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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서안사변: 장학량은 왜 장개석을 남경으로 모시고 갔는가?

by 중은우시 2006. 8. 20.

작자: 초술굉(焦述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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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사변은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병간(兵諫, 무력을 동원해서 간언하는 것)"을 일으켜 장개석을 감금한 날로부터 12월 24일 장학량이 장개석을 모시고 남경으로 간 때까지의 기간이다. 기본적으로 시간은 약 반달이며, 최종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되는데, 장학량이 가장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사변의 평화적해결을 끌어냈다. 그리고 서안사변의 평화적해결은 10년내전이 기본적으로 종결됨을 의미했고, 국민당의 대일본정책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 점에서 보면 장학량의 공헌이 가장 크다. 그의 자기희생은 가치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장학량은 왜 장개석을 따라 남경으로 갔는가?

 

원인은 다음의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장학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행위는 광명정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실행한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부득이한 상황하에서 "병간"을 한 것이었다. 절대로 자리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마음 속에 조그만큼의 사사로움도 없다, 천지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개석이 자신에 대하여 심하게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장개석이 그의 병권을 빼앗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절반만 맞추었다. 장개석은 확실히 그를 죽음으로 몰고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그의 병권을 빼앗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정했다. 장개석이 일본에 대하여 저항하려면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은 공산당에 대한 것도 있지만, 각지방의 실력자들도 안정시켜야 하는 대상에 들어갔다. 장개석은 홍군에 대한 추적을 통하여 서남세력에 대한 정리를 완료했다. 다음은 서북, 화북의 실력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측면에서 장학량은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는 애국적이고 정직한 군인이었지, 정치가나 정략가는 아니었다.

 

둘째, 장학량은 일종의 협객의 의기가 있었다. 그는 자기는 공적으로는 장개석의 부하이고, 사적으로는 장개석의 동생이었다. 이번 사변은 장개석으로 하여금 물러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런 점에서 스스로 치욕을 당함으로써 장개석이 화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래야 여러 측면에서 제대로 설명될 수가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노련한 양호성과는 달랐다. 양호성은 자기를 더 많이 생각횄다. 왜냐하면 그의 경력은 장학량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장학량은 순수했고, 양호성은 복잡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하고, 그들 자신만 희생해야 한다. 심지어 생명까지도. 최소한 정치생명과 군사생명까지도"라고 생각했다.

 

셋째, 장학량은 반드시 장개석을 호위하여 항공안전을 보호하여야 했다. 왜냐하면 많은 동북군과 서북군의 고급장군들, 심지어 양호성까지도 이렇게 빨리 장개석을 풀어주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개석으로 하여금 서명을 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던 공산당과 장학량은 핍박하여 서명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쓸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서명하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학량은 더 이상 장개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따. 양군의 많은 고급장군들과 중하급 장교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장개석의 전용기를 격추시키자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점은 장학량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결과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장개석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학량은 반드시 장개석의 비행기를 호위하여야 했다. 이로써 보더라도 장학량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장학량은 어쨌든 국민당의 애국장군이다. 그의 사상은 아직 구시대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의 사상과 바른 점은 항일이었다. 그는 공산당에 대한 인식은 그저 중공의 일부 고위지도자들과의 교류에 머물러 있었다. 그와 주은래, 섭검영과의 관계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그를 선진적인 혁명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는 그저 국민당내에 항일을 주장한 군인이었을 뿐이다. 그와 그의 부대로 하여금 공산당의 길을 걷게 한다는 것은 당시에 현실적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많은 부하들과 군대는 결국 팔로군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즉 장개석이 핍박하고 중국공산당이 통일전선전술을 쓴 결과인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장학량이 장개석을 호송한 것은 잘된 일이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서안사변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인지에 대하여 큰 변수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점은 장개석도 잘 알았다. 그래서 장개석은 장학량의 생명을 해하려는 생각은 전혀 가지지 않았다. 만일 공산당이 없었다면, 장학량을 계속 부대를 이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학량은 만년에도 대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각 방면의 사람들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도록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그의 군자됨을 엿볼 수있다. 정정당당한 진정한 장대원수의 아들이고, 사나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