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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교목6

<모택동선집(毛澤東選集)>의 저작권문제 글: 백매(白梅) 1995년 6월 중순, 중공중앙문헌연구실,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중공중앙당교는 중앙서기처와 공동으로 을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의 1권 내지 4권의 160여편의 글 중에서, 모택동이 집필초안한 것은 단지 12편 뿐이며, 모택동의 수정을 거친 것이 모두 13편이고, 나머지 글들은 모조리 중공중앙의 다른 지도자, 혹은 중공중앙판공청 및 모택동의 비서등이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에 수록된 '저작'들은 대부분 중국공산당이 서로 다른 시기에 각종 서신, 전보, 문건, 그리고 지도자의 강연원고를 모아서 완성된 것으로, 원래 '해방구'에서 소책자로 인쇄되어 돌려보던 것이었다. 194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동북해방구'의 하르빈과 같은 도시에서는 이들 소책자를 묶어서 두꺼운 으로 편찬했다. 신.. 2023. 3. 28.
이예(李銳): 3차례나 숙정당한 모택동의 비서 글; 왕우군(王友群) 일찌기 모택동의 비서를 지냈던 이예는 일생동안 3번에 걸쳐 숙정을 당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나 수명은 길어서, 102살까지 살았다. 이예, 1917년 4월 13일생, 베이징 출생. 조적은 호남(湖南) 평강(平江)이며, 무한대학을 졸업했다. 일찌기 중공중앙위원,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수전부 부부장, 모택옹의 겸임비서를 지낸다. 이예는 삼협공정을 반대한 대표적 인물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당시 중공지도자 장쩌민에 의해 묵살된다. 이예의 제1차 숙정 1943년 4월에서 1944년 9월까지, 중공의 연안정풍(延安整風) 후기의 '창구운동(搶救運動)'중 이예는 1년2개월간 구금된다. 당시는 항일전쟁이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중화민국 임시수도 중경은 자주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을.. 2020. 11. 2.
오함(吳唅): 개인의 비극에 그치지 않는다.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문혁'을 회고하는 글에서 반드시 언급해야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전 북경시 부시장이자 명사(明史)전문가인 오함이다. 1965년 11월 10일 요문원(姚文元)은 기수 강청(江靑)의 뜻을 받들어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라는 글을 상해 <문.. 2019. 5. 27.
모택동비서 전가영(田家英)의 사망진상 글: 양성만보 2010. 10. 9. 전가영은 1966년 5월 23일에 사망한다. "문혁"이 시작된 후, 등탁(鄧拓)에 이어 두번째 희생자이다. 전가영은 한을 품고 죽었다. 이 점은 의문이 없다; 그리고, 전가영이 자살한 것인가에 대하여도 의문이 없다 -- 관방이건 가족이건. 다만, 최근 들어 해외의 잡지에서.. 2013. 12. 21.
중국현대신문사상의 "양대유파" 글: 조세룡(趙世龍) 정신계인비교자(精神界人非驕子) 윤락감가이우사(淪落坎坷以憂死) 섭감노(聶紺弩)의 이 싯구는 1949년이후 지식인들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신문계의 사람은 정신세계중 가장 민감하고 가장 정치사회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난감한 처지에 빠지고, 걸핏.. 2012. 8. 16.
모택동의 비서들 모택동의 몇몇 주요한 비서는 모두 그가 발견하거나 뽑은 사람들이다. 모택동의 비서를 뽑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학문"이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호교목(胡喬木)의 선발은 모택동이 호교목이 <<중국청년>>잡지에 발표한 54운동20주년기념글을 보고서 "교목은 인재다"라고 하며, 직접 이름.. 2006.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