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에서 기록되어 있는 정치상의 "육군자"는 모두 여섯번 있었다.
첫째, 남송 영종때, 우승상 조여우(趙汝愚)가 귀족들의 모함을 받아 쫓겨났다. 이때 태학생이던 양굉중(楊宏中), 주단조(周端朝), 장도(張道), 임중린(林仲麟), 장부(蔣傅), 서범(徐範)의 여섯 사람이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다투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5백리밖으로 충군(充軍)당했다. 이것이 역사서에서 첫번째로 나타나는 "육군자"이다.
둘째, 남송 이종때, 정대전(丁大全)이 권력을 농단하자, 태학생 유불(劉黻), 진의중(陳宜中), 황용(黃鏞), 임칙조(林則祖), 증유(曾唯), 진종(陳宗)등이 상소를 올려 정대전의 죄악을 드러냈다. 당시에 이들을 "육군자"라고 칭하였다.
셋째, 명 희종때, 위충현(魏忠賢)의 엄당이 정군을 장악하자 어사인 양련(楊漣)등 70여명이 위충현을 탄핵했다. 그 중 양련, 좌광두(左光斗), 위대중(魏大中), 주조서(周朝瑞), 원화중(袁化中), 고대장(顧大章)등 여섯 명이 옥에서 억울하게 죽었다. 세상사람들은 이들을 "전육군자(前六君子)"라고 불렀다.
넷째, 명 천계 6년, 위충현은 사건을 만들어 많은 사람등 체포했다. 고반룡(高攀龍)은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주기원(周起元), 무창기(繆昌期), 황준소(黃遵素), 주순창(周順昌), 이응승(李應昇), 주종건(周宗建)등은 체포되어 옥사했다. 주기원등 6명을 "후육군자(後六君子)"라고 불렀다.
다섯째, 광서24년(1898년),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등의 유신파는 광서황제로 하여금 신정(新政)을 펼치게 하였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유신파인 임욱(林旭), 양예(楊銳), 담사동(譚嗣同), 강광인(康廣仁), 유광제(劉光第), 양심수(楊沈秀)등 여섯명은 살해당하였다. 이들은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라고 부른다.
여섯째, 1915년 원세개가 복벽하여 황제에 올랐을 때, 양도(楊度), 손육군(孫毓筠), 엄복(嚴復), 유사배(劉師培), 이섭화(李燮和), 호영(胡瑛)의 여섯명으로 하여금 주안회(籌安會)를 구성해서, 황제제도를 널리 퍼뜨리는 일을 맡겼다. 당시에 이들은 "주안회육군자(籌安會六君子)"라고 불렀다.
역사상의 이 여섯번의 "육군자"는 앞의 다섯 번은 간신에 대항하거나, 개혁을 추진하려는 충정지사들이며, 유일하게 여섯번째만이 역사의 조류를 역행하여 일어났고, 앞의 다섯번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다섯번째와 여섯번째는 모두 원세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 씁쓸한 점이다. 즉, 원세개는 무술육군자를 배신하고, 영록, 서태후의 편에 붙었고, 이로써 관운이 틔이게 되었고, 원세개는 또한 주안회육군자의 감독으로 그들을 내보내서 스스로에게 황포를 입히게 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이로써 스스로 패가망신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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