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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항우식비애(項羽式悲哀)

by 중은우시 2006. 12. 11.

작자: 미상

 

왕안석(王安石)은 이런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중영(仲詠)이라고 불리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천부적으로 좋은 글을 쓰는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들이 그의 글을 보고서는 모두 걸작이라고 칭송했다. 중영의 부친은 돈을 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로 하여금 글을 써서 돈을 벌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확실히 돈을 좀 벌었다. 나중에는 중영이 좋은 글을 써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왕안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중영의 처지에 대하여 비애를 느꼈다.

 

왕안석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신동들의 재주는 믿을 것이 못된다"

 

왕안석의 결론은 정확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분석을 여기서 그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바로잡고 싶은 한 가지는 바로, 중영은 좋은 문장을 써낼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중영의 글을 "중영품격"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똑같은 품격이고, 후기의 작품도 초기의 작품과 같은 수준이다. 사람들이 후기 작품이 좋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미 이전의 신선함을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정보가 폐쇄되어 있어, 중영의 명성은 아마도 상대적으로 폐쇄된 일군의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군의 사람들은 "중영품격"에 대하여 익숙해진 이후에는, 당연히 더 새로운 것을 내놓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기대가 만족되지 않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중영은 이제 안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만일 중영이 현재 활동한다면, 그는 아마도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가 발달한 현재에는 비록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익숙해져서 좋아하지 않게 되더라도,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중영품격"에 대하여 흥취를 가질 것이니까. 어떤 사람들이 재능이 있게 보이는 것은 그가 진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잘하는 어떤 한 분야가 바로 재능을 평가하는 기준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종일 지가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큰 돈을 벌 고 있으며, 명예도 얻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중영들은 이전보다 훨씬 행복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기가 매우 잘난 줄 알고 있으며, 자연도태의 승리자로 여긴다.

 

그러나, 중영들이 행복하면, 일반 사람들은 불행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닥치는 문제는 여러 측면의 재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공부하고, 풍부한 경험을 쌓아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저 한 측면의 재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그저 표면만을 얘기할 뿐이고, 근본을 다스릴 수는 없다. 그래서, 중영들은 그저 우리의 사회에 표면적인 번영만을 가져오고, 실제문제는 계속 더 많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래도 사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엉망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영들이 많아지면서 그들 사이에도 경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한번 바뀌면 한 무리의 중영들이 모두 물러나고, 다른 한 무리의 중영들이 치장을 하고 등장한다.

 

치장을 하고 등장하는 중영들에 대하여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아마 물러나는 중영이 될 것이니까. 우리는 물러나는 중영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동정의 눈물을 그들을 위하여 약간은 흘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제는 아주 빛나는 영웅이었으나, 오늘은 우리와 같은 계급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이런 물러난 중영들은 아마도 바로 항우의 복제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오늘날의 비애를 "항우식 비애"라고 부르기로 하자. 왜 이렇게 부르는가? 왜냐하면 항우는 그의 재능때문에 영웅이 되었고, 또한 그의 재능때문에 불행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다. 항우의 장점은 싸움을 잘하는데 있다. 싸움을 잘하는 것빼고는 그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항우의 재능은 당시에 재능을 판단하는 기준에 부합하였고, 재능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항우는 그 자신이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가? 항우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못믿겠다고? 그럼 나와 한판 붙어보자. 누구든지 나와 싸워서 이긴다면, 나는 그를 형님으로 모시겠다. 만일 아무도 나를 이기지 못하겠다면, 내가 큰형님이 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말은 그냥 듣기에는 맞는 말같이 보인다. 항우 본인조차도 자기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라기 보다는 잘못된 말이다. 그가 빠트린 것은 큰형님이 되는 것은 싸움을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가 잘하는 분야를 재능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혼동시킨 것이다. 당시 유방에게 쫓기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멸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중영들이 물러나는 것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항우의 최후는 매우 비극적이었다. 사람들에게 버려진 신동들이나, 물러난 중영들은 확실히 항우와 닮은 점이 있다.

 

중영이건 항우이건, 그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한 측면에 특히 강했다는 점이다. 다른 측면은 아니었다. 그들의 비극을 조장한 배후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자기에게 정확한 자리를 잡게 하지 못했던 이유 이외에도 아마도 사회적인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사회조류는 어느 한 측면의 소위 "뛰어남", 소위 "강함"을 숭상한다. 이런 한 측면의 "뛰어남"과 한측면의 "강함"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원래는 자기들이 누려야 하지않을 많은 돈과 명예를 쉽게 얻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그들을 싫어하게 된 후에, 그들로부터 이런 것들을 회수하려할 때에는 다시 한번 이런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대해주는 것이다.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자. 미녀들의 예쁜 용모는 천부적인 것이다. 그녀들이 젊었을 때는 사람들이 많은 사랑을 그녀들에게 준다. 그러나 그녀들이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나면, 그녀들을 버리게 된다. 그녀들은 "원래 자기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들"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어하지 않을 때, 사회는 그녀들에게 무능하면서도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욕을 먹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들을 욕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들보다 이에 대하여 더한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일 것이다.

 

고대의 명인들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사랑이나 모욕을 받고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바로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회의 눈이 우리를 신동이라고 인정할 때, 우리는 겸허하게 이런 인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의 눈이 우리의 장점을 더 이상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우리는 낙관적이면서 기죽지 않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너무 높이 들어올려졌다가, 땅바닥에 심하게 떨어지는 최후를 맞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아를 돌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하는 쪽으로만 말하자면 누가 뛰어나지 않은가?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분야에 대하여 말하자면, 누가 우리보다 못한가. 그래서, 우리는 잘하지 못하는 분야쪽으로 힘을 쏟아야 우리는 비로소 진보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를 보라. 부모중 누가 자기 자녀가 신동이 아니길 바라겠는가. 자녀들도 누구 하나 자기가 수퍼파워를 갖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곳곳에서 돈을 엄청 벌어서 쓰고, 마음대로 하는 것도 "수퍼파워'에 의지하여 순조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재능이 있는 것으로 흠모받는 젊은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의 수퍼파워를 발휘하는 무대가 사회조류에 의하여 사라져 버리게 되면, 그들은 "무지" "무능"으로 인하여 일락천장의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좌절을 맞게 된다. 이 때, 그들의 비극은 필연적으로 "항우식 비애"로 되는 것이다.

 

이후의 사회는 더욱 복잡하고, 이런 항우식 비애가 나타날 확률도 더 많아진다. 그러나 현재의 젊은이들은 자기의 '초능력'에 대하여 즐겨 언급할 뿐, 다른 사람들의 좋은 충고는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이런 두개의 요소를 함께 생각하면, 정말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