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민기재남(民氣在南), 왕기재북(王氣在北)

중은우시 2006. 11. 20. 19:41

작자: 주여(周輿), 2006년 10월 21일

 

진(秦)나라 이래로 신주 2천년간은 하나의 치세와 난세의 교체사였고, 남북의 각축사였다.

 

재미있는 것은 납북간에 어떻게 싸우든지간에 백성의 기운은 남쪽에 왕의 기운은 북쪽에 있었다. 즉, 통일은 반드시 북방에서 이루었고, 반항은 항상 남쪽에서 일어났다.

 

진이 6국을 멸망시켰을 때, 가장 원한을 품고 있던 것은 남방의 초(楚) 사람들이었다. 초나라가 멸망하는 날에, 초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맹서했다고 한다. "초수삼호, 망진필초(楚雖三戶, 亡秦必楚, 초나라 사람이 세 집이 남더라도, 진을 망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초나라 사람일 것이다)" 이후 진승오광은 반란을 일으키며 장초(張楚)를, 초나라사람 항우는 회계에서 8천 자제병을 이끌고 거록에서 삼만정예병으로 장한의 20만 진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모두 묻어버렸다. 함곡관에 들어가서는 모두 불태워버려, 아방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중국에서 가장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남방인, 그리고 노예로 살기싫어 남방으로 도망쳐운 북방인이다. 진은 비록 6국을 멸망시켰지만, 진시황이 눈을 감으면서 바로 천하는 분열되었다. 첫번째로 통일강산을 이룬 것은 사실 초나라 사람들이었다. 동한말에 북방은 도탄에 빠져있었지만 남방은 안정되었다. 손권, 유비가 그래서 조조에 대항할 수 있었다. 서진이 멸망하고 동진이 남방에 자리잡아 북방과 대항했다. 비수지전에서 북방연합군을 무너뜨렸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남방에 자리잡고는 금과 대항했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는 남방인들이 가장 완강하게 저항했다. 양주십일, 가정삼도는 그 때 일어난 도륙사건이었다.

 

남방인들은 몇번 통일을 해본 적도 있다. 그러나 북방처럼 통일을 위한 통일이 아니라, 모두 '민기'의 연장선이었다. 즉, 남방인들의 통일은 모두 항거의 연장이었고, 정의로운 것이었다. 한번은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가 분봉을 한 때이다. 또 한번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것이다. 마지막 한번은 근대에 남방각성이 독립을 선포하고 국민당이 1927년 북벌에 성공하고 남경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진말, 원말에 반란을 일으킨데는 북방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모두 남방사람들이다. (회하유역은 초나라의 옛땅이므로 남방으로 취급할 수 있다). 청나라말기에 반란의 기치를 든 것이 누구인가? 바로 광동사람 홍수전의 태평군이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태평천국의 첫번째 지도자집단 홍수전, 양수청, 풍운산, 석달개등쁜아니라 자형산에서 기의한 훈구(노홍군)의 대부분도 객가인이다. '홍수전제이'라고 일컬어지는 손중산도 객가인이다. 북방에서는 그저 '황실의 명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의화단의 난이 고작이다. 남방의 호북신군은 군룡무수의 상황하에서 스스로 조직해서 혁명군에 가담하고, 북방의 북양육진은 원세개의 지휘하에 혁명을 진압하며 후에 북양군벌의 도구가 된다.

 

반드시 인정하고 넘어갈 것은, 정통적인 중국인, 더 많은 화하문화의 전통은 모두 남방에 있다. 객가인, 온주화, 민남화, 광동화를 말하는 사람들이다. 모두 보통화를 말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중국의 조상에 더 근접해 있다. 그들이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심지어 한쪽 구석에 살고 있는 나시족은 본민족의 문화와 한족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어, 이런 점에서 한족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남방인이 아무리 화하민족의 용감한 본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최종적으로 천하를 얻는 것은 북방인이라는 점이다. 진나라 이후에 북방에서 완성한 통일은 서진, 북송, 수, 당, 원, 청이 있다. 서진, 북송, 수의 통일은 북방이 남방의 할거세력을 제거한 것이고, 남방은 얼마되지 않아 투항하였다. 원이 남송을 멸하고, 청이 강남을 평정한 것은 북방소수민족이 한족을 점령한 것이다. 이 때 남방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북방은 확실히 왕기가 있는 것같다. 그것은 왜 그런가? 사실, 별 것도 아니다. 북방에 왕기가 있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북방에 민기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북방의 사람들은 잔혹한 통치를 겪었고, 야만민족의 정복과 혼혈을 겪었다. 자유도 점점 상실하고, 노예근성이 점점 더 강해졌다. 통치하기 쉽고 부리기 쉬웠던 것이다. 여기에 북경은 소농경작자들이 많고, 사람의 마음이 분산되어 있으며, 지세가 평탄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쉽게 전제적인 왕권통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동북사람은 하나하나 모두 살아있는 왕빠단이라는 말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필자는 이인전(二人轉)을 한번 보고는 한참동안 역겨웠었다. 남쪽은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이 부유하며,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일을 한다. 정복전쟁에 익숙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진나라와 같은 폭정이나, 몽고, 금, 만주족들이 침범할 때나 죽어라 항거할 뿐이다.

 

근대이래 남방인들이 사실상 중국역사를 주도했다. 근현대사에서는 유명한 인물들이 모두 남방 사람이다. 임칙서, 홍수전, 증국번,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손중산, 황흥, 송교인, 진독수, 장개석, 왕정위, 모택동, 등소평. 그리고 최근의 강산의 주인이 바뀐 것을 보아도 "남방은 민기, 북방은 왕기"라는 것이 입증된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남방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장정을 통하여 북방으로 도망친 다음에, 북방의 농민을 그들의 주력군으로 삼은 이후에 비로소 천하를 얻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