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의 태상황(太上皇)

중은우시 2006. 11. 6. 19:36

태상황은 황제의 부친을 얘기한다. 첫번째로 태상황에 오른 인물은 진(秦)의 장양왕(莊襄王)인데, 사후에 아들인 진시황에 의하여 추존된 것이다. 두번째로는 한고조 유방이 자기의 부친인 태공(太公)을 태상황으로 하였는데, 이 초기의 두 태상황은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태상황, 즉 "황제를 거쳐 태상황으로 물러난 경우"와는 다르다.

 

중국에서 황제를 거쳐 태상황으로 물러난 경우는 다음과 같다.

진혜제 사마충, 십육국중 대량천왕 여광, 북위 헌문제 탁발홍, 북제 무성제 고담, 후주 고위, 북주 선제 우문빈, 수양제 양광, 당고조 이연, 예종 이단, 현종 이융기, 순종 이송, 소종 이엽, 송휘종 조길, 흠종 조환, 고종 조구, 효종 조신, 광종 조순, 서하 신종 이준욱, 서료 직고로, 명 영종 주기진, 청고종 애신각라홍력

 

황제에서 태상황으로 물러난 원인에 따라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자리가 위태로와, 스스로 황제의 관을 벗어 넘겨주고, 위험한 자리를 벗어나고자 한 경우

 

고담은 북제의 네번째 황제로 무성제로 칭한다. 원래 놀기를 좋아하고, 간신 화사개가 공공연히 그에게 정사를 멀리하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당시의 외부환경은 그가 놀고만 지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강적인 북주가 돌궐과 연합하여 여러차례 북제를 쳤고,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태자 고위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고, 자기는 태상황으로 놀이에 전념한다.

 

고위는 놀기 좋아하는데에는 부친 고담에 못지 않았다. 북주가 계속 세력을 확장하는데도, 고위는 스스로 <<무수지곡(無愁之曲)>>을 지어 "무수천자(걱정없는 천자)"라는 말을 들었다. 북주의 병사가 도성으로 몰려오자 그가 한 것은 당시 8살이던 아들에게 황제위를 넘겨준 것이었다. 국난이 닥치자 황제의 관을 벗어던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벗어나려고 했었다. 그리하여 태상황 몇개월만에 포로가 되고, 목이 잘린다.

 

당예종 이단은 황제가 될 때 도와준 것이 태평공주와 아들 이융기(당현종)였다. 이로 인하여 태평공주는 권한이 내외에 떨쳤고, 이융기는 공로를 내세워 태자가 되었다. 태평공주와 태자의 싸움이 격렬해지자 조정은 두 파로 나뉘었다. 당예종은 스스로 골치아픈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아니하여 한 도사로부터 "무위(無爲)"의 조언을 받은 후 황제위를 내팽개치고 태상황으로 물러난다.

 

당현종 이융기는 황제위에 43년간 있었고 초기에 "개원지치"라는 성세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후기에는 여색에 빠져 간신을 등용하고 정치가 부패하여 "천보지란"을 초래한다. 반군이 도성으로 몰려오자 마외파에서 양귀비를 죽이고, 부득이 태자를 도성에 남겨서 인심을 안정시키고자 한다. 태자 이형은 대신의 건의를 받아 황제위에 오르니 당숙종이다. 숙종은 천하에 포고하면서 한편으로 당현종에게 태상황으로 모신다는 것을 알린다. 성도에 도망쳐있던 이융기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전국옥새를 내놓는다.

 

송휘종 조길은 북송말년에 금나라 병사가 몰려오자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선택으로 양위를 선택한다. 그리하여 태자 조환에게 왕위를 넘기니 그가 흠종이다. 결국 그는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가 된다.

 

송흠종은 황제로써 금나라에 체포되어쓴데, 남쪽으로 도망친 동생 조구가 남송을 세운 후에, 형인 송흠종을 "태상황"으로 올린다. 물론, 이 태상황으로 모시는 것은 다 정치적인 쇼였고, 이미 금나라에 포로가 된 조환에게는 알무런 의미가 없었다.

 

포로신분으로 태상황이 된 인물은 또 하나 있다. 바로 명나라때의 영종 주기진이다. 젊은 영종은 환관 왕진의 말을 듣고 친정을 나갔다가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힌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주기진의 동생 주기옥을 등극시키니 이가 명나라 경제이다. 포로로 잡혀있던 영종은 태상황으로 모셔진다. 이후 오이라트와 명간의 협상으로 영종은 북경으로 돌아오고, 형제간의 싸움을 거쳐 영종은 다시 황제에 오른다. 그는 특이하게 황제에서 포로인 태상황으로 다시 황제로 오른 인물이다.

 

송나라때 당항족이 설립한 서하국의 제8대황제 신종 이준욱은 징기스칸의 군대가 몰려오자 깜짝 놀라고, 이전의 맹방이었던 금나라와도 화해가 깨져 십여년간 싸운 끝에 몽고군대가 몰려왔다. 이러한 국난시기에 그는 이선으로 물러나 태상황이 되었다. 젊은 후계자 이덕왕이 얼마간 버틸지는 그가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둘째, 무력으로 협박을 받아서 태상황이 된 경우

 

진혜제 사마충은 유명한 백치황제이다. 그가 즉위한 후 "팔왕의난"이 일어난다. 조왕 사마륜은 301년 1월에 찬위하고 황제가 되며 혜제를 태상황에 올린다. 태상황을 황제의 부친이라는데서 보면 이 경우는 특이했다. 조왕은 사마충의 숙조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후 조왕이 다른 왕들의 반발로 다시 물러난 후, 사마충이 다시 황제가 되기는 하지만, 이미 괴뢰황제이다.

 

수나라말에 이연등의 병사가 일어나자 수양제는 손자인 대와 양유를 황제로 앉히고 수양제는 태상황으로 물러난다. 617년 이연이 장안을 함락시키자 13세의 양유가 황제위에 오르고 강도에 가 있던 수양제는 태상황이 된다. 이연은 스스로 겸손하게 당왕에 앉는다.

 

이연이 당나라를 세울 때, 가장 공이 큰 자는 둘째아들인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태자인 이건성과 셋째 원길을 죽이고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부친을 핍박하여 이연은 이세민(당태종)에 황제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된다.

 

당소종 이엽은 환관 유계술등이 옹립하여 황제가 된다. 900년 11월 유계술등은 "혼군을 폐위하고 명군을 옹립한다"는 이유로 궁정정변을 일으켜 소종과 황후를 소양원에 연금한다. 태자인 이유가 황제위를 잇자 소종은 태상황이 된다. 사실 그의 태상황은 감옥에 갇힌 죄수에 다름 아니었다. 구금된 후 1개월만에 죄신책군지휘사 손덕조가 유계술등을 죽이고 다시 그를 황제에 앉히고, 이유는 다시 태자가 된다.

 

야율대석이 건립한 대료국은 삼대인 직로고에 이르러 사른 사람에게 황제위를 빼앗긴 다음 태상황에 오르게 된다. 이전에 나이만은 이미 징기스칸에 정복당했는데, 태양한의 아들 굴출율은 서료로 망망한다. 서료와 나이만은 계속 우호적인 관계였으므로 굴출율을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낸다. 이후 굴출율이 다른 번속들과 작당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직로고를 태상황에 올린다.

 

셋째, 건강상의 원인으로 정사를 볼 수 없었던 경우

 

십육국시대의 후량의 건국자인 여광은 저족이었다. 그는 원래 전진의 대장이었는데, 병사를 이끌고 서역을 정벌했다가 진나라의 부견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서를 점거하여 왕위에 오르고 대량이라고 국호를 정한다. 나중에 천왕으로 개칭한다. 그는 병세가 깊어 태장인 여소에게 천왕의 직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제가 된다.

 

당순종 이송은 중풍으로 실어하게 되어 군국대사를 처리할 수 없게 된다. 즉위 8개월만에 태자 이순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된다.

 

송광종 조순은 공처가였다. 황후 이씨는 투기와 발호가 심해서 광종은 마음의 병을 얻었고, 모든 일을 황후 이씨에게 맡겼다. 심지어 부친의 장례식때도 광종이 장례를 집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정의 신하들은 태황태후에게 청하여 태자 조확에게 전위하게 하고 광종을 태상황으로 올렸다.

 

넷째, 정사에 염증이 나서 편안하게 살고자 한 경우

 

북위 헌문제 탁발홍은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12세에 황위에 올랐는데,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총명하고 과감하였는데, 황로, 부도지학(도교, 불교)을 좋아했다고 한다. 20세경에 그는 은퇴하고자 했으니,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놀라마지 않았다. 그는 황제위를 성인인 숙부 자추에게 넘기고자하고, 자기의 아들인 5살된 태자에게 넘기지 않는다. 이에 반대의 소리가 높아서, 결국 태자 굉에게 황제위를 넘긴다.

 

남송의 조구도 홍제를 36년간 한 후 염증을 느껴 태자 조신(효종)에게 황위를 넘기고 태상황이 된다. 조신도 황제위에 28년간 있은 후 역시 염증을 느껴 황제위를 조순 즉 광종에게 넘긴다. 조순도 다시 황제위를 버리고 태상황이 된다. 남송의 세 황제가 모두 스스로 황제위에서 물러나 태상황이 된 것을 보면 당시 북방의 금나라와 대치하는 남송의 황제의 직무가 얼마나 벅찼는지를 알 수 있다.

 

청고종 홍력은 25세에 즉위하여 60년간 황제를 지낸 후 태자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태상황이 된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2선으로 물러났지만, 그러나 실제 조정의 업무는 그가 주재하였다.

 

다섯째, 마음 편안하게 향락을 누리기 위하여 태상황이 된 경우

 

북주의 무제 우문옹이 죽고 태자인 우문찬이 즉위했으니 선제이다. 그는 호색했으며, 부황의 죽음에도 전혀 슬픈 기색이 없이 기쁜 기색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궁중의 미녀를 찾아다녔다. 1년간 황제를 한 후에 태자인 우문찬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태상황이 되었다. 22살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