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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숭정제)

숭정제(崇政帝) : 체면을 목숨이나 나라보다 중시했던 망국지군(亡國之君)

by 중은우시 2006. 11. 21.

1627년, 평생 목수일을 하면서 놀았던 명희종(明熹宗)이 죽음을 며칠 앞두고, 다섯째 동생 주유검(朱由儉)을 불렀다. "다섯째 동생은 요순처럼 될 수 있을 거다". 그는 내우외환에 휩싸인 국가를 열입골살 된 동생에게 맡기고 세상을 떴다.

 

주유검이 바로 망국지군같이 같지 않은 망국지군이고, 조정과 나라를 위하여 십여년을 분투했던 숭정황제이다. 숭정황제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숭정제의 조정업무에 대한 근면함과 생활에 있어서의 검박함은 중국수천년의 황제역사상 보기드문 것이다. 역사서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종합하면 이렇다. "그는 재위17년강 계속하여 근면하게 정사를 처리했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잠이 들지 않았다. 왕왕 너무 일을 많이 하여 병이 나기도 하였다. 근검절약하였으며 스스로 규율있게 행동했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궁전내에 연회나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역사서에 숭정제의 이러한 점에 대하여 여러가지 기록이 있지만 그 중의 세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숭정제는 궁중에 보관해오던 요녕산삼을 시장에 내다팔아서 수만냥의 은자로 바꿔 국고에 보탰다. 둘째, 어느날 강관이 숭정제에게 강연을 하는데, 내의의 소매가 닳아서 찢어져 있었고,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다. 황제는 계속 이를 감추기 위해서 옷 안으로 밀어넣었다. 셋째, 숭정15년 7월 9일, 몸이 좋지 않아 아침 조회를 조금 늦게 하겠다고 통보했다. 내각보신이 이를 비판하자, 숭정제는 한편 감격하고 한편 부끄러워 하면 친히 붓을 들어 보신을 칭찬하고 스스로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반성했다.

 

그러나, 숭정제는 성격상 단점도 명확하며 강렬했다. 자기주장이 강하며, 체면이 깎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성격이 조급하고 의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숭정제의 재위기간동안 내각보신은 주마등처럼 갈아치워서 50명에 이르렀다. 병부상서는 14명이나 바뀌어서 안정적인 내각이 구성될 수 없었다. 죽인 대신도 부지기수이다. 총독이 7명, 순무가 11명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어도 체면만은 잃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그의 성격은 세가지로 나타나는데, 남천, 후금과의 의화, 원숭환살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세가지는 바로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명나라의 멸망과 그의 자결을 가져오게 된다.

 

첫째, 남천(南遷)

 

숭정17년 3월 15일, 이자성의 대순군대가 북경을 향해 밀려오고, 거용관을 지키던 명나라 총병 당통이 투항했다. 이자성의 농민군은 직접 북경성을 포위하는 형국이 되었다. 숭정제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남천(南遷, 남으로 이동)을 모색한다. 원래 남천과 같은 일은 황제본인의 생명에 관계되므로 스스로 결정하면 끝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숭정제는 죽어도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남천은 바로 도망치는 것이고 조종의 종묘와 사직을 돌보지 않는 것이 되어 후세의 비웃음을 받을 것을 겁냈다. 그의 본 뜻은 신하들이 남천을 간청하면, 그는 두세번 사양하다가, 최종적으로 남천의 건의를 받아 체면을 살리면서 북경성을 떠나는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런 뜻을 직접 신하들에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신하들은 그 눈치를 채지 못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천을 반대했다. 황제는 북경을 지키고 태자로 하여금 남경에서 감국(監國)을 하도록 주장했다.

 

3월 17일 아침, 북경은 이미 이자성의 맹공에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문무백관회의를 소집했는데, 신하들은 서로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뿐 속수무책이었다. 눈물만 흘리고 있는 신하들을 보면서 탁자위에 "문신들은 하나하나 다 죽일 놈들이다"라고 쓴 후, 뒤에 있는 사례감 태감에게 보여준후 지워버렸다. 이것은 문신들이 그의 남천에 반대했던 것에 대한 느낌일 것이다. 숭정제는 체면을 따져 남천하지 않았고, 이로써 명나라 말기의 명나라, 이자성의 농민군, 후금세력의 삼각구도가 조기에 붕괴되어 버린다. 원래 명나라가 강남으로 옮겨갔다면 적어도 삼분구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나, 숭정제가 스스로 망하고, 태자도 죽으며, 역량이 분산되면서 내부의 갈등이 나타나서 남명왕조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둘째, 후금과의 의화(議和)

 

남송의 악비와 진회사건으로 인하여 이후의 황조에서는 북방오랑캐와 의화(議和, 평화공존협약, 하사품을 내리고 상호불가침협정을 맺는 것)는 매국으로 간주되었다. 숭정14년말에 홍승주가 송산을 겨우 지키고, 송산과 금주의 상황이 날로 악화되었다. 숭정제는 병부상서 진신갑(陳新甲)의 건의를 받아 후금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몰래 화의를 논의한다. 그러나, 이 일이 어떻게 바깥으로 새어버렸고, 신하들의 여론이 분분했다. 체면을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숭정제는 자기의 결백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모든 책임을 진신갑에게 미루었고, 그가 비밀리에 화의를 주도했다는 죄명을 씌워 진신갑을 죽여버린다. 원래 청태종과 맺었던 우호정전협정은 이로써 무산된다. 이로써, 명나라가 양쪽의 전선에서 모두 적을 대응해야 하는 국면을 종식시킬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다. 이후 계속하여 명나라는 양외(壤外, 청나라와의 싸움)와 안내(安內, 이자성등 농민군과의 싸움)의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하다가 결국 피로가 누적되어 멸망하고 만다.

 

셋째, 원숭환원안(袁崇煥寃案)

 

숭정제가 왜 원숭환을 죽였는지는 계속 수수께끼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숭환의 과실과 잘못을 드러내어 이를 해석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납득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숭정제의 심리문제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숭정제의 체면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고 본다. 원래 원숭환은 5년내에 요동을 평정하겠다고 숭정제에 큰 소리쳤으나 이루지 못한 바 있었고, 모문룡을 임의로 죽여버린 적도 있으며, 동림당과 관계가 가까웠고, 후금과 의화를 진행하였다.

 

모문룡과 같은 장수를 죽이면서 숭정제에 사전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숭정제의 체면을 크게 상하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물론 숭정제의 묵인하에서이지만 후금과 의화를 진행하였는데, 청태종이 북경을 포위했다 물러나면서 이 일을 공개해버리자, 숭정제가 화의를 진행한 것이 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런 몇가지 측면들이 결합되어 숭정제는 자기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원숭환을 죽이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러나, 원숭환의 죽음은 변방에 있는 명나라 군대에 아주 나쁜 악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여버리는데, 명나라에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상당한 사람들이 청에 망명하게 된다.

 

숭정제도 마지막으로 자살하기 전에, 오삼계가 산해관에서 떠나 15일이 되도록 북경에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당년에 원숭환이 영원에서 이틀만에 삼백여리를 달려와 청태종의 포위를 풀어준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