호가 헌두(憲斗)이고 1597년(명나라 만력25년)에 태어났고, 1666년(청나라 강희5년)에 죽었다. 요녕 심양사람이다. 일찌기 청나라의 개국 4대군주를 모셨으니, 청태조 누르하지, 청태종 홍타이시, 청세조 순치제 푸린, 청성조 강희제 쉔예가 그들이다. 그는 청나라초기의 중신으로 문신의 우두머리였다. 범문정은 또한 한인이며, 대문호인 범중엄(范仲淹)의 후손이다. 청사고에서는 "송나라 관문전 대학사 고평공 순인의 17세손"이라고 적혀 있다. 범순인은 바로 범중엄의 둘째 아들이다. 현존하는 안산의 <<범부보서지파제18세지26세>>와 <<범부보서지파>>에 따르면 명확하게 범씨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고, 요동파의 이주과정과 가보의 제정과정경위가 나와 있다. 즉, 범문정은 중원한족의 명문가 후대인데도 후금의 만주인들이 천하를 얻는 것을 도와 준 것이다. 이로 인하여, 후세인들은 범문정에 대하여 질책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한간(漢奸)"이라고 하기도 하며, 그를 홍승주, 오삼계, 조대수와 함께 논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도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 씌웠다.
그런데, 범문정이 어떻게 하여 청나라에서 관리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청나라 역사서에는 명확히 기재하고 있지 않다. 그가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청나라에서 관직을 얻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청사고, 범문정전>>에는 "문정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영민하며 무게가 있었다. 그의 형과 함께 심양 현학의 학생이었다. 천명3년, 태조가 무순을 함락시키고, 문정형제는 함께 태조를 배알했다. 태조는 문정과 얘기해보고 그가 총의 증손인 것을 알고는 여러 패륵을 둘러보며, '이 사람은 명신의 후예이니, 잘 대해주어라'라고 말하였다"라고 한다. 즉 그들 두 형제는 누르하치를 배알한 것은 맞는데, 어떻게 배알하게 되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이후 강희, 옹정, 건륭제때의 글에서도 그냥 "공을 얻었다", "처음 공을 얻었다" "나라에 귀의했다" 혹은 "형을 데리고 귀의했다" "여러 생원들과 귀의했다", "장책을 들고 태조를 만났다"는 등으로 적고 있다. 그가 청나라에서 관직을 얻은 것은 이후 홍승주가 항복한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것이 청나라때의 관방자료에서 그에 관하여 일부러 미화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 의심이 드는 부분은 있다. 후금 천명3년 4월, 즉 1618년, 범문정은 나이 22세였다. 젊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가 무슨 재주로 명나라가 곧 망할 것이고, 청나라가 흥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겠는가. 그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누르하치에게 중용되고, '명신의 후예이니 잘 대해주어라'는 말을 들었겠는가? 당시의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한 보복심리가 강해서, 한족이라면 모두 낮게 취급할 때가 아니었는가? 당시의 누르하치 정책은 "한인을 주륙하고, 만주를 기른다"는 것이었다. 통상적인 한족에 대한 대우는 첫째가 죽이는 것, 둘째가 노예로 삼는 것이었다. 동시에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관리(특히 유생)에 대하여 아주 반감이 컸다. "온갖 나쁜 짓은 이런 자들이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청나라정책에 따르면, 범문정이 '중용'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사실상 범문정은 청태조 누르하치시절에는 거의 중용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사고>>의 기재에 의하면, "황상이 명나라를 토벌하며, 요양을 취하고, 삼차를 건너고 서평을 공격하며, 광녕을 무너뜨릴 때, 문정은 모두 그 행간(行間)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행간에 있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모사로써 따라다녔다는 뜻인가 아니면 시종이라는 뜻인가. 아마도 군대를 따라가며 싸우던 한인노예가 아니었을까?
야사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믿을만 한 것으로 보인다. 범문정은 명나라 만력43년(1615년) 심양생원이 된다. 당시 나이 18세였다. 다음해에 무순으로 장례를 치르러 간다. 그가 무순에 가 있을 때 마침 누르하치가 무순을 점령하고 약탈한다. "논공행상을 하여 얻은 사람과 가축 30만을 여러 군인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항복한 백성을 1천호로 편제했다"고 되어 있다. 범씨형제도 이때의 항복한 백성에 속해 있었었다. 범문정은 체격이 크고 건장했으므로, 누르하치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하여 그를 불러서 이것저것 물어보게 된다. 범문정은 총명하고 기민한 사람이었다. 그의 대답에 누르하치는 아마도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그의 형제를 상홍기(鑲紅旗)에 예속시켰다. 즉 노예였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범문정이 포로인 노예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개국공신까지 되었다고 말한다.
청태종시대가 되면서, <<청사고>>의 단어사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긴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불러서 좌우로 삼았다" 여기서 '좌우'는 심복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천명11년(1626년)에 누르하치가 병으로 죽는다. 그의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시가 즉위한다. 그는 누르하치의 경험을 교훈삼아, 역대제왕의 득실을 귀감으로 삼고, 이를 가지고 자신의 할 일을 정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족과 한족의 관계를 재정립하여, 민족간의 갈등을 완화시켰다. 그리하여, 홍타이시로서는 한족문화전통을 잘 알면서 계책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 점에 관하여는 청궁희에 모두 언급이 되어 있다. 홍타이시는 한족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드러냈다. 범문정은 이런 배경하에서 파격적으로 중용된 것이다. 천총3년(1629년) 4월, 홍타이시는 내각의 원형인 문관(文館)을 설치한다. 범문정은 이때부터 문관의 골간이 된다. 범문정은 이때부터 홍타이시의 심복으로 모사역할을 한다. 그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책략을 정비하고, 한족관리의 귀순을 얻기 위해 이를 쓰며, 조선으로 진공하고, 몽고를 다독거리며, 국가의 제도를 건설하는 등 중요한 문제에 모두 참여하게 된다.
청나라역사의 기재에 따르면, 홍타이시는 범문정을 아주 중시했고, 관계가 밀접했다고 한다. <<청사고. 범문정전>>에 따르면, "한번 들어가면 몇 시간을 얘기했고, 어떤 때는 식사나 휴식도 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다시 불려 들어가서 얘기했다" 군정대사를 만나면 홍타이시는 자주 "범장경이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매번 논의에서 결정을 못내리면, 그는 "왜 범장경과 상의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였다. 만일 신하가, "범문정이 이미 동의했습니다"라고 하면 홍타이시는 비로소 최종 결정을 내리곤 하였다. 한가지 일은 홍타이시와 범문정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범문정이 홍타이시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좋은 음식이 있었고, 아주 희귀한 것이었다. 범문정은 효자여서, 그는 부친이 아직 드셔보시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숫가락을 그 곳으로 가지 않았다. 홍타이시도 왜 그러는지 알았다. 그리하여 그 음식을 그의 부친에게 보내주라고 명하였다. 신임과 충성은 상대적인 것이다. 범문정이 총애를 받으니, 당연히 죽을 힘을 다하여 이에 보은한 것이다. 그는 반간계로 원숭환을 제거했고, 홍승주의 투항을 받아냈으며, 인재를 끌어모으고, 만주에 학문을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체제를 개혁하는 등의 측면에서 모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범문정이 없었다면, 나중에 만청270년의 중원천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범문정은 만청의 개국공신이다. 그의 공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뱃속에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인이고, 만청에 있어서는 출신이 미천한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항상 조심하고 주의했으며, 너무 공이 높아서 주군이 우려하게 되지 않도록 애썼고, 스스로 일신의 안전과 화를 피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모략을 써서 적을 대했고, 정치군사외교적인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아니라, 화를 방지하고, 내부의 칼끝도 교묘하게 피해갔다. 그의 일생은 자신의 지혜에 의지해서 자연스럽게 대응하여, 여러번의 화를 모면했다. 결국 그의 지위는 반석이 되었다. 범문정은 총명한 사람이다. 이 점에 대하여 정사, 야사에서 모두 인정한다. 그는 어렸을 때 사서오경을 잘 알았고, 문재가 출중했다. 11살때에는 <<소옥>>이라는 시를 지었다.
일문일창정(一門一窓靜)
무금무은빈(無金無銀貧)
소옥서생기(小屋書生氣)
안대충천시(安待沖天時)
문하나에 창하나로 조용하고,
금도 없고 은도 없으니 가난하다.
작은 집에 서생의 기운은
어찌 하늘로 뚫고 올라갈 때를 기다리는가.
범문정은 사람됨이 겸손하고 물러설 줄 알았으며, 자신의 공을 내세워 자랑하지 않았다. 이 점은, 만청의 권력투쟁에서 특히 잘 나타났다. 그의 일생은 시종 정치투쟁에서 초연한 지위에 있었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1643년 9월, 홍타이시가 병사하자, 만청귀족내부에서는 황제위를 다투는 내부투쟁이 일었고, 투쟁은 아주 첨예했다. 범문정은그러나 한가지 근본원칙을 지켰다. 시종 권력투쟁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홍타이시의 중요한 신하였고, 홍타이시의 동생인 도르곤의 질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순치3년(1646년) 2월, 도르곤은 '지금 국가의 각종 사무는 각각 전문부서가 있다"는 이유를 들고, 범문정이 "예로부터 병이 있고, 너무 과로했다"는 이유를 들어, 범문정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제한했다. 이에 대하여 범문정은 더욱 조심하고, 양보했다. 순치5년(1648년), 섭정왕 도르곤은 대권을 독점하고, 범문정에게 태조실록을 삭제하라고 명했다. 범문정은 이 일의 중대성을 깨달았다. 일단 정국이 바뀌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문을 걸어잠그고 나가지 않았다. 과연 도르곤이 죽은 후에 죄를 묻기 시작했다. 청사의 기재에 따르면, 범문정은 "당연히 연루되었지만, 황상은 범문정이 예친왕(도르곤)에 붙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관직만 박탈하고 속죄하게 했다. 그리고 한해가 지나서 복직시켰다" 그의 기지와 근신으로 평안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사건도 재미있다. 범문정이 일생동안 올린 주장(奏章)의 수량은 놀랄만한 정도이다. 특히 홍타이시의 집정기간동안 여러 중요한 주장은 범문정의 손을 거쳤다. 그러나, 그는 태종실록을 쓸 때, "초안을 모두 불태웠고, 실록사책에는 10개 중에 1개만 실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범문정은 생전에 그가 쓴 모든 문건의 초안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위험한 물건이었다. 사실상 역대위인의 작품은 상당수가 수하의 손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좋은 결말을 보지 못했다. 범문정은 거기에 숨은 이치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공을 내세워 오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의 방식은 말하지도 않고, 남기지도 않고,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것이었다.
순치11년(1654년) 8월, 순치제 푸린은 특별히 범문정을 소보 겸 태자태보에 임명한다. 이는 순치제가 범문정을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범문정은 성경에 있을 때 패륵들에 붙지 않고, 나중에는 예친왕에도 붙지 않았다. 모두 이를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 청나라역사의 기재에 따르면 푸린은 "정치에 성실하고, 여러차례 내원으로 갔다, 여러 대신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문정은 종종 우두머리로서 뜻을 받들어 회답했고, 모두 황상이 만족해 하게 하였다" 그러나, 범문정은 물러날 줄을 알았다. 그는 몸이 약하고 병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상소올렸다. 순치황제는 아주 따뜻하게 그를 만류했고, 결국 "임시로 임무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동의했다. 여기서 "임시로"라는 것에서 순치제는 그가 병이 나아지면 다시 쓸 것이라는 것을 표시했다. 순치제는 친히 그를 위하여 약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가를 보내어 화상을 그리게도 했고, 내부에 모셔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자주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범문정은 키가 컸으므로 의관을 특별제작해야 했다. 이점에 대하는 <<청사고. 범문정전>>에도 기록이 있다: "문정이 아팠다, 황상은 친히 약을 만들어 내렸다. 화공을 보내어 그의 상을 그리게 하고 내부에 보관하였다. 어용의복등을 내렸는데 모두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문정의 몸매가 커서, 특별히 의관을 제작하게 하고 그의 몸을 재게 했다"
그러나, 범문정은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정치의 흉험함을 그는 가슴깊이 알고 있었다. 물러날 것을 청한 후, 그는 무엇을 했는가? 친구들과 꽃과 나무를 심고, 시사를 지으며, 학생을 가르�다. 정치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만년을 보냈다.
1666년(강희5년) 8월 경술, 자칭 "대명골대청육(大明骨大淸肉, 대명의 뼈, 대청의 살)"이라던 일대모신 범문정이 죽었다. 향년 70세이다. 강희제는 친히 글을 지었고, 회유현의 홍라산에 묻었다. 그리고 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이후 강희제는 친필로 "원보고풍(元輔高風)"이라는 글을 써서 주었고, 이는 범씨사당의 편액으로 걸려 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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