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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29

자영(子嬰): 조고를 가볍게 제압하고, 항우에게 목숨을 잃다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진나라는 진이세(秦二世)로 멸망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삼세(秦三世)를 언급하기도 한다. 진삼세라고 불리는 사람은 바로 자영이다. 그러나 그는 조고를 죽이고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일 이외에 다른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를 진삼세로 언급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그가 즉위하기 전에 이미 진(秦)이 스스로의 지위를 낮추어 황제의 칭호를 취소하고, 진왕(秦王)으로 자칭하였으며, 통일전의 각 제후국과 같은 지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각국으로부터의 적대감을 약화시키고, 당시 제후들이 참여한 의군의 공격을 중단시키고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황위를 가지고 따진다면 진나라는 확실히 진이세로 끝난 것이다. 진한교체기 혹은 초한전쟁의 전날, 이 자영은 실제 아주.. 2021. 1. 25.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왜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선택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서주(徐州)의 옛 명칭은 팽성(彭城)이다. 요(堯)임금이 팽조(彭祖)를 대팽씨국(大彭氏國)에 봉했는데, 팽성은 바로 대팽씨국의 도성이었다. 나중에 상(商)의 주왕(紂王)에 멸망했다. 춘추시기에 팽성읍은 송(宋)나라에 속했다. 팽성은 송나라의 중요성읍이다. 왕왕 제후들이 쟁탈하는 목표가 되었다. 기원전 207년 십이월, 항우는 여러 제후의 병력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을 격파하고 진왕조를 멸망시킨 후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오르고, 팽성을 도읍으로 한다. 그는 패주의 신분으로 전국을 18개왕국으로 나누어 제후, 부장(部將)과 항장(降將)을 왕으로 삼는다. 그런데, 왜 항우는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선택했을까? 항우가 함양으로 들어가 진나라황궁을 불태워버릴 때, 어떤 참모는 그에.. 2020. 7. 15.
소하(蕭何): 진말 영웅각축의 최대의 승리자 글: 곽천민(郭天民) 기원전209년, 얌전하게 농사나 지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부귀'를 꿈꾸던 농삿꾼 진승(陳勝)이 마침내 마음 속의 불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900여명의 수졸(戍卒)을 이끌고 반란의 깃발을 내걸었다. 이는 진나라통치의 철의 장막의 한 부분을 찢어버리는 것이었고, 동.. 2019. 9. 16.
초회왕과 여러 장수들간의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사람을 왕으로 봉한다"의 약속의 존재여부 글: 정보(程步) 유방이 왜 험난한 길을 걸어 함양으로 공격해 들어갔는지에 관하여 원인으로 얘기하는 한가지는 바로 초회왕(楚懷王)이 여러 장수들과 약정하기를,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사람을 왕으로 삼는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항우는 진군이 그의 숙부인 항량을 죽였으.. 2019. 1. 27.
진시황은 왜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했을까? 글: 유전록(柳傳錄) 진시황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황제이다. 한단(邯鄲) 출신이니 하북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그의 고향은 하북이 아니다. 그가 봉선지로 태산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중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 기원전221년,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그해에 서둘러 태산.. 2019. 1. 9.
CCTV <국가기억-진병마용탐비: 병마용주인>은 착오백출(錯誤百出)이다. 글: 진경원(陳景元) 진용관(秦俑館)의 고고학자들은 단언한다. "시공(寺工)"이라는 관서(官署)는 진시황2년에 설립되었다고. 그 목적은 이를 통하여 병마용갱의 '시공'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것은 모조리 진시황2년이후에 제조된 병기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함양박물관.. 2018.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