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인도와의 국경선은 그 길이가 2000킬로미터에 달한다. 동, 중, 서의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양국간의 국경분쟁이 있는 곳은 면적이 약125,000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그 중 동부지역에 약 90,000평방킬로미터, 중부지역이 약2100평방킬로미터, 서부지역이 약 33,000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이중 동부, 중부지역은 현재 인도가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고, 서부지역은 중국이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다. 이중에서 양국간의 이견이 가장 큰 곳은 동부지역이다. 이 지역때문에 중국과 인도는 1962년 전쟁까지 치른 바 있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문제는 역사가 남긴 유물이다. 티벳의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영국은 계속 싸워왔다. 일찌기 1774년 동인도공사는 티벳에 사람을 파견하여 티벳을 영유하고자 하였고, 1888년에는 영국이 '융투잔전투'를 개시하여 티벳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1892년 해가지지 않는 제국 영국에 맞설수 없었던 청제국은 카라코룸산에 '중국영토는 여기부터임'이라는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이미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영국의 욕심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영국육군소장인 존 아르다는 영국외교부와 인도사무부에 문건과 지도를 보내는데, 임의로 중국인도국경선을 중국의 곤륜산으로 그은 지도였다. 이 "아르다 판도'에는 악사친 지역, 예얼창지역, 카라그스하계상류지역등이 모두 인도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물론, 이 아르다 판도는 청나라정부가 거절하고, 동인도총독도 거절한다.
이후 영국은 1903년 제2차 티벳침략전쟁을 일으키고 1904년 8월 3일 라싸를 점령한다. 그리고는 청나라 주티벳대신을 핍박하여 "인도-티벳조약"을 체결한다. 청나라 정부는 이 조약의 내용을 알고 주티벳대신에게 서명을 거부하도록 요구하고, 영국정부에 교섭과 항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 이후 티벳은 사실상 영국의 관할범위에 속하게 된다.
1914년 중국정부는 런던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티벳문제의 해결을 요구한다. 당시는 이미 영국이 티벳을 완전하고 유효하게 점령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티벳문제회의"를 개최하는 것을 동의하는 동시에 티벳정부에서도 인원을 파견한다. 회의장소는 인도의 시무라였다. 이것이 소위 중.영.티벳의 "시무라회의"이다. 회의상에서 영국측 대표인 헨리 맥마흔이 지도에 선을 그었는데, 그것이 바로 맥마흔 라인이다. 이 선에 의하면 현재 동부지역에서 문제되고 있는 9만평방킬로미터의 땅이 인도로 넘어가는 것이다. 당시 영국협상대표인 진이범은 중앙정부의 동의없이 이 조약의 초안에 서명한다. 이 맥마흔 라인을 두고, 이때의 조약이 서명되었는지, 합법적인지등에 관하여 중국과 인도는 계속 싸우게 된다.
1947년 8월 14일 인도는 영국식민통치에서 벗어나면서 독립후의 네루정권은 영국식민정권의 유산을 승계한다. 영국의주라싸대표기구는 인도의 주라싸대표기구로 바뀐다. 1955년 중국정부가 티벳에 진군하면서, 인도정부는 중국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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