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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함풍제(咸豊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5. 7. 2.


(청황실의 비밀전위조서를 두었던 정대광명 편액)

 


도광제가 함풍제가 남긴 비밀입조의 유언 원본

(황사자 혁저를 황태자로 세운다. 황육자 혁흔을 친왕에 봉한다는 붉은 글이 보인다. 붉은 글은 황제만 쓸 수 있었다.)

 

중국의 청나라는 원칙적으로 태자를 두지 않고, 황자들 중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황제가 비밀리에 후계자를 정해서 자금성의 <<정대광명>>편액뒤의 금갑에 넣어서 보관해두고, 황제가 죽은 후, 금갑을 열어 후계자를 확인하고 옹립하는 방식이었다. 이로 인하여 역대 황제의 아들, 황자들간에 황위를 둘러싼 싸움이 치열하였다. 그 중에서도 도광제의 황자들간의 후계다툼은 재미있는 일면이 있다.

 

도광제는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었다. <<옥첩(玉牒)>>(황제의 족보)의 기재에 따르면 장자 혁위(奕緯), 2자 혁강(奕綱), 3자 혁계(奕繼), 4자 혁저(奕詝), 5자 혁종(奕誴), 6자 혁흔(奕訢), 7자 혁현(奕譞), 8자 혁합(奕詥), 9자 혁혜(奕譓)가 그들이다. 도광제 26년(1846)이 되었을 때 도광제는 이미 나이가 들었고, 아들중 첫째, 둘째, 셋째황자는 모두 사망하였고, 이제는 후계자를 정할 시기가 되었다. 이 때 남아 있는 여섯 황자중에서 넷째가 14살, 다섯째도 14살, 여섯째는 13살이었고, 일곱째 이하는 6살이하의 어린아이였다. 이 해 정월에 다섯째 혁종은 이미 순각친왕 면개의 양자로 보내어졌다. 이것은 도광제가 다섯째는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후계자경쟁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황위를 다툴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가진 것은 넷째 혁저와 여섯째 혁흔의 두 형제였다. 이 두 형제는 중국역사상 가장 치열한 황위다툼중의 하나를 전개한다.

 

불행한 것은 도광황제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혁저와 혁흔의 관계가 가장 가까웠다는 것이다. 혁흔은 비록 정귀비(靜貴妃)의 소생이지만, 정귀비는 입궁한 후 도광제의 총애를 받아왔고, 승급도 매우 빨랐다. 혁저의 생모인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가 사망한 후에 정귀비는 일찌감치 "육궁을 통할하는 권한"을 받았으며 위치는 황후의 바로 다음이었다. 만일 청나라의 규정상 3명의 황후외에는 더 이상 황후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 없었더라면 정귀비는 분명히 황후로 봉해졌을 것이다. 이외에 혁저와 혁흔의 관계는 가장 가까운 편이었다. 그들은 나이도 비슷하고, 어려서부터 함께 독서하고 무술을 익혔다. 황자들이 독서학습을 하던 "상서방(上書房)"과 원명원의 상재삼천(上齋三天)등의 장소에는 모두 그들이 경전을 읽고 역사서를 읊던 어린 소년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 자금성과 황가원림의 계단 아래에도 그들이 휘두르던 봉, 칼, 창과 그것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남아 있다. 오랜 동안의 공동학습생활에서 두 사람은 경전과 역사책을 많이 읽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 능하며, 시문에도 능한 황자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함께 창법 28식, 도법28식을 만들기도 하여 도광황제가 매우 좋아하였다. 나이든 도광황제는 특별히 창법에는 "예화협력(木+隸, 華協力), 도법에는 보악선위(寶鍔宣威)"라는 이름을 내려주어 두 형제의 협력합심을 비유하였다. 특히 혁저가 10살 때 생모인 효전성황후가 갑자기 죽자, 그는 혁흔의 생모인 정귀비에 의하여 길러졌다. 이후 두 사람은 더 가까와졌으며, 마치 동모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황제는 원래 과인이라고 부르듯이, 황위는 단지 하나뿐인 것을. 결국 누가 도광제의 진정한 총애를 받는 아들이 될 것인가, 누가 금갑에 이름을 남겨 황위를 이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조정내외에서 각종 추측이 난무하였다.

 

도광황제가 후계자를 선정한 것과 관련하여, 야사에서는 여러가지 얘기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첫째는 효정황귀비가 혁흔을 가장 총애하였기 때문에, 도광황제는 먼저 혁흔을 후계자로 정한 유지를 적었다. 그런데 글을 쓸 때 환관 하나가 계단 아래에서 훔쳐보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 맨끝 획이 특히 긴 것으로 보여서, 아마도 흔 자를 쓴 것이고 저 자를 쓴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이야기가 점점 퍼져가고, 도광황제가 그 말을 들은 후 불쾌하여, 다시 혁저로 바꿨다는 것이다.

 

둘째, 혁흔은 여섯째이고, 매우 총명하였다. 도광제는 그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몇번이나 황후소생인 혁저를 버리고 귀비 소생인 혁흔으로 후계자를 삼고자 하였다. 도광제가 사망할 때, 급히 명을 내려 여섯째를 불렀다. 공교롭게도 넷째인 혁저가 마침 도광제의 침궁에 문안인사를 왔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급히 부친에게 달려갔다. 도광제는 혁저를 보고는 가볍게 탄식을 하고 혼미한 중에도 여섯째는 아직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혁흔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광제는 사망하였고, 혁저가 즉위하였다. 이로 인하여 함풍황제(혁저)는 혁흔에 대하여 경계하는 마음을 갖고 혁흔을 중용하지 않고, 원명원에 거주하며 책이나 읽도록 하였다.

 

셋째, 혁저의 생모인 효전성황후의 생전에 황태후의 신분으로 도광제의 모친인 효화예황후와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고, 고부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녀는 귀비에서 황후로 승급된 후 얼마되지 않아서 바로 사망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독살당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때는 효화예황후가 있었고, 가법이 엄격하였으므로 도광제로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광제는 이를 매우 비통하게 생각하였고, 다른 비빈의 자식이 아니라 효전성황후의 자식인 넷째를 후계자로 정한 것이다. 이로써 억울하게 죽은 효전성황후의 망령을 위로하려는 것도 있고, 혁저가 자손들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넷째, 도광제는 만년에 혁흔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나라를 그에게 넘겨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후계자를 정하는 유지를 몇번에 걸쳐서 바꾸고자 하였으나 혁저 또한 현명하고 어질며 나이도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의 이야기는 분석하자면, 혁흔의 뛰어난 점은 총명하였다는 것이고, 혁저의 뛰어난 점은 적출이고 나이가 많으며 어미가 억울한 점이 있다는 점이다. 모두 어느 정도의 합리성이 있는 듯이 보이고, 근거가 있는 것이 보인다. 첫째와 둘째의 견해는 <<청패류초, 궁위류(淸稗類抄.宮위類)>>에 보이고, 셋째의 견해는 <<청패류초, 예제류>>에 보인다. 넷째의 견해는 <<청조야사대관(淸朝野史大觀)권칠(卷七)>>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만으로는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앞의 세가지 견해는 단지 야사에 나타날 뿐이고 그것도 길거리에서 얘기되는 것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고 추측한 것에 불과하므로 역사의 증거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네번째 견해는 비록 정사에 증빙이 있기는 하나<<청사고, 두수전전(淸史稿, 杜受田傳)>>, 망설이면서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여러가지 견해의 신뢰도를 판단하기 위하여는 도광황제가 대체 누구를 좋아하였는지에 대하여 관련문헌과 서류를 다 뒤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봉건사회의 혼인제도의 특색에 비추어 보면 황제집안의 혼인은 보통 정치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두 황자의 결혼상황은 이것을 약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사고. 문종본기>>와 <<청사고, 계량전>>의 기재에 따르면 도광제가 혁저에게 선택해준 여자는 제사업무를 책임지는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 부태(富泰)의 딸이었다. 혁흔을 위하여 선택해준 여자는 도통(都統)을 맡고 있던 권신인 계량(桂良)의 딸이었다. 이 사실은 도광제가 혁흔을 편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혁흔이 재능이나 지혜의 측면에서 혁저보다 뛰어났던 것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혁흔의 <<낙도당시문초(樂道堂詩文抄)>>와 그가 이후 정치경력에서 보여준 것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객관적으로 누가 유리하냐의 여부에 관한 것이고, 황위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의 노력도 더하고, 정치권모술수도 더해야 한다.  총명하고 능력있다는 것은 반드시 황위를 잇는 결정적인 조건은 아니고, 전제제도하에서는 후계자를 정하는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 재위하고 있는 황제의 이해득실관이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

 

도광제가 점차 나이들면서 혁저와 혁흔은 각자의 스승의 보좌하에 부친의 총애를 얻기 위해 경쟁하게 되고, 황제의 자리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들 형제의 총애다툼과 관련하여서는 두 개의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도광제 만년의 어느 봄날, 도광제는 황자들에게 명하여 황제를 따라 남원에 가서 사냥을 하도록 명하였다. 사냥은 청나라에서 아주 무(武)를 숭상하는 전통적인 활동이었다. 통상적으로는 황자의 기마, 사냥능력을 검증하는 하나의 시험이었다. 원래, 혁저는 자기가 기마, 사냥에서 혁흔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그의 스승인 두수전(杜受田))에게 물었다. 두수전은 정치적인 권모술수에 능하고 도광제의 심리를 읽는데 능하였다. 그는 혁저에게 말하기를 "황자께서 사냥터에 도착하면, 절대 창하나 화살하나 날리지 마십시오. 따라간 자들에게도 살아있는 생물을 하나도 붙잡지 못하도록 단속하십시오. 황제께 보고할 때, 황상께서 이유를 물으시면 단지 "시절이 봄이고, 새나 짐승들도 자식을 낳아 기르는 때인데, 차마 산 것을 죽여 천륜을 어기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마사냥에서 조금 나은 것을 가지고 형제들과 다투기도 싫었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말하기를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황상의 속마음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황자의 일생에 중요한 시기이니 절대 잊지 말고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혁저는 가르쳐준대로 하였고, 과연 도광제는 혁저의 말을 들은 후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진짜 황제가 하는 말이로다".

 

이 기록은 정사인 <<청사고, 두수전전>>과 <<청조야사대관>>권칠에 동시에 나타나므로 믿을만하다고 보인다.

 

혁저는 두수전의 계책에 따라 <<약점을 감추며 어질다는 것을 나타냄(藏拙示仁)>>으로써 먼저 점수를 따고 들어갔다. 뭔가를 하는 것이 뭔가를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또 한번, 도광제는 혁저와 혁흔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에 대하여 묻겠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명을 받은 후 각각 자기의 스승에게 물었다.

 

이 때 혁흔의 스승은 탁병염(卓秉염)이었다. 탁병염은 가경 7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재주가 있었고, 어린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유형의 선비였다. 경세치용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는 관직에 들어선 후 백성을 살피고, 여러가지를 혁신하여 승진이 비교적 빨랐으며 공부상서, 병부상서,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도광25년에는 경연직강, 체인각대학사가 되었다. 이 사람의 특징은 일처리가 신중하고 논쟁하기 좋아하는 것이었다. 구경회의제도는 군기처가 성립된 후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는데 도광시절에 구경회의를 열게 되면 보통 한 두명의 왕공이나 권세있는 재상이 대계를 결정하고 나머지 참여자들은 그저 듣고만 있는 것이었는데, 오직 탁병염은 정색을 하고 이치를 다투고 하여 다른 관료들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혁흔이 그의 의견을 묻자 그는 혁흔은 생각이 빠르고, 말솜씨가 있으며, 지적능력이 탁월한 것을 알고 충분히 재능을 발휘하는 책략을 세웠다. 혁흔에게 말하기를 "황상께서 만일 물으면, 아는 것을 전부 말하고, 말을 아끼지 말라"고 얘기했다. 반면에 두수전은 혁저에게 말하기를 "황자께서는 만일 시국이나 정사에 대하여 얘기하기 시작하면 절대 6황자를 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대책이 있는 데, 황상께서 만일 스스로 늙고 병들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얼마되지 않아 이 자리를 물려줘야겠다고 말씀하면, 황자께서는 그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부친에 대한 지극한 정을 표시하시면 됩니다." 그 뜻은 결국 황상이 자기가 곧 죽을 거라고 얘기하면, 국가통치에 관한 사항을 묻기 전에 그저 땅바닥에 엎드려 울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혁저는 그의 계책에 따랐고, 이것은 도광제로 하여금 혁저가 효자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후에 함풍제가 되는 혁저는 스승의 도움하에 <<약점을 감추고 효성을 나타내는(藏拙示孝)>>방법으로 또 점수를 얻었다. 말하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것은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단지 야사에 보이기는 하지만, 이 두개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논리는 비슷하다. 묘술한 도광제의 성격특징도 일치한다. 특히 이후 함풍황제는 두수전에 대하여 매우 융숭하게 대접한 반면, 공친왕(혁흔)은 탁병염에 대하여 그저 그렇고 냉담하게 대한 것에 비추어보더라도 두수전과 탁병염이 황자의 황위다툼에서의 행위나 실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광 30년(1850년)에 내우외환에 수년을 고생하던 도광제가 결국 목숨이 다하였다. 혁저와 혁흔의 황위다툼에도 끝이 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청황실의 비밀서류를 보면, 진실한 답안과 전설의 약간의 실상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광황제의 비밀유조의 서류는 다행히도 보관되어 오고 있다. 이것은 유일하게 존재하는 비밀유조의 진귀한 서류와 실물이다. 사람들이 중국 수천년의 봉건사회중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황제가 직접 손으로 쓴 전위유서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서류는 중국제일역사당안관의 가장 중요한 보물중의 하나이고, 이미 중국당안문헌유산목록에 올라 있으며,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자 신청하였다.

 

이 비밀유조의 서류와 실물은 :

 

남목귤갑 1개, 길이 33센티미터, 넓이 17센티미터, 두께 8.5센티미터. 바깥은 황색양피로 덮여 있음.

 

내장주갑 1개, 위에 봉조(봉한 글쪽지)의 잔흔이 남아 있음.

 

주유(朱諭) 1장. 위에는 ""황4자 혁저를 황태자로 삼는다. 너희 왕 대신들은 짐의 말에 따라, 마음을 합하여 보좌함으로써 국가경제와 백성생활을 중시하고..." 라고 쓰여 있으며 이것은 신덕당이라는 표지가 끼워져 있다. 신덕당 표지와 글자에 힘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상유당>>, <<청선종실록>>의 기재로 보아서는 이 주유는 도광 30년 도광제의 사망직전에 원명원의 신덕당에서 친필로 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으로 보면 이 주유는 원래 금갑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중신들에게 읽어준 후 금갑안의 다른 서류와 같이 넣어서 보관해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저유지 1장. 만주어와 한어로 쓴 "황4자 혁저를 황태자로 세운다"는 글과 한어로 "황6자 혁흔을 친왕에 봉한다"는 글은 만주어가 없다. 안의 봉투에는 "도광26년 6월 16일"이라고 적혀 있고, 도광황제의 서명이 있다. 바깥 봉투에는 만주어로 "만년"이 쓰여 있고 서명이 되어 있다.

 

이외에, 2장의 사후 처리할 사항에 대한 유언서가 있다. 한 부는 "어전대신군기대신공동수계"로 하여 봉조를 붙이고 위에는 서명이 있고, 다른 한 부는 봉투에 봉조가 있으며 "도광지보"라는 ㅣ재와 "봉"이라는 기재가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도광제는 죽기 직전에 친히 주유를 작성하는 동시에 비밀유조의 유지와 후사에 관한 유언을 남겼고, 이것이 함께 군기처초록의 <<상유당>>에 기재된 것이다.

 

이 비밀서류중 가장 가치있는 것은 도광황제의 비밀입저의 유지와 임종전의 주유이다. 비밀입저의 유지에서 시간을 알 수 있을 뿐아니라, 혁저를 황태자로 봉함과 동시에 혁흔도 고려하였다는 것이다. 이 한장에 담은 두가지 유언이라는 특례는 사람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다. 이외에 도광황제는 임종전의 주유중에서 다시 한번 "황4자를 황태자로 세우니, 너희 왕대신등은 짐의 말에 따라..."라는 말을 적었다. 혹시 이 때 대신중에 후계자에 대하여 이의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혁저가 황위를 승계하는데 관하여 파란이 없지는 않았다는 점은 정국균의 <<하향당쇄언>>에 나타나 있다. 거기에 적은 바에 의하면 도광제의 병이 위중할 때, 군기대신 8인이 침궁으로 불려왔고, 금갑을 꺼내라고 명하였다. 당시 혁흔의 모친인 효정황귀비는 암중으로 환관들에게 명하여 제신하들이 금갑을 받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신들이 주저하고, 감히 금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도광제는 대노하여 손으로 책상을 쳤다. 대신들이 그제서야 갑을 받아서 열어보니, 혁저를 황태자로 세운다고 되어 있었다.

 

이 기재는 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도광제의 신변에 있는 중신중에는 두수전이 있었고, 도광제의 병이 위중하여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신덕당에서 군기대신대학사인 두수전은 기준조, 상서 하여림, 시랑 진부은, 계지창등과 함께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므로 도광임종시의 수명을 받을 때 반드시 그도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야 망설인다고 하더라도, 그는 절대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만일 망설였다면 후에 그렇게 함풍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참석했던 다른 중신들은 후에 함풍황제로부터 아주 냉담한 대우를 받았던 상황에 비추어보면, 도광황제가 "너희 황공대신등은 짐의 말에 따라..."라는 말을 굳이 다시 한번 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