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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연구와 거촉(擧燭)

by 중은우시 2006. 11. 4.

작자: 관하몽(關河夢)

 

오늘, 옛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이것저것 얘기하다 홍루몽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심무(劉心武)를 거론했다. 그는 나에게 <<유심무게밀홍루몽(유심무의 홍루몽 수수께끼풀이)>>를 읽어보라고 극력 추천했다.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오랫동안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먼저, 나는 유심무의 시청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기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중의 약한 곳을 잡고, 대중의 엽기적인 심리에 영합하였다.

 

작년에 <<백가강단(百家講壇)>>을 볼 때, 유심무의 대중휘어잡는 실력은 알아본 바 있다. 그 때 그는 바로 진가경의 신세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얘기했고, 일반적으로 홍루몽을 읽어본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은 확실히 고혹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전문가들이 떠든 것에 불과하다.

 

유심무는 진가경의 침실의 배치로부터 그 주인의 집안이 대단할 것이라고 추단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작자가 유머스럽고, 과장된 어조로 독자들에게 주인의 품격을 말한 것일 것이다. 만일 그녀가 정말 황실출신이라면 어떻게 그 시아버지에게 붙들여, 간통의 피해자가 될 것인가(시아버지와의 간통이 그녀가 스스로 원한 것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점은 내가 근거로 하는 것은 문학적인 감각이지, 무슨 색인이 아니다. 그러나 감각은 아마도 착각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유심무는 <<백가강단>>의 강좌에서 더 볼 수 없었다. 마치 요리를 먹는 것처럼, 한번 맛을 보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비록 토해내지는 않지만 두번 다시 먹고 싶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견강부회적인 연구방법에 찬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과 하나하나 대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어쨌든 허구이다. 비록 그 근원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문학작품중의 인물은 그 원형이 존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것은 원형을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햄릿>>은 비록 덴마크왕자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따왔지만, 작자는 희극중에 자기의 영혼을 주입했다. <<로빈슨 크루소 표류기>>는 실존하는 해군의 이야기에서 따왔지만, 거기에 주입한 것은 작자의 혈액이다.

 

<<한비자>>에는 일찌기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개략 현대말로 바꾸면 이런 말이 된다. 갑이 을에게 편지를 썼다. 밤이라서 불빛이 어두었다. 갑은 노비에게 말한다. "촛불을 들어라(擧燭)"라고 말하면서 편지에 "거촉"이라고 쓰게 된다. 을은 편지를 받아보고 크게 깨닫는 점이 있게 된다. "거촉"이라는 것은 바로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여 임명하라는 말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편지를 쓴 사람의 원래의 뜻을 오해한 것이다. 그래서 한비자는 감탄하는 것이다. "현재 학문한다는 사람들이 대개는 이렇다"

 

그렇다. 작자가 문장을 쓸 때는 "작자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자기의 작품에 대하여 해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자유롭게 읽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 작품의 운명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읽는데 있다"

 

나는 홍루몽연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연구에도 길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 글자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사람들에게 남긴 정신적인 자산에 대하여 연구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현재의 홍학연구자들처럼 조설근을 묘에서 파내서 해부하고, 그의 최후를 연구하고, 그의 마지막 식사의 화학적 성분을 연구하여 대중에게 무엇을 먹어서 이런 문학거장이 나왔는지를 전달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은 안된다. 내 생각으로 만일 조설근이 지하에서 이것을 안다면, 그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갈기갈기 찢어발겨지는 것을 안다면 아마도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먹었던 죽까지도 토해내지 않을까?

 

그래서 홍학연구자들이 다시는 '거촉'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