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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국민당의 여중장(女中將) : 기준봉(奇俊峰)

by 중은우시 2006. 11. 21.

 

 

국민당이 대륙에서 집권한 20여년동안 중장의 계급을 받았던 여인은 단 두명이다. 한명은 중국항공위원회비서장으로 "중국공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first lady 송미령(宋美齡)이고, 다른 한명이 바로 몽고족 항일여영웅 기준봉이다.

 

기준봉(1915-1947)은 내몽고 아라산(阿拉善)기의 몽고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기준봉이 태어났을 때, 한 라마가 그녀를 보고는 이 아이는 명이 세고 '왕'명을 타고 났다고 말한다. 기준봉의 부친은 이해가 안되었다. 왜냐하면 몽고는 남자가 계승하므로 자기의 계승자는 아들이지 그녀가 아니었고, 그리고 그녀에게 계승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누투커이므로 왕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라마에게 보이자 이 라마는 깜짝 놀라면서 왕명일 뿐아니라'무왕(武王)'이라고 한다. 군대를 통솔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백일 때 한족의 습관대로 물건을 집게 했는데, 그녀는 아무 스스럼없이 부친의 도장을 집었다. 이후 부친은 그녀를 남자들과 같이 자라게 했다.

 

그녀의 집안도 귀족이기는 하지만 왕(王, 자사크)에는 이르지 못했고, 누투커였다. 당시  몽고의 정치체제를 보면, 아직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기본적인 정권의 단위는 기(旗)였다. 내몽고는 24개의 기, 외몽고도 24개의 기 합쳐서 48개의 기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기는 현재 중국의 현에 해당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면적은 매우 넓었다. 매 기에는 왕(자사크) 1인이 통치했는데, '48가왕야"들이 이들이다. 몇 개의 기가 뭉쳐서 더 큰 행정단위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맹(盟)이라고 하였다. 기보다 작은 정권단위가 누투커이다.

 

부친은 덕의침(德毅忱)으로 일찌기 위안스카이(袁世凱)로부터 보국공(輔國公)의 작위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봉건왕공제도에 반대하여 내몽고인민혁명당에 가입한다. 1927년 4월, 무장의거를 일으키고 신정권 아라산기정무위원회를 성립한다. 그러나, 나중에 고립무원으로 실패하고 유배도중에 사망한다.

 

기준봉의 몽고이름은 서푸러마(色福勒瑪)이다. 그녀는 5살때부터 과부로 지내던 고모와 함께 생활한다. 고모는 고모부의 한족성인 기(奇)씨를 따서 그녀에게 기준봉이라는 한족이름을 지어준다. 1934년, 19세의 기준봉은 고모가 주혼자가 되어 우라터시공기의 기주(자투크)인 스라부두얼지(石王)에게 시집간다. 당시, 시공기는 각파의 귀족세력들로 갈등관계가 복잡했고, 기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명쟁암투를 벌이고 있었따.

 

동협리의 액보재는 당시 대리 기주를 맡고 있었는데 강제로 퇴위된다. 그러나 그는 실권을 내놓고 싶지 않아. 시린궈러맹의 맹장인 덕목초극동로예(德王)에게 투신한다. 당시 기장이 된지 얼마되지 않은 석왕은 아직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으므로, 수원성정부 주석인 부작의(傅作義)에게 의탁한다. 쌍방은 각자의 뒷배경을 가지고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1936년에 석왕은 장기간의 전투에 시달리며 얻은 병으로 사망한다.

 

남편이 죽을 때, 기준봉은 이미 임신중이었다. 액보재는 기회를 틈타 기준봉에게 기부의 관인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러나 기준봉은 단연히 거절한다. 액보재는 실패하자, 곳곳에 기준봉이 가진 것은 석왕의 아이가 아니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고, 그 아이는 기왕을 계승할 자격이 없다고 선전했다.

 

시공기의 혼란한 국면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준봉은 후허하오터의 부작의를 만나서 지지를 요청한다. 부작의는 기준봉의 용기와 견식에 탄복하여, 수원성정부의 결의안 형식으로 기의 관인을 기준봉이 보관하도록 한다. 모든 기의 호로, 수초, 양등의 세금수입도 기준봉이 경영하게 하고, 군대도 기준봉이 통할하게 한다. 기준봉이 임신한 아이가 아들이면 이후 왕위를 계승한다는 등의 결정을 내려준다. 이로써 기준봉은 "기여왕"이 된다.

 

1937년 음력 3월 15일, 기준봉은 아들을 순산하고 아라단아오치얼이라고 짓고 한족명으로 기법무(奇法武)라고 한다. 8월에 기준봉은 정식으로 기주(旗主, 자투크)에 오르고, 전기의 관할권을 행사한다.

 

1937년 칠칠사변이후 액보재 일당은 덕왕과 함께 일본에 투항하고, 매국노가 된다. 기준봉은 전기의 관리를 모아놓고 강령을 선포한다 (1) 수원성정부의 지도를 받는다, (2) 단결하여 친일파를 몰아낸다, (3)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목민들로부터 함부로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한다. (4) 군기는 엄정하게 하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거나 부녀를 모욕하지 못하게 한다.

 

1937년 10월 후허하오터, 빠오터우가 연이어 함락된다. 액보재 일당은 덕왕을 쫓아 '몽고연맹자치정부'를 만들고, 시공기에도 친일파 정권을 세운다. 친일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준봉은 오원현에 머물던 국민당 기7사단 사당장인 문병악과 연락하고, 오원으로 가서 항일에 참여할 뜻을 밝힌다. 문병악은 즉시 환영의 뜻을 나타낸다.

 

1938년 음력 2월 2일, 기준봉 일행은 행군을 하여 오원현성에 도착한다. 문병악은 즉시 국민당 중앙에 상세한 상황을 보고한다. 장개석도 기준봉에 대하여 위문하고, 행정원, 군정부에서도 위문전보를 보냈다. 기준봉은 첫번째로 친일정권내에서 항일진영에 투신한 몽고왕공이었다.

 

1938년 4월 중순, 군정부는 기준봉을 우라터전기 보안사령관에 임명한다. 5월, 국민당중앙군사위원회는 다시 그녀를 우라터전기 방어사령관에 임명하고 소장의 계급을 내린다. 방어사령부는 오원현성에 설치하고, 매월 군정부에서 은양 7000위안을 군수조달비로 주었다. 문경악의 동의를 받아 기내에서 200여명의 청년을 뽑아 군대를 확충했다. 우라터전기 방어사령부 성립대회에 기준봉은 군복을 입고 소장계급장을 달았다. 군정부의 비준을 받아. 황초삼을 사령부 상교(대령) 참모장에, 이준경을 중교(중령) 참모주임에 정명전을 제1단 단장, 정색령을 제2단 단장에 임명했다.

 

1939년 12월 20일, 기준봉, 기법무, 황초삼, 이준경등 20여명은 당시 중경에 있던 중경정부로 장개석을 만나러 간다. 유림, 연안, 서안을 거쳐 1940년 3월에 중경에 도착한다. 행정원장 공상희, 군정부장 하응흠, 몽장위원장 백운제등 고급관료들이 거대한 환영회를 개최해주었다. 6월초에는 장개석 부부가 기준봉 일행을 접견한다. 기준봉은 장개석, 송미령에게 군대식 경례를 하고, 하다와 금기를 바쳤다. 기법무는 몽고예절로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리고 몽고의 상황을 보고했다. 장개석은 하응흠과 상의한 후 그자리에서 기준봉을 우라터전기방어사령관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군정부로 하여금 기준봉에게 200정의 경무기와 충분한 탄약을 제공하고, 군장 500세트, 크고자은 자동차 각 1대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이번 접견은 관례를 깨고 3시간여 계속되었다. 저녁에 장개석 부부는 관저에서 기준봉과 저녁을 같이 했다.

 

이후 기준봉은 중경에서 항일연설을 하기도 하고, 중학을 방문하기도 하는등 많은 활동을 한다.

 

1940년 겨울, 기준봉 일행은 중경을 떠난다. 방어사령부를 3개단으로 확대개편하고, 병력도 600여명으로 늘인다. 이들은 몽고의 지형에 익숙하여 정탐업무등을 주로 수행하였으며, 여러차례 전공을 세우고 부작의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 8월 17일, 기준봉은 전체 병사를 이끌고 오원에서 7년간 떨어져 있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친일정권하에서 기주(자투크)역할을 하던 송부얼바투는 관리를 이끌고 이들을 맞이하였으며 기법무에게 권한을 이양한다. 부대는 기정부 소재지인 하라칸에 주둔했다. 얼마되지 않아, 기준봉은 후허하오터로 가서 부작의 주석을 만났으며, 빠오터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관도변에서 액보재는 두 손으로 기정부의 관인을 기준봉에게 바친다. 기준봉은 원래 액보재를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그가 워낙 공손하게 나오자 마음이 약해져서 죽이지 못한다. 이것이 결국은 나중에 화를 불러온다. 액보재는 보안1단의 단장을 맡은 학유룡을 기준봉이 신임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손녀를 학유룡에게 시집보낸다. 학유룡은 원래 기준봉의 시녀의 아들이었다. 그는 원래 일본 특무기관에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토비로 나설려고 하다가 일본에 발각되어 더 이상 빠오터우에 살 수 없어 기준봉에게 갔다. 그리고 기준봉의 신임을 받아 단장에까지 오른 것이다. 그런데, 참모장이었던 황초삼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참모장이 비었는데, 기준봉은 학유룡이 아직 경력이 부족하다고 보아 참모장에 앉히지 않는다. 학유룡은 이에 원한을 품고, 보복하고자 한다.

 

1947년 7월 14일, 기준봉이 기법무와 20여명의 호위병사를 데리고 빠오터우로 가서 공무를 보게 된다. 학유룡은 이 소식을 들은 후 기준봉이 빠오터우로 가지 위해서 반드시 들르게 될 지역인 우란지에서 기다리다가 1개 연대의 병력으로 기준봉 모자를 체포한다. 그리고는 하나의 절안에 가둔다. 이 때 기준봉은 학유룡이 자기에게 독수를 쓸 것으로 생각하고 어린 라마를 찾아서 빠오터우의 시장 온영동에게 전하도록 한다. 온영동은 즉시 빠오터우시 경비사령부 참모장 온정국을 보내서 해결하도록 한다. 온이 우란지로 갔을 때, 학유룡은 "기사령관은 나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었는데, 내가 어찌 그녀에게 해를 가하겠는가. 이것은 완전히 오해이다"라고 하면서 하루이틀내에 기사령관을 빠오터우로 호송하겠다고 한다. 온정국은 그의 말을 믿고 다음 날 빠오터우로 돌아온다. 액보재와 학유룡은 흉수 전소삼을 고용하여, 기준봉 모자를 살해한다. 7월 20일 아침 전소삼은 기준봉의 등에 총을 두 발 쏘아 기준봉은 즉시 쓰러진다. 전소삼은 집안으로 들어가 머리체 총을 쏘아 기법무도 죽여버린다. 기준봉은 당시 32세였고, 기법무는 겨우 10살된 아이였다.

 

해방후, 기준봉 모자를 살해한 학유룡, 전소삼을 붙잡아 총살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