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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이가성(李嘉誠)의 두 아들

by 중은우시 2006. 12. 11.

이가성(李嘉誠, 리카싱)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은 이택거(李澤鉅)이고, 차남은 이택해(李澤楷)이다.

 

이가성(Li Ka Shing): 1928년 7월 29일 광동 조주출생. 부친은 소학교 교장. 1940년 일본인의 박해를 피해 홍콩으로 도피. 1942년 부친 사망. 1948년 20세때 플라스틱공장의 업무경리, 사장을 맡음. 1950년 장강플라스틱공장을 창업. 1957년 장강공업유한공사 창업, 완구 플라스틱등을 생산, 1958, 1960년 북각, 시만에 빌딩을 건설. 1972년 장강실업유한공사 창업, 장강실업(長江實業), 화기황포(和記黃포, 허치슨 왐포아)의 오너.

 

이택거(Victor T. K. Li): 1964년 8월 홍콩출생. 홍콩 聖保羅영문서원을 다님. 1986년 미국스탠포드 토목공정과졸업. 장강실업 부주석

 

이택해: 1966년 11월 홍콩출생. 13세때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서, Menio Park High School을 다님, 1987년 스탠포드대학 컴퓨터공학 학사, 1987-1990 카나다 투자은행 Gordon Capital에서 근무, 1990년 홍콩으로 돌아와 허치슨 왐포아(화기황포)의 부주석을 맡음. 1991년 Star Tv를 만듬. 1993년 5월 Star TV를 머독에게 매각. 1993년 10월, 영과탁전십단(Pacific Century)을 설립.

 

이가성은 공공장소에서 자주 자기는 은퇴할 계획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이자성은 계속 가족사업의 연속성을 위해서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다. 다른 홍콩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가성은 가족관리기금을 만드는 방식으로 가족기업의 미래를 위하여 길을 닦고 있다. 2003년부터 이가성은 점차 자기가 가진 장강실업의 지분을 옮겼고, 가족기금이 보유한 주식이 상응하여 늘어났다. 현재 이가성의 가족은 장강실업의 주식중 35.65%를 보유하고 있다. 홍콩주식분석가들은 가족기금모델을 취하는 것은 홍콩부자들이 가족기업을 관리하는 통상적인 방식이라고 한다. 이가성이 점차 지분을 줄여가는데서도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가성은 서양식의 가족관리모델을 좋아했다. "중학위체, 서학위용"이 이가성의 특징이다. 가족기업의 승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기업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가족기금을 통하여 방대한 산업을 관리하는 이외에 다른 중요한 일의 하나는 어떻게 후계자를 확정하느냐는 것이다.

 

이가성은 일찌기 공개적으로 "두 아들은 똑같이 대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남 이택거가 장강실업에 들어온 때로부터 이가성의 마음속에 이상적인 사업후계자로 점찍어졌다. 스탠포드대학토목공정학과의 석사학위를 가진 이택거는 장강실업에 들어온 때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카나다의 "만박호원"공사를 개발하면서, 전기의 기획, 중기의 건설, 후기의 완공에 이르기까지 이택거는 아주 완벽하게 처리했다. 특히 공사개발과정에서 카나다 본토주민의 강렬한 항의를 받고, 정부로 하여금 장강실업에 부여한 개발권을 회수하라고 요구하고, 결국 공사가 중단되는 지경에 처했지만, 처음 맞이하는 아주 난감한 상황하에서도 이택거는 차분하게 성총독과 직접 의사소통하면서 카나다정부를 설득하여 장강실업의 건설을 유지하게 했다. 이택거의 책임하에 "만박호원"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것은 이가성에게 이택거를 후계자로 확정하는데 가점이 되었다. 이어서 이택거는 장강실업집단에서 직위가 계속 오르고, 금방 장강실업동사회 부주석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형인 이택거가 가족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이택해는 여전히 카나다의 고든캐피탈에서 일했다. 성격이 원래 반역적인 이택해는 부친의 회사에 들어가서 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탠포드에서 공부하는 여러해동안 이택해는 부친의 사업이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고, 그는 교우인 양치원(야후의 설립자)처럼 컴퓨터분야에서 사업을 벌이고 싶어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이택해는 카나다로 가서, 투자은행업무를 시작했다. 컴퓨터전공으로 졸업하였고, 하이테크에 관심이 많으면서 컴퓨터분야가 아닌 투자은행분야에서 일을 시작한 데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컴퓨터분야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돈벌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이가성은 차남이 자기의 곁에 와서 일하기를 바랬다. 여러차례 권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가성은 할 수 없이 이택해가 카나다에 남아 일하는데 동의했다. 이택해가 일하던 고든 캐피탈은 카나다에서 세번째로 큰 증권회사였다. 여기서 이택해는 자본조작과 회사매매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고, 이 때의 자본거래경험은 나중에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1990년, 이택해의 모친이 병사한다. 홍콩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른 그는 부친의 강권에 못이겨, 홍콩에 남아 부친의 사업을 도우겠다고 응락한다. 이가성은 그를 허치슨 왐포아에 배치한다. 그의 노신 마세민(馬世民)의 보좌하에 이택해는 사업을 시작한다. 이가성이 이택해를 허치슨 왐포아에 배치한 의도는 명백하다. 이씨 장강실업의 두개 집단은 장강실업집단과 허치슨왐포아집단이다. 하나는 주진지이며, 하나는 선봉부대이다. 노련하고 무게있는 장남인 이택거에게 장안실업집단을 맡겨서 중군의 대기를 장악하게 하고, 허치슨 왐포아는 이씨가족사업의 선봉부대로서 신흥영역을 개발하는데, 가족사업의 미래핵심역량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 집단에는 전신, 매체등 신흥산업이 있어, 성격상 반역적인 기질이 강하고, 활기넘치는 이택해에게는 아주 적당한 분야였다. 이를 보면, 두 아들을 각각 장안실업과 허치슨 왐포아에 배치한 것은 아주 완벽한 배치였다.

 

이택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허치슨 왐포아에 진입한 이후, 위선티비프로젝트(스타 티비)를 시작하여 크게 성공을 거둔다. 당시 위성티비는 허치슨 왐포아에서 핵심사업이 아니었다. 이 업무는 경쟁이 치열한 티비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압력을 받아왔다. 특히 이택해가 위성프로젝트를 장악한지 얼마되지 않아, 선박왕 포옥강의 사위인 오광정(吳光正)과 이택해간에 위성티비비용징수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붙었다. 상대방의 강력한 공세앞에서, 이택해는 큰 압력을 받았다. 당시 겨우 24살이던 이택해는 그러나 아주 노련하게 대처하여 마침내 홍콩정부의 금지령을 풀고, 허치슨 왐포아의 위성티비가 홍콩에서 광동어방송을 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나중에 오광정과도 화해를 하여, 이택해는 위성티비분야를 일약 홍콩티비계의 후기지수로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많은 홍콩기업들이 앞다투어 그와 광고계약을 체결했다. 위성티비는 이택해의 경영하에 이익을 실현했다. 이택해는 시기가 성숙되자 위성티비사업을 홍콩티비시장에 진출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머독에게 팔아버렸다. 이로써 이씨가족과 허치슨 왐포아는 각각 15억 홍콩달러를 벌었다. 이택해의 뛰어난 재산관리기술은 부친의 칭찬을 받았고, 이가성은 이택해를 허치슨왐포아집단의 부주석에 임명했다.

 

이택해는 그러나 허치슨왐포아에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돌연 스스로 창업하는 길을 택한다. 그는 위성티비를 팔아서 번 4억달러의 현금을 가지고, 영과수마(盈科數碼, Pacific Century)를 창업한다. 이택해의 구상은 이 회사를 아시아 최대의 인터넷회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의 손정의는 이택해가 따르고자 하는 모델이었다. 이택해가 독립하자, 이가성은 매우 놀라지만,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기질이 강했던 차남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택해가 지금 영과를 매각하고자 하지만 이에 대하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가성은 그를 말릴 수 없게 되자, 그가 독립하여 사업하는 것을 허용한다. 나중에 이가성은 매체에 "그는 14살때부터 내가 어찌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택해가 허치슨 왐포아를 떠난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택해가 가족기업내에서는 아무리 발전해야 형인 이택거를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씨 양형제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형인 이택거는 처음부터 가족기업의 후계자로서 지위를 공고히 했었으므로, 이택해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튀어나가 홀로 창업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기업내에서 항상 이택거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허치슨왐포아의 사장인 이택해는 영원히 장강실업공사의 사장인 이택거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허치슨 왐포아는 장강실업의 자회사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형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그다지 가깝지 않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이다. 성보라남녀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택해와 이택거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성격이 서로 달라서,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함께 노는 경우가 드물었고, 방학을 해도 같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형인 이택거는 성격이 차분한 반면에, 동생인 이택해는 성격이 좀 반역적이었다. 이가성이 두 형제를 미국에 공부하러 보냈을 때도, 이택해와 이택거간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멀어졌다. 이택해는 미국에서 혼자 살았고, 돈이 필요하더라도 형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서 해결했따. 이가성이 원래 두 형제가 서로 돌보며 살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형제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진 것은 이택해의 모친이 사망한 이후 더욱 심해졌다. 모친의 사망이후, 원래 이씨의 주택은 이택거의 명의로 바뀌었고, 이와 동시에 이택해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와 호텔에 머물러야 했고, 나중에 아파트를 구하고 나서야 호텔을 나올 수 있었다.

 

영과수마를 만든 때로부터, 이택해는 정식으로 가족기업과 결별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이택해는 매체에서 그를 "이가성의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매우 반감을 표시했다. 이택해는 영과수마를 통하여 아시아 인터넷의 신화를 만들고자 했고, 자기가 사업에서 형과 부친을 넘어서고 싶어했다. 나중에 이택해는 매체의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그가 창업할 때, 이가성은 허치슨왐포아의 COO(행정총재)직을 주겠다고 만류하였지만, 이택해는 부친의 호의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나는 부친의 그늘을 벗어나야 했다"

 

이택해의 이름을 업계에 떨치게 된 것은 "디지탈 항구"의 개념을 가지고 홍콩주식시장에 신화를 창조했을 때이다. "부동산+하이테크"의 개념을 통하여 이택해는 홍콩부동산업계에 가장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상상공간을 부여했다. 당시 홍콩화보증권공사의 최신 증권보고평가에 따르면, 이택해라는 세 글자가 주는 상업신용가치는 585.55억홍콩달러였다고 한다. 이씨가족은 그가 있음으로 해서 천억이상의 재산을 가진 첫 홍콩가족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