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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영화

중국의 대작영화는 고의적인 현실도피인가?

by 중은우시 2006. 12. 28.

작자: 장입범(章立凡)

 

올해들어 천카이거(陳凱歌)의 <<무극>>은 패러디를 당하고, 장이모(張藝謀)의 새작품 <<만성진대황금갑(滿城盡帶黃金甲)>>은 북경네티즌들에 의하여 10대 쓰레기작품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악평이 쏟아지는 것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삼척두께의 얼음은 하루 아침의 추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중국관중들의 "대작피로감"은 이미 더 이상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주제: 현재는 없다. 미래도 없다. 그저 과거만 있을 뿐이다.

 

위에 예로 든 두 감독의 대표적인 작품의 제목을 한번 알아보자.

 

천카이거: 황토지, 대열병, 해자왕 (1980년대); 변주변창(1991), 패왕별희, 형가자진왕(1990년대), 무극(2000년대초)

 

장이모: 붉은수수밭, 국두(1980년대), 홍등, 추국타관사, 활착, 요아요요도외포교, 일개도부능소, 나의부친모친(1990년대), 영웅, 십면매복, 천리주단기, 만성진대황금갑(2000년대초)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두 감독의 작품제목은 점점 더 현실생활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역사의 재해석이나 무협 마법 환상등의 주제로 바뀌었다. 비록 천카이거가 좀 더 일찍 바뀌었지만(1999), 장예모는 더욱 명확하게 바뀌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또 다른 공통된 특징이 있다. 과학논픽션이나 미래는 전혀 소재로 삼지 않으면서, 창작의 상상력은 모두 고대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중국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인물이 21세기에 들면서 왜 눈길을 허황한 과거로 돌리고 현실을 회피하며, 감히 미래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일까? 이것은 중국영화창작의 현실환경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용: 그저 허구만 있다. 진실은 없다. 사상도 없다.

 

우리 다시 이 두 감독의 최근 작품의 내용을 분석해보자.

 

하나의 재미있는 현상은 두 감독은 기원전에 살았던 자객 형가(荊軻)를 너무 좋아한다. 그들은 궁중이 되든 무협이 되든 모두 이 인물로부터 시작을 한다. 만일 천카이거의 <<형가자진왕(형가가 진왕을 찌르다)>>(1999)을 역사편이라고 본다면, 장예모의 <<영웅>>(2002)은 순전한 상업 무협영화이다. 천카이거는 역사영화의 노선을 따라서 흥행에서 참패했지만, 장이모는 무협영화의 노선을 따라서 역사를 해석하고, 허구로 많은 애정갈등을 만들고 여기에 현란한 쿵후동작을 집어넣어서 흥행헤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상은 없어졌다.

 

이후 천카이거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2002년에 <<너와 함께>>, <<따뜻한 살수>>등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보았고, 장이모도 <<천리주단기>>(2005)등을 찍기는 했지만 이것들은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대작"은 아니다. 최근들어, 두 사람의 시선은 모두 흥행가치가 풍부한 무협, 궁중소재의 상업영화로 돌렸다. 장이모는 연속으로 <<십면매복>>(2004), <<만성진대황금갑>>(2006)을, 천카이거는 금년에 <<무극>>을 내놓았다.

 

무협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은 영원히 어긋나는 것이다. 무궁무진한 오해가 생기고 원한을 서로 갚고, 죽고 죽이는 결투가 벌어지는 것이다.

 

궁중영화는 현실사회의 왜곡된 거울이다. 자주 관료사회에서 살아남기의 비급으로 불리운다. 각종 권모술수를 가르치고, 권력 성 재물에 대한 무한한 갈망을 만족시키는...

 

<<무극>>, <<십면매복>>, <<만성진대황금갑>>(만성진대황금갑은 조우가 쓴 <<뇌우>>의 고대극이다)의 이야기가 발생한 연대는 완전히 허구이다. 이것은 예술에서 허용되는 것이다.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시사점을 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진실한 생활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봉건주의를 얘기할 수도 있고, 고의로 현실을 도피할 수도 있다. 강대한 스타들의 진용을 갖추고 호화스러운 도구와 복장을 하고 장대한 기세와 화면을 가지고, 금과 옥으로 장식하는 것으로 사상의 결핍을 숨길 수는 없다.

 

형식: 시각이 있을 뿐이다. 동작이 있을 뿐이다. 특수기술이 있을 뿐이다.

 

영화는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 영화창작은 예술과 기술의 고도의 결합이다. 최근의 디지탈기술의 발전은 과학논픽션, 무협, 동작등의 유형의 영화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었다. 그러나, 영화인에게 있어서 기술은 예술창작의 보조수단이 되어야 한다. "영화예술가"라고 불리려면, 먼저 독립된 사상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지, 기술만 가지고 밥을 먹는 장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천카이거의 <<무극>>, 장예모의 <<십면매복>>, <<만성진대황금갑>>(그리고 풍소강의 <<야연>>)에서 고의로 만들어낸 시각효과 아주 호화스럽게 만드는데 능하다. 줄을 매달고 날아다니는 쿵후연기는 눈을 어지럽힌다. 디지탈로 만들어낸 환상의 공간은 사람의 마음을 자극시킨다. 연말파티처럼 거대한 장면은 관중을 감탄하게 한다. 휘황한 복장속의 반라의 젖가슴은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영화관을 나서면, 마치 그저 볼 수만 있고, 먹을 수는 없는 황금연회에 갔다 온 것같다.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특수기술과 편집 및 시각충격을 제외하면 관중에게 아무런 사상적인 측면에서 남겨주는 것이 없다. 심지어 고전적인 대사마저도 한 마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말들은 천카이거가 호과의 패러디에 대한 반격에서 한 말뿐이다. "사람의 후안무치가 이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

 

필자는 중국영화의 그저 보통관중에 불과하다. 아마도 영화미학을 논할 자격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뜨고 화려한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느라 심각한 내재적인 아름다움을 놓쳐버리는 것이, 21세기 중국영화의 공헌이란 말인가?

 

목표: 그저 상업이고, 그저 오락이고, 그저 대상이다.

 

우리는 상업이익에 대하여 뭐라고 할 필요는 없다. 어떤 대작도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하고, 흥행을 통하여 풍성한 이익회수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감독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요구해서도 안된다. 척박한 토양에서는 아름다운 예술문화가 꽃필 수 없다.

 

현실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중국진보영화의 일종의 전통이었다. 1940년대에 <<팔천리길의 구름과 달>>(사동산)과 <<일강춘수향동류>>(채초생)는 지금까지도 경전적인 작품으로 얘기된다. 후자는 흥행도 서양영화를 눌렀었다. 1980년대에 <<목마인>>과 <<부용진>>(사진)은 마찬가지로 높은 흥행기록을 남겼다. 천카이거의 성공작인 <<황토지>>와 장이모의 <<추국타관사>>, <<일개도부능소>>등도 이런 전통을 승계했다. 그리고 관중과 국내외 영화계의 호평을 받았으며, 흥행도 나쁘지 않았고, 상도 많이 받았다.

 

주제의 다양성과 창장품격의 변환은 예술발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온 이래, 왜 두 감독의 작품은 사회현실에서부터 허무맹랑한 고대로 가버렸는가. 심지어 근대를 소재로 한 작품도 찾아보기 힘든가? 반성해야 할 것은 현재 중국영화계의 생태이다.

 

금년의 영화 "백화상"은 전국관중을 대표하는 99명의 심사위원에 의하여 "최고작품상"을 심사했고, 이미 밝혀졌다. "주선율"을 지켜야 중국영화의 지존자리에 오를 수 있다.

 

<<제일재경일보>>가 보도한 숫자에 따르면, 2005년 중국국산영화는 모두 260편을 찍었고, 영화관에 들어간 것은 100여편이다. 이외에 100여편은 행방불명이다. 중국국산영화가 어려운 것은 중국국산 드라마와 서로 비교해볼 수 있다. 2006년 11월 천룡망에서 전재한 한 글에 의하면 중국 국산드라마의 연간 생산량은 이미 12,247집에 달한다. 작년에 42.7%의 연속극 드라마가 찍은 후에 방영되지 못했다. 금년 하반기의 CCTV드라마부는 이미 700집의 드라마를 취소했다.

 

영화드라마의 방영율이 낮은 것은 매년 거대한 자금과 자원의 낭비이다.  "주선율"을 따르거나, 국민오락작품이거나, 다른 엄숙한 주제의 작품들이 시장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자본은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남은 것은 대중오락적인 작품이나 역사개작등의 작품이다. 근년들어 무협영화, 궁중영화, 청춘우상영화들이 남발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제시장에 진출하기 위하여 많은 작품들은 서방사람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하여 중국문화에 대하여 오해하도록 만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몽매(변발, 전족), 성억압, 성왜곡(난륜, 환관), 폭력(쿵후, 혹형)등등...이런 것들이 중국문화를 대표한단 말인가?

 

현실은 가혹하다. 중국영화의 생태환경과 영화제작의 고투자는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바라만 보고 감히 시도하지 못하게 한다. 감독들은 자기의 욕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체제와 자본의 앞에서는 예술은 그 고귀한 머리를 숙일 수바에 없다. 당연히 어떤 규칙도 예외는 있다. 영호의 저투자영화 <<미친 돌맹이>>는 현실에 부딛쳤고, 성공을 거두었다.

 

만일 영화인들이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즉, 체제와 자본 앞에서 무력하다고 한다면, 상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신의 선택일 것이다. 무슨 공리를 얘기할 것도 없고,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다고 말할 것도 없다. 영화는 "dream works(꿈의 공장)"이다. 영화인들도 자기의 꿈이 있다. 국제영화제의 대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꿈을 꾼다고 하여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년 "오스카상"을 노리지만, 매년 실패하고 돌아오는 것은 일종의 풍자가 아닐 수 없다. 더욱 추구하는 것은 더욱 얻기 힘들다. 반대로 자아를 상실하면 얻었다고 하여 또 어쩔 것인가?

 

생활이 없는 예술은 허위이다. 화려한 외관을 추구하는 예술은 속된 것이다. 신호화사치주의에 빠진 중국영화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