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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즘7

야율대석(耶律大石): 서요(西遼)의 개국황제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요나라는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주로 등 일련의 희극때문일 것이고, 이들 희극의 결론은 당연히 마지막에는 항상 중화왕조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실제상 요태후(遼太后) 소연연(蕭燕燕)을 우두머리로 하는 요나라는 송나라를 마구 두들겨 팼다. 송태종 조광의가 엉덩이에 화살을 맞고서 나귀수레를 훔쳐타고 낭패해서 도망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양가장중의 주인공인 양노령공을 생포한다. "전연지맹(澶淵之盟)"이후 송나라는 매년 요나라에 공물을 바쳤고, 그제서야 쌍방은 전쟁을 멈춘다. 이때가 요나라의 전성기이고, 영토는 '폭원말리(幅員萬里)"라 칭했다. 아쉽게도 그 이후의 요나라황제는 계속 그 전보다 못하게 되어 요흥종(遼興宗)이 즉위한 후 요나라의 국세는 날이갈수록.. 2021. 12. 27.
서하(西夏): 신바하게 사라진 고대국가, 글: 문재봉(文裁縫) 1909년, 제정러시아의 대령이자 러시아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코츠로프는 완전무장하 '탐험대'를 이끌고, 야생동물을 고찰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중국 내몽골의 흑성(黑城)으로 간다. 목적은 바로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전설상의 보물.. 2019. 1. 18.
역사속에 묻혀버린 서요제국(西遼帝國, Kara Kitan) 글: 황수(黃帥) 1211년(서요 천희34년) 가을, 후시호르도(虎思斡爾朶,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부라나성)의 날씨는 여전히 매우 더웠다. 서요황제 야율직로고(耶律直魯古)는 자신의 점점 늙어가는 신체를 보면서, 더 이상 거란선조의 위업을 재건할 용기와 결심이 서지 않았다. 황궁안에서는 .. 2019. 1. 6.
야율초재(耶律楚材): 징기스칸은 왜 그를 중용했는가. 글: 황수(黃帥) 1211년, 징기스칸의 철기(鐵騎)가 야호령(野狐嶺)에서 금나라군대와 격전을 벌일 때,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겨우 21살이었다. 그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금나라 황제와 함께 곧 중원으로 쳐들어올 몽골인을 격퇴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역사의 저울은 이때 이미 몽골인에게 기울어 있었다. 수십년간의 향락과 소비로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자손들이 지탱해온 국가는 사상유례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야호령 전투에서 금나라군대는 정예병을 모조리 잃는다. 심지어 황제 금선종(金宣宗)마저 남으로 도망쳐 변경(지금의 개봉)으로 간다. 일시에 금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공포분위기가 중원의 대지를 감싸게 된다. 야율초재는 몽골인과 더욱 거리가 가까웠던 중도(中都)에 남는다. 즉 지금의 북경이다. 이곳은 여.. 2018. 12. 19.
오고타이: 몽골전통과 중원문화가 만나면서 후계자에 오르다.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징기스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주치, 차남 차가타이, 삼남 오고타이, 사남 톨루이. 네 아들 중에서 주치(몽골어로 '손님'이라는 의미임)를 제외하고는 모두 징기스칸의 친아들이다. 네 아들은 모두 각자의 장점을 지니고 있고, 모두 영웅호걸이었다. .. 2018. 11. 23.
징기스칸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일대천교(一代天驕) 징기스칸의 능원건축은 아름답고 광활한 오르도스고원에 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누런 모래와 풀밭 사이에 3개의 몽고파오식의 궁전이 거기에 세워져 있다. 주홍색의 문, 밝은 색의 벽, 금황색의 유리보정(寶頂)은 완전히 옹용(雍容), 전아.. 2018. 5. 9.
고대의 유목민족 중에서 몽골족만이 세계정복자가 된 이유는? 글: 격격미(格格米) 징기스칸 휘하의 몽골철기(蒙古鐵騎)는 '세계정복자'라는 위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품는다: 만일 몽골인들이 유목민족의 마쾌궁강(馬快弓强)의 장점을 이용하여 세계를 정복하였다면, 왜 그렇게 많은 유목제국들 예를 들어, 흉노, 유연, .. 2018.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