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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은래)

주은래는 왜 후손을 두지 못했는가

by 중은우시 2006. 9. 24.

1924년 7월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 주은래는 , 9월 광주에 도착했다. 비록 귀국전에 등영초(鄧穎超)와 서신을 통하여 사랑을 확인하였지만, 귀국후 반년동안 등영초와 한번도 만나지를 못했다. 1925년 1월, 주을내는 북방구위원회 위원 고군우에게 부탁하여 멀리 천진에서 천진지방위원회 부녀부장을 맡고 있던 등영초에게 편지를 가져가달라고 부탁해서, 사랑의 정을 나타냈다.

 

1925년 8월초, 21세인 등영초는 상해에서 광주로 왔다.

 

5년동안 만나지 못했던 애인이 자신을 만나러 왔지만, 당시 광동구위원회에서 대파업을 조직하고 있던 주은래는 시간을 내서 항구로 애인을 만나러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비서인 진경(陳庚)에게 등영초의 사진을 주어 항구로 나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붐비는상황에서 등영초가 진경을 만날 수는 없었다. 물설고 낯선 그녀는 할 수 없이 통신주소를 가지고 주은래의 주소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애정관계는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다. 혼인대사는 주은래와 등영초도 무슨 결혼식같을 것을 준비하지는 못하였다. 전부 간단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황포군관학교의 많은 동료들은 이 일을 알고 있었고, 신부를 만나고 싶어 하였고, 한번 손님들을 불러서 회식을 하자고 요구했다. 그래서, 8월 8일, 주은래는 입당소개인인 장신부가 광주 북경로상의 태평관 2층에서 사람들을 초청하여 서양식의 간단한 도시락을 먹었다. 이 서양식 도시락은 바로 주은래와 등영초의 결혼피로연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피로연에 참여했던 사람들중에는 당시와 나중에 아주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많았다. 국민당의 등연달, 하응흠, 전대균, 장치중등이 있었고, 공산당의 혼대영, 진새, 장완화등이 있었다. 금방 광주에 도착한 이부춘과 채창고 황급히 와서 참석하였다 .결혼피로연때, 모두 신혼부부를 위하여 술을 권하고, 주은래도 3병의 브랜디를 마셔서 술에 대취하였다.

 

6년간 서로 사랑했고, 5년간 헤어져 있었는데, 이제 서로 뜻과 의기가 토합한 전우는 마침내 한 쌍의 부부로 맺어졌다. 이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마도 그저 크게 취함으로써 그들의 내심의 행복과 기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결혼후 다음 말, 주은래는 대파업을 지휘하느라고 바빴다. 등영초는 당조직의 명에 따라 공산당 광동구위원회에 근무했다. 혁명의 길은 위험이 충만하다. 1927년 4월, 중국에는 풍운의 변화가 막측했다. 국민당, 공산당의 양당은 장개석의 배신으로 인하여 돌연 관계가 악화되었다.

 

명을 받아 공산당 상해구위원회 서기로 이동한 주은래는 짧은 3개월의 기간내에 상해노동자의 3번에 걸친 의거를 성공적으로 조직하고 이끌었다. 전력을 다해서 노동자를 조직하여 장개석의 피의 진압에 항거했고, 혁명의 곤경을 겪고 있었다. 그이 처인 등영초는 광주에서 독일인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힘든 난산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또 다른 인생의 곤경을 겪고 있었다. 이번은 그녀와 주은래 사이의 두번째 아이였다.

 

이 전에 그들은 결혼후 얼마되지 않아. 등영초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은래의 업무가 너무 바쁜 것을 보고, 그녀 또한 광주에 와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고 임무도 많아서, 아이를 낳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학, 스스로 결정해서 그녀는 탕약을 먹고 아이를 유산시켰다. 낙태에 대하여 주은래의 동의를 받지 않았고, 탕약을 먹은 후 출혈이 심하여 하마터면 생명이 위험할 뻔했다. 등영초는 주은래로부터 심하게 질책을 받았다. 주은래는 그녀에게 아이를 낳는 것과 혁명업무가 대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이는 죄가 없고, 혁명가의 아들도 생존의 권리는 있다고 하였다.

 

등영초는 주은래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아이를 반드시 낳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뱃속의 아이는 정상체중을 넘어섰다. 그녀는 침대위에서 삼일 밤낮을 누워 있었다. 당시의 산부인과는 아직 개복수술을 하는 단계가 아니었고, 아이를 집게로 산도를 통하여 강제로 꺼내는 방법만을 쓰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머리에 손상을 입어서, 낳자마자, 땅바닥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불행히 요절하고 말핬다.

 

이번 난산의 대가는 컸다. 등영초의 마음에 극도의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아니라, 그녀의 몸을 철저히 상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인의 전통관념에는 "불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제일 크다". 주은래는 속세를 떠난 사람도 아니고, 정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도 집안에 후손을 두기를 매우 원했고,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일생에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등영초를 위로했다. "아이가 없으면 그냥 아이없지 지내지 뭐."

 

친아들이 없던 그는 온천하의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 생각했다. 그는 일생동안 사랑을 더 많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