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과 결의형제

중은우시 2006. 12. 1. 17:31

1921년에서 1929년까지는 장개석이 정치무대에서 권력을 장악해가는 시기이다. 이 때, 장개석은 10여명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 중에는 1924년 광주황포군관학교시절 결의형제가 된 왕백령(王柏齡), 진조영(陳肇英)등이 있고; 1926년 북벌전에는 이종인(李宗仁)과 결의를 맺었으며, 1928년 제2차북벌시에는 풍옥상(馮玉祥)과 결의를 맺었고, 1929년에는 동북지방에서 기치를 든 장학량(張學良)과 결의를 맺었다. 이런 결의형제들은 장개석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6년, 양광(兩廣, 광동과 광서)은 이미 군령과 정령이 통일되었고, 계계(桂係, 계는 광서성을 의미하므로 광서출신이라는 뜻임)군대가 그해 3월 국민혁명군제7군으로 개편되고, 이종인이 군장을 맡았다. 같은 해 7월, 혁명군은 장사에 입성했고, 8월 12일 당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장개석은 장사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한다. 회의기간동안 장개석과 이종인은 내왕이 많아졌다. 장개석은 이익교량을 해본 후에 이종인이 계군(桂軍)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고, 광서의 많은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어 이용가치가 크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종인에게 결의를 맺자고 제안했다. 결맹의식에서, 장개석은 "의속동지, 정비동포, 동심일덕, 생사계지(誼屬同知, 情比同胞, 同心一德, 生死繫之)"라고 서약했다. 장개석이 이종인보다 4살이 많아 장개석이 의형이 되고, 이종인이 의제가 되었다. 이후 수십년간, 이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 것이 아니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충돌하며 지냈다. 1929년, 장계전쟁(蔣桂戰爭, 장개석부대와 계계부대간의 전쟁)이 폭발하였다. 한쪽은 장개석을 두목으로 한 중앙군이고, 한쪽은 이종인을 두목으로 한 계계집단이었다. 결과는 후자가 패배하였으며, 이종인은 홍콩으로 도망가서 난을 피한다. 1949년에 이종인은 다시 "대총총(代總統)"을 맡은 후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갈라지며, 세불양립이 돈다. 이 기간과 1965년 이종인이 대륙으로 귀국하였을 때, 장개석은 수차례 수하에게 이종인을 암살하라고 지시한다.

 

풍옥상은 당년에 중국에서 유명한 애국장군이었다. 1928년초에 하남성 주석이 되고, 중병을 장악한다. 장개석은 그를 끌어들이고자 한다. 1928년 2월중순, 장개석은 '청당(淸黨)'에 관한 일로 개봉을 가서, 풍옥상을 만나고 즉석에서 그에게 '금란지교'를 맺자고 제의한다. 그가 풍옥상에게 준 글에서는 "동생 장중정은 환장(煥章, 풍옥상의 字)을 친형제와 같이 모시겠다. 편안하고 위태로운 것을 같이 하며, 달콤하고 쓴 것도 같이 맛보며, 바다가 마르고 돌이 삭더라도, 살아있건 죽었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29년 10월 장개석은 의형인 풍옥상과 서로 총을 겨누는 사이가 된다. 이로써 "장풍전쟁(蔣馮戰爭, 장개석과 풍옥상간의 전투)"이 시작된다. 최종적으로 풍옥상이 실패하여 하야하고, 태산에 은거한다. 이후 장개석과 풍옥상은 정치에 있어서 여러 차례 부딪친다. 풍옥상은 장개석의 독재정치, 겉으로는 항일이나 속으로는 반공을 하는 정책등에 매우 불만이었다. 그래서 자주 국민당정부를 비난했고, 장개석과의 모순은 격화되었다. 1946년 풍옥상은 밀려서 미국으로 시찰을 떠나게 되나, 1947년 귀국하던 도중에 사망한다.

 

1929년, 소수(少帥) 장학량은 동북에서 깃발을 바꿔단다. 장학량을 이용하여 북방에서의 군정세력을 확대할 생각으로, 장개석은 그와 결의형제가 되고, 장학량을 국민정부육해공군부총사령관에 임명한다(총사령관은 장개석). 이후 장학량은 장개석을 계속 따른다. 그러나, 장개석이 반공에 적극적이면서 항일에 소극적인데 불만을 품고, 1936년 12월 12일, 유명한 '서안사변'을 일으켜, 장개석을 핍박하여 항일에 나서게 한다. 이로써 중국의 역사는 새로 쓰여진다. 그러나, 장학량은 '형제의 정'을 너무 강조하여, 주위의 맹렬한 반대를 무릎쓰고, 스스로 장개석을 모시고 남경까지 안전하게 호송해준다. 결과적으로 의형은 의제처럼 의리를 중시하지 않아서, 남경에 도착하자마자 장학량을 구금한다. 구금초기에는 장개석은 사람을 보내어 두 사람이 결의를 맺을 때의 '난보'를 장학량에게 돌려줌으로써, 그를 더이상 의동생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을 밝힌다. 장학량은 이 때 장개석의 진면목을 알아차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후 장학량은 구금상태로 반세기를 보내는데, 정치범으로 최장의 구금기간기록을 세운다. 장개석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장학량이 석방되는데 이미 나이 8순의 노인이었다.

 

장개석의 결의형제의 기량이 여러번 성공을 거두었지만, 매번 성공한 것은 아니고, 두세번은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1925년 7월, 국민당 광주대본영을 국민정부로 개조할 때, 왕정위(汪精衛)가 정부주석 겸 군사위원회주석으로 당선되었으며, 대권을 손에 넣었다. 이 때 장개석은 겨우 황포군관학교 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위원 겸 국민혁명군 제1군 군장이었다. 장개석은 왕정위의 세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왕정위에게 결의형제를 제의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에 이비 첩자(帖子)를 보내고, 왕정위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다만, 왕정위의 부인인 진벽군이 격렬히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장개석을 멸시했고, 장개석이 왕정위와 평배(平輩)가 되는 것은 배분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그래서 그냥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다. 이후 두 사람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맞부딪쳤다. 1938년 왕정위가 친일정권을 세우면서 가장 유명한 매국노로 인정받게 된다.

 

또 한 명의 예외는 진명추(陳銘樞)였다. 1931년, 장개석은 진명추에게 제19로군을 이끌고 강서로 가서 중앙홍군을 소탕하라고 지시한다. 이 때 진명추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장개석은 그와 도원결의를 맺을 것을 제안하나 진명추는 사양한다. 1933년 11월, 진명추는 이제심, 채정해등의 장군들과 함께 군사반란을 일으키며 장개석반대를 선언하고, "복건인민정부"를 구성하여, 국민당정부의 통치에서 벗어나 국민당정부와 대항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1929년에 장개석은 당생지(唐生智)를 이용하여 풍옥상을 치기 위하여, 중간에 대계도(戴季陶)를 내세워 당생지에게 결의형제를 맺자고 제안하나 당생지가 완곡하게 거절하였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