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전(劉雨田, 1870-1951)
원명 유봉림(劉逢琳), 이명 유귀산(劉龜山), 하문천(何文泉), 귀산송태랑(龜山松太郞). 외호 유앙자(劉秧子). 요녕성 보란점(普蘭店)의 지주가정에서 태어남. 8세때부터 학문시작, 16년간 글을 읽음. 2번에 걸쳐 과거에 참가하나, 모두 낙방함.
1894년 8월, 청일전쟁(갑오전쟁)이 발발. 10월 24일, 일본군이 장하(莊河)의 화원구(花園口)에 상륙함. 유우전은 정영청(鄭永昌)이라는 가명을 쓰는 일본간첩 신무광신(神武光臣) 소좌에게 포섭되어 일본군의 길안내를 맡음. 11월 6일, 일본군이 금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유우전은 허리에 군도를 차고, 부친과 함께 일본군에게 10대의 마차에 음식을 싣고 일본군을 위로함. 청일전쟁 종결후 청나라 정부가 친일매국노를 색출하자, 유우전은 일본으로 도망침. 일본에 도착한 후 공부도 하고, 일본선린서원에서 한문교사도 하다가, 1898년에는 일본육군대학의 한문교수가 됨.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폭발하자, 유우전은 일본군의 위임을 받아 다시 한번 일본침략군의 길안내를 맡음. 일본군 제2군을 따라 후아석(猴兒石, 현재의 대련시 금주구 행수돈진)으로 상륙. 당시 그는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위하여 계책을 내고, 정보를 수집하여 제공하고, 군수물자를 준비하며, 일본군을 대신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을 함. 내목장군의 중용을 받아, 그는 러시아장교와의 협상에도 참석함. 1905년 5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함. 1906년, 유우전은 여순으로 가서 관동도독부의 촉탁(고급고문)이 됨. 그는 일본군에 충성을 다하여, 일본천황이 친히 그를 접견하고, 6등공의 훈작을 내림. 신해혁명후 유우전은 여순구 신시구에 거주하면서, 청나라 황족중 매국노 선기와 함께 종사당을 결성하여 "중일동문동종", "우호" "친선"을 외치며 백성들에게 "공존공영" "대동아공영권건설" "천황에 충성"하자는 주장을 하여, 일본의 칭찬을 받음. 1915년 일본천황은 다시 그에게 5등공의 훈작을 내림.
1916년, 유우전은 신용조합을 만들고, 요동은행을 창설함. 보란점에 본점을 두었으나, 1918년 요동은행 본점을 대련시 대산통(大山通, 현재의 상해로)으로 옮김. 1923년에는 다시 만주은행에 합병됨. 1937년 7.7사변이후 유우전은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적극지지하여, 1200무의 토지, 200간의 집을 팔아 "우전(雨田)"호 비행기 2대를 헌납함. 이로 인하여 일본은 유우전의 공적을 <<관동주비사>>등의 책에 기재함.
1945년, 일본투항후, 유우전은 변장을 하고 도망침. 대련, 심양, 서안, 길림, 장춘등지에 숨음. 1951년, 신금현 공안기관에 체포되어, 9월 10일 사형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집행함
장본정(張本政, 1865-1951)
자는 덕순(德純), 조적은 산동 문등. 1985년(청동치4년) 여순 수사영(水師營)에서 태어남. 청년시기에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지음. 1894년, 위해에서 일본간첨 다카하시에게 포섭됨. 청일전쟁때부터, 장본정은 일본군을 위하여 길안내를 하여 여순의 요새를 점령하도록 도움. 러일전쟁에서도 일본군의 길안내를 하여 동계관산을 점령하는데 기여하여, 일본군의 중용을 받음. 1904년, 일본의 세력을 활용하여 2대의 배를 빼앗아, 연태에 "정기윤선공사(政記輪船公司)"를 설립함. 이때부터 많은 돈을 범. 1921년, 난가둔의 난가촌으로 옮겨 자신이 살 집을 지음
1894-1945년 사이에 그는 일본식민당국의 정륭은행 이사, 관동주 시국위원회 위원, 관동주 정신총동원중앙실행위원회 위원, 관동주계획평의원, 관동주청 참사, 대련시의원 및 대련화상공의회회장등 49개의 직책을 가짐. 일본항복후, 대련치안유지위원회 위원장을 맡음.
장본정은 일본에 의탁한 후, 일본정부와 권력자들에게 재물을 많이 헌납하였음. 1925년, 5.30참안이 발생한 후, 6월에 대련의 각계층이 자금을 출연하여 상해에서 난을 당한 동포를 지원하는데, 장본정은 일본과 결탁하여 모금활동을 방해함. 일본국내의 2차에 걸친 대지진 때에는 여러번 자금을 출연함. 1932, 1937년에 일본군이 상해를 진공할 때, 그의 모든 배는 일본침략군에 제공됨. 1940년, 일본에서 "기원2600년" 기념식을 할 때, 그는 일본에 헌금하고 경하하러 일본으로 감. 일본천황이 친히 접견하고 "5등공 훈작"을 내림. 1941년 태평양전쟁 폭발후, 장본정은 총톤수 4.4만톤의 배를 일본이 제공하여 군용으로 쓰도록 함. 그는 적극적으로 비행기헌납운동을 시행하여, 44대의 비행기를 헌납하고, 일본에 가서 비행기명명의식에 참가하기도 함.
1947년 3월 18일, 장본정은 대련인민정부에 의하여 부역죄로 12년형을 선고받음. 병보석으로 병원에서 치료받는 기간중에 변장을 하고 천진으로 도망침. 같은 해 인민정부에 체포되어 1951년 5월 10일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짐.
[장본정의 개인주택]
장본정의 집은 대련시 감정자구 난금촌에 있고, 1920년경에 지었다고 한다. 건축면적은 1500평방미터이고, 바깥에는 480평방미터짜리 가묘가 있음. 이 집은 지상2층, 지하1층이며, 정기주식유한공사 총경리직에 있던 장본정의 개인주택임.
1950년 12월에 정부에 의하여 몰수되어, 여대제5전근의원으로 사용되었음. 당시, 동북인민정부, 동북군구는 공동으로 여대시에 명령하여 전근의원을 건설하도록 하였음. 주요한 임무는 6.25전쟁에 참전한 인민해방군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음. 여대시는 전근의원을 11곳을 건설했고, 병상5500개를 확보했는데, 그 중 제5전근의원은 500병상이며, 4지외과와 내과 전문이었음. 현재는 대련시제7인민병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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