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중국고대의 공용어

중은우시 2006. 9. 29. 20:56

현재 중국의 공용어 관방언어는 보통화이다. 보통화의 기초는 바로 북경말이다. 중국의 공용어라는 이 전통은 대체로 원(元)나라때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이전에, 중국의 공용어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에 대하여 확실한 역사기록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중국이 통일된 것은 진(秦)나라때 부터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을 보면, 진나라는 문자만 통일하였다. 즉, 서동문(書同文, 같은 문자를 썼다)이지 언어를 통일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중국 각 지방의 언어는 차이가 매우 큰데, 아마도 역사가 남긴 것일 것이다. 진나라 이전을 보자. 하(夏), 상(商), 주(周)의 공용어는 상대적으로 통일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각각의 독립된 왕국은 모두 각자 독립된 관방언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위조제진연초(韓魏趙齊秦燕楚), 여기에 오월(吳越)까지. 각각의 조정에서 쓰는 언어는 분명히 서로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나라이후에 통일된 중앙집권국가가 건립된 이후에, 중앙조정의 관방언어는 무엇이었을까? 통상적인 이치에 따르면, 진나라때의 공용어는 아마도 섬서(陝西), 함양(咸陽)방언을 기초로 한 어떤 언어였을 것이다. 서안은 역사적인 고도이고, 중국역사상 오랫동안 중앙정부의 소재지였다. 그러므로, 원나라이전의 중국정부의 공용어는 분명히 섬서말 또는 서안말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중국고대시가를 연구할 때면, 하나의 문제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고대시가는 음률과 평측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런데, 이런 음률과 평측은 어떤 언어에 따라 제정된 것일까? 바꾸어 말하면, 이백의 시는 어떤 언어로 읽어야 더욱 음률과 평측에 부합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이백, 두보의 시를 읽으면 모두가 보통화로 읽게 된다. 그러나, 당나라때, 이백이 조정에서 고력사에게 자기의 신발을 벗기게 하고 시를 지어 읽었을 때, 그는 어떤 말을 사용했을까? 우리는 오늘 날에 보통화를 사용하여 "간서(看書, 책을 읽다)"라고 읽으면, 똑같은 발음이 서안말에서는 "감수(나무를 자르다)"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당나라 사람들이 '감수'라는 말을 썼을 때, 우리가 이것을 오늘날 읽는다면, 보통화로 '감수'라고 읽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간서'라고 읽어야 할 것인가? 비록 이런 구별은 오늘날 우리가 고문을 읽거나 고시를 읽을 때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고대시가의 음률을 연구할 때는,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송나라때의 소동파의 시는 명성이 높은데, 소동파는 사천사람이다. 내가 듣기로 사천말로 소동파의 시를 읽으면 아주 색다른 맛이 있다고 한다. 지금의 보통화로 읽은 것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소동파 시의 음률이 사천말의 발음에 따랐을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말할 충분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송나라때 또 하나의 시인인 주돈이가 있다. 바로 연꽃에 대하여 "더러운 진흙에서 나왔지만 때묻지 않았다"는 싯구를 쓴 사람이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주돈이의 시가는 언어와 음률배합이 가장 잘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통화로 주돈이의 작품을 읽으면, 이런 느낌이 분명하지는 않다. 소위 언어와 음률의 배합이라는 것에 대하여, 현대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저명한 작곡가인 곡건방이 쓴 한 수의 노래에 "버섯따는 작은 아가씨"가 있다. 곡건분이 얘기하기를 그녀가 이 노래를 만들 때, 기본적으로 가서를 읽었다는 것이다. 읽은 어조에서 음악선률을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이 노래가 입에서 쉽게 불리워지는 이유중의 하나가 그것이다. 아쉽게도 현재의 많은 작사, 작곡을 하는 사람들은, 이 이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같다. 주돈이의 이슈로 돌아가서 말하면, 옛사람들이 주돈이를 평가하기를 그의 시가와 음률은 가장 가깝고 가장 부합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보통화로서는 느끼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주돈이의 시가에 적합한 언어는 지금의 보통화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중국의 언어는 역사적으로 두번 표준음제정의 사건을 거쳤다. 한번은 한나라때이고, 또 한번은 송나라때이다. 그러나, 그 때의 어음규범은 지금보기에는 여전히 모호하다. 예를 들어, 한나라때의 <<설문해자>>에서는 자음의 해석에 대하여 오늘날 보기에는 매우 불명확한 방법을 썼다. 예를 하나 들면, <<설문해자>>의 주음규칙에 따라 "劉"에 대하여는 "李樓切"이라고 적었다. 바로 "이"의 자음과 '루'의 모음을 합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六"도 이렇게 표시할 수 있다. 당연히 "육"의 주음으로 더욱 적절한 것은 "李漏切"일 수 있다. 그런데,우리가 "이" "루" "누"의 정확한 당시 발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유"의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있겠는가. <<설문해자>>의 주음법은 일정한 의미에서는 순환적이다. 네가 "이, 루, 누'의 발음을 알아야, '류, 육'의 발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루, 누'의 발음을 알려면 반드시 다른 글자의 발음을 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음의 순환상황은 오늘날 초등학생들이 먼저 음표를 배우는 표준화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루누'를 보통화로 읽느냐, 사천말로 읽느냐, 광동말로 읽느냐에 따라 모두 다른 결과가 초래된다. 그래서, 언어발음의 통일화를 기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언어학자로서는, 고대문학작품중에 숱한 음률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다, 그들은 왕왕 하나의 간단한 설명으로 지나가곤 한다. 고대의 발음은 현재의 발음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진정한 원인은 고대의 공용어와 현재의 공용어간의 차이때문이라고 본다.

 

녹음설비가 없었으므로, 고대의 공용어의 발음을 탐구하려면 필요한 기초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시 언어의 유적은 오늘날 이러한 연구가 가능하게 해준다.

 

언어학에서는 일종의 "고도현상(孤島現象)"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항주말이다. 강소절강일대의 방어에 익숙한 사람이면 알테지만, 항주말은 강소절강지구와 비교하면 특별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인근지구의 방언과 많은 차이를 가진다. 가장 현저한 특징은 바로 "얼화음"이 비교적 많다는 것이다. "얼화음"은 북방언어의 중요한 특색이다. 항주말에 얼화음이 많아진 것은 사실 남송시대때이다. 당시 항주는 남송의 수도로서, 황족을 대표로 하는 북방귀족이 많이 내려왔고, 북방언어가 남송 항주(임안)의 공용어로 되었으며, 이것은 현지 백성의 언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항주시내의 언어는 인근지역의 언어와 많은 차이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언어상에서 공용어에 치우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므로, 항주말에서도 얼화음이 많이 나타나고 심지어 북방지역말보다도 더욱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강조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곤아(棍兒)' '대아(袋兒)'의 경우에 아(兒, 얼)화음이 아주 튀는 것이다. 마치 고의로 강조하는 느낌이다. 이외에 남경말도 이런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주원장이 등극한 이후에 아마도 그는 소북말을 했을 것이다. 그의 많은 관리들도 소북사람이었다. 명나라 초의 조정에서 관화는 당연히 소북말이 차지했을 것이다. 명성조 주체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에 북경말이 비로소 조정의 관화, 공용어로 되었을 것이다. 부도인 남경에도 정부기구는 다 갖추어져 있었고, 대량의 북방관리들이 내려와 있었으므로 북방말은 남경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하나는 남방에 있는 객가족과 객가말이다. 소위 객가인들은 외래인들이다. 그들은 오랜 옛날에 북방에서 전란을 피하여 집단으로 남방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객가말과 현지말은 많은 차이가 남아 있다. 객가말은 북방말의 발음을 많이 보존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아마도, 객가인의 이동을 연구하고 현재의 언어에 남아 있는 것을 연구할 때, 고대언어의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객가말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남방언어중에서도 고대언어의 발음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 보통화에는 '의상'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지 않는데, 이 단어는 당송시기에는 많이 쓰였던 말이다. 지금까지 강소절강일대의 방언중에서는 거의 '의복'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고 있고, 대부분 아직도 '의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방언에서 쓰는 '의상'의 발음은 보통화와 다르다. 방언에 있는 '의상'의 발음이 고대의 발음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이외에 참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주변국가의 언어이다. 특히 일본이다. 일본언어는 문자에서 발음까지 모두 중국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일본어의 형성은 대체로 중국의 당나라시기이다. 그러므로, 일본어의 발음은 아마도 당나라때의 발음을 많이 보존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어의 발음은 당나라시기 강소절강일대의 언어에 더욱 가깝다고 하기도 한다.

 

종합하면, 중국고대의 관방언어는 오랫동안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이것이 중요한 연구과제는 아니지만, 중국의 시가, 민간희극의 연구에는 많은 도움이 된다.

 

 

(작자: 劉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