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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의 최초 작자는 조설근인가?

by 중은우시 2006. 12. 7.

작자: 연지풍(燕之楓)

 

홍루몽(紅樓夢)의 최초작가에 대하여, 홍학계에서는 논쟁이 매우 거세다. 청나라말기부터 논쟁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약 100여년간 계속되는 것이다.

 

홍루몽의 최초작가가 조설근(曹雪芹)이 아니라는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측면의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1회에서 공공도인(空空道人)이 돌에서 베끼고, 그 후에 석두기(石頭記)승록(情僧錄)으로 바꾸었으며, 나중에 동로(東魯)의 공매계(孔梅溪)가 풍월보감(風月寶鑑)으로 개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설근이 10년동안 피열(披閱)을 거쳐, 5번에 걸쳐 증보, 삭제하고, 목록을 작성하며, 장회를 나누고,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로 다시 개명하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서술을 근거로 조설근이 최초의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도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공공도인으로부터 조설근까지 이어지므로 조설은은 최소한 세번째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십수년, 혹은 수십년의 연구를 거쳐 홍루몽의 작가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어떤 사람은 홍루몽의 작가는 조설근의 연인인 설향옥(薛香玉)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홍루몽의 작가가 오매촌(吳梅村)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홍루몽의 작가가 황실후예인 지연재(脂硯齋)라고 한다.

 

둘째, 조설근은 옹정2년에 태어났는데, 그가  5살 때 집안이 가산몰수당하고, 조씨집안은 이미 쇠락하였으며, 평생을 빈곤하게 살아서 화려한 생활은 겪어보지를 못했고, ‘집안 기둥이 한꺼번에 와장창 무너지는 광경도 겪지 못했다. 조설근은 궁박하게 살았으므로 10년의 시간을 들여서 홍루몽의 원저를 만들 수 없었다고 본다.

 

필자는 홍루몽의 최초 작가가 그래도 조설근이라고 본다.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홍루몽 전80회의 작가가 조설근이라는 것은 홍루몽이 세상에 나타난 후 300년동안 연구자와 독자들이 같이 인정해온 것이다.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점에 회의를 가진 기간도 짧지는 않아서 100여년이다. 그런, 300년과 100년을 비교하면 역시 300년이라는 기간이 길고, 특히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가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주류의 학설을 형성하고 있다. 관점을 뒤집으려면, 반드시 진정하고 유력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증거와 관점이 논리적으로 맞아야 하며, 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충분하고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 이러한 증거는 단지 1개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고, 다른 결과를 나타낼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이 아니라는 주장을 보면 대부분이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정도이다. 필자는 홍학가가 아니고, 홍루몽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투입해서 이를 고증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그저 개인적인 의견을 나타낼 뿐이다.

 

둘째, 조설근이 옹정2년에 태어나고 5세때 가산몰수당하고 일생을 빈곤하게 살았으며, 귀족적인 생활은 누리지 못했으므로 궁중과 귀족생활을 써낼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작가는 반드시 스스로 체험한 것만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작가가 강도에 대하여 쓰려면 강도짓을 해보아야 하고, 기녀에 대하여 쓰려면 반드시 매춘을 해보거나 매음해야 한단 말인가? 모두 알다시피 현대작가인 조설은(曹雪垠)과 이월하(二月河)는 모두 이자성(李自成), 강희황제(康熙皇帝)라는 대작을 썼다. 조설근이 귀족생활을 누리지 못했으므로 홍루몽을 쓸 수 없었다는 논리가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조설근의 증조부 조새(曹璽)의 처는 강희황제의 보모였다. 강희제가 등극한 후, 조새는 강녕직조(江寧織造)를 맡아서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강희는 그 아들인 조인(曹寅), 즉 조설근의 조부를 소주직조(蘇州織造)에 임명했고, 나중에 강녕직조를 맡겼다. 조인이 어렸을 때 강희의 배독(陪讀)이었으니, 강희제의 신하이자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였으며, 강희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조인은 일세를 풍미했으며, 강희제 6차에 걸쳐 남순했을 때, 4번을 조인의 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었다. 조씨 집안은 이때가 최전성기였다. 바로 조씨집안의 선대가 청황조와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은 조설근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그가 홍루몽을 창작할 수 있는 좋은 바탕이 되었다. 조씨집안은 여러 차례에 걸친 가산몰수등으로 나중에 집안이 쇠락하여 빈곤하게 된다. 그러나 말라죽은 낙타도 말보다는 크다는 말이 있듯이, 끼니조차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부귀하고 귀족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는 없었지만, 그의 부모 친척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옛날 얘기를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도 족보라든지 여러가지 옛날 자료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조설근이 가난했으므로 이런 대작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아주 가소로운 주장이다. 역사상 문왕은 구속되었을 때 주역을 썼고, 공자는 어려운 상황에서 춘추를 썼으며, 굴원은 축출되었을 때 이소를 지었고, 좌구는 실명한 후에 국어를 썼고, 손자는 다리를 다친 후에 병법을 완성했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도망쳐서 여람을 지었고,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혀 있으면서, 설난, 고분, 3백편을 지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마음속에 배설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고, 세상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하였을 때, 글로 후세인들에게 남겨둔 것이다. 사실 역사이래 유명한 글들은 왕왕 이렇게 생활이 궁박하고, 억압받는 사람에 의하여 씌여졌다. 잘먹고 잘살면서 후세에 널리 알려진 글을 남긴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래서 조설근이 생활이 빈곤하여 홍루몽을 쓸 조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다. 바로 조설근은 이렇게 생활이 힘들었으므로 피를 토하면서 글을 완성한 것이고, 이런 과로로 인하여 젊어서 요절한 것이다.

 

넷째, 1회에서 쓴 것처럼 공공도인이 큰 돌에서 석두기를 베껴서 정승록으록 고치고, 나중에 동로의 공매계가 풍월보감으로 고쳤으며, 나중에 조설근이 도홍헌에서 10년간 피열한 후에 금릉십이채로 이름하였으므로, 조설근은 최초작가가 아니라, 그저 편집인에 불과하며, 공공도인과 공매계가 쓴 책을 기초로 편찬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인식은 약간 그럴듯한 점이 있다. 정승록과 풍월보감의 기초위에서 10년간 5차에 걸쳐 증보, 삭제하고, 목록을 만들고, 장회를 나누었다면 이것은 오리지날은 아닌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주장이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따져보면 성립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석두기, 정승록과 풍월보감의 3개의 원고의 기초위에서 증보, 삭제 수정을 하고, 목록을 만들고, 장회를 나누는데 10년의 기간이 필요한가? 석두기, 정승록과 풍월보감 이 세 개의 원고는 모두 어느 정도 성숙된 것일 것이다. 증보, 삭제, 윤색하고, 목록, 장회를 만드는데는 조설근과 같은 문학거장이 10년씩이나 세월을 쓸 필요가 있을 것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설근이 홍루몽의 최초 작자라면, 공공도인은 누구란 말인가? 공매계는 또 누구인가? 돌매이 위에 쓴 글은 누가 새긴 것인가? 혹은 석두기는 누가 썼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공공도인과 공매계는 모두 허구의 인물인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조설근은 홍루몽을 쓰면서 여러가지 수법을 사용했는데, 그중 은유를 사용한 것이 많다. “()”은 바로 없다는 말이 아닌가. 공매계는 공몰희(恐沒戱) 역시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그저 허구의 인물이지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조설근이 문자옥을 피하기 위하여 방패로서 앞에 둔 것이다. , 나는 이 책의 작자가 아니라, 그저 증보, 삭제하고 목록, 장회나 만들었을 뿐이라고

 

이런 점에서 조설근이 홍루몽의 최초 작가이며, 그는 당연히 저작권을 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