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현 14

광서제(光緖帝)는 왜 사진을 남기지 않았을까?

글: 지식거륜(知識巨輪) 사진은 그 사람의 일생을 남기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1843년 사진기가 발명된 이래, 서양의 상류층인사들은 자주 이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사진기가 청나라에 전래된 후, 서태후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지금도 우리는 서태후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서제의 경우는 몰래 찍은 사진 한장만 남아 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광서제는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황제이다. 그의 일생은 전설적이면서도 비참하다. 1874년, 동치제(同治帝)가 죽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 서태후는 조정대신들과 긴급회의를 열었고,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아들 재첨(載湉)이 황위에 오르도록 결정한다. 그 말을 듣자 혁현은 땅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

순친왕부(醇親王府):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한 청나라 최고의 왕부

글: 소태양(小太陽) 청나라의 순친왕부에서는 일찌기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했으니, 청말 수십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왕부라 할 수 있다. 그 기세와 씀씀이는 다른 왕부를 훨씬 넘어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순친왕부의 씀씀이를 통해서 우리는 개략 청말제일왕부가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 순친왕부의 출현 만청입관(滿淸入關,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에 자리잡다)후, 더 이상 명나라의 제도와 같이 왕실을 전국각지에 분봉(分封)하지 않았지만, 황실내에 여러 왕야(王爺)를 분봉한다. 그들이 획정한 엄격한 등급제도를 보면, 여러 작위들 중에서 오직 친왕(親王)과 군왕(郡王)의 부저(府邸, 집)만을 "왕부"라 부를 수 있었다. 그보다 아래 등급인 패륵(貝勒), 패자(貝子)..

중국은 왜 일본보다 자체 은행설립이 20년이나 늦어졌을까?

글: 건안(建顔) 1897년, 중국근대 최초의 중국계자본은행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최초 일본계자본은행인 미쓰이은행(三井銀行)은 1876년에 일찌감치 설립되어 있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20년이 늦은 것이다. 중국최초의 중앙은행인 호부은행(戶部銀行)의 설립도 일본에 비하여 20년이 늦었다. 기실 일찌기 1885년에 이홍장(李鴻章)과 순친왕(醇親王)의 두 거물이 손을 잡고 두 차례에 걸쳐 조정에 근대은행설립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후세에 보기에 국가와 민족에 이로운 이 건의는 일군의 '애국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설마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비애국적이란 말인가? 1. 두 거물이 관영은행의 설립을 주장하다. 1860년대, 서방의 공업문명이 동아시아로 물밀듯이 밀려..

하나의 민족에게 최대의 비애는 무지(無知)가 아니라, 무지를 자랑이라 여기는 것이다.

글: 뇌이(雷頤) 역사는 사악한 선생이다. 단지 자유인에게만 진상을 말해주어서, 오직 자유인만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자격과 능력이 있다. 서방을 배우는 학습과정에서, 근대 중국인들은 시종 진정한 문제를 찾지 못했다. 소위 남원북철(南轅北轍)이다. 방향이 틀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헛일인 것이었다. 이하지방(夷夏之防) 아편전쟁때, 임칙서(林則徐)는 광동으로 가서 방어를 했다. 다만 그는 영국인을 전혀 몰랐고, 적의 상황에 대하여도 전혀 몰랐다. 당시 서양인은 무릎을 굽힐 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누가 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모두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임칙서도 믿었다. 일찌기 외국사신이 건륭제를 만날 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은 그들이 무릎을 꿇기 원치 않는 것이..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글: 풍현일(馮玄一) 광서제는 청나라의 제11대황제이다. 그의 이름은 애신각라 재첨(載㵇)인데, '첨'자는 물리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의 성격과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화상(畵像)을 보면, 그는 문약하고 청수(淸秀)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 ..

영년(英年): 서태후가 총애한 풍수가

글: 포강객(浦江客) 광서24년(1898) 팔월 초엿새,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변법을 시행하는 광서제는 영대(瀛臺)에 연금하고, 훈정(訓政)이라는 명목으로 최고권력을 다시 장악한다. 기실 1년전에, 대권을 놓칠까 우려하던 서태후는 이미 광서에제게 손을 쓴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칠왕분(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