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초기에, 해외에서 중국의 빈곤을 언급할 때면 이런 수치를 얘기하곤 했다. 중국의 국유자산은 2억위안이었는데, 해외의 화교자산은 미화4억달러이다. 당시의 환율로 계산하면, 이론적으로 해외화교들은 8개의 중국을 살 수 있었다.
1981년 10월 12일, 한 중앙정부지도자가 중산온천빈관으로 시찰을 왔다. 이 때 곽영동은 그에게 주택문제를 언급했다. "사람이 태어나면 국가는 그에게 주택 하나를 빚지게 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직공은 주택을 나눠받지만, 자기 것도 아닙니다. 업무가 변동되면 떠나야 합니다. 죽은 후에도 자녀에게 남겨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집하나씩 마련해주는 것은 국가의 엄청난 부담입니다. 국가와 개인 모두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계획경제가 성공하지 못한 하나의 예입니다" 그리고 곽영동은 그 자리에서 상품방(상품주택)과 토지유상사용에 대한 것을 건의했다.
곽영동의 건의는 1988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전인대를 통과했는데, 토지유상사용기간이 70년이었다.
곽영동이 대륙에서 상품방과 토지유상사용을 건의한 것은 원래 훨씬 전부터였다. 1979년 광주시 부시장인 임서(林西)가 관광사업시찰대표단을 이끌고 홍콩을 갔다. 2월 2일, 임서는 광주시위원회 초림의(焦林義) 서기에게 서면보고를 하면서 이렇게 썼다. "곽영동 선생등의 건의에 의하면 현재 많은 해외화교들은 광주에서 주택을 구입하여 친척들에게 주고싶어합니다. 그러나 국내에 자금이 제한되어 있고, 원자재가 부족하며, 건축하는 속도가 늦습니다. 그래서 홍콩에서 자금을 모으고, 원재료를 수입하여, 광주에서 주택을 짓고자 합니다. 그런 후 홍콩에서 판매하면, 국가는 외환을 버는 것이고, 해외화교의 요구도 만족될 것입니다. 그리고 광주의 주택부족현상도 완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곽영동의 당시 건의는 니우입해(泥牛入海,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로 들어간 듯)와 같았다. 임서등이 괜찮다고 한 의견이 거대한 장애를 만난 것이다. 곽영동등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1988년 3월, 전인대를 정식으로 통과한 70년토지유상사용방안에 따라 4월 해남도를 성으로 승격시켰다. 5월에 해남성정부는 일본의 웅곡조(熊谷組)와 양포(洋浦)의 합작개발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정식계획이 제대로 수립되기도 전에 1989년 1월 5명의 전국정협위원이 양포를 시찰했고, 공개적으로 양포의 토지를 70년간 외국에 빌려주는 것은 "상권욕국(喪權辱國)"이면 "신국치(新國恥)"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늑대를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라거나 "문을 열고 도둑을 들어오라고 하는 것"에 속하는 매국행위로 매도했다. 이후 북경에서의 양회(정협, 전인대)에서 전국정협은 의안을 제출하여 매국에 반대했다. 그래서 양포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해양의 제일선으로 중국해양면적의 2/3를 차지하는 해남성이 이로써 좋은 전략적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해남을 들썩거렸던 중국최대특구의 열기는 이로써 동결되었다.
임중이(任仲夷)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987년 요녕성 11개시, 90여개진의 도시인구는 모두 1022만이다. 해방30년동안 모두 3200만평방미터의 주택을 지었고, 1인당 평균 3평방미터의 주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건국초기인 1952년보다 0.6평방미터가 줄어든 것이다.
동일한 기간동안 1인단 주택면적(평방미터)는 전국이 3.6이고, 북경이 4.5, 상해가 4.5, 강소성이 4.7, 광동성이 4.6, 하남성이 4.2였다. 5개성은 3평방미터에 미치지 못했다. 세계수준과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국가건축연구원정보소의 자료에 따르면 1975년을 전후해서 루마니아가 8, 소련이 7.1, 일본이 10.4, 프랑스가 13, 서독이 16, 미국이 18이었다. 북한도 이미 6에 달하였다.
임중이가 말한 내용을 보면 충분히 설명되지만, 주택문제는 이미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개혁개방에서 주택개조문제는 일반백성들과 관계가 큰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토지유상사용이 중국의 개혁개방에 미친 영향은 컸다.
곽영동의 토지유상사용에 대한 건의는 실질적으로 1989년이후, 특히 등소평의 남순강화이후에 받아들여졌다. 이때부터 토지사용권거래, 토지임대, 도시토지준비금등 일련의 절차가 홍콩으로부터 유입되었다. 토지는 신속히 시장화되었다. 이로써 토지개발열기가 하나하나 일어났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천번지복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중국의 경제사회발전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어떤 역량도 '시장화'의 역량에 비할 수 없다.
또한, 시장화의 역량중에서 더떤 것도 토지와 주책의 작용과 비교할 수 없다.
(작자: pi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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