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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관쇄국8

역사연구원의 "폐관쇄국유리론"을 비판한다. 글: 욱풍(郁風) 최근 이라는 제목의 글이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다. 문장의 결론은 전통적인 "폐관쇄국으로 중국이 근대에 낙후되었다"는 관점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특정시기 유럽중심주의영향하의 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정책은 반침략, 반식민, 반해외적대세력간섭, 반문화침투의 적극적인 작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장의 원문은 이러하다: "우리는 명청시대의 중앙정부가 취한 것은 '자주한관'의 대외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보자면, 개방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떻게 개방할 것인지, 개방범위는 얼마나 넓힐 것인지는 국가주권범위에 속한다. 국내외의 일부학자들이 간단하게 그것을 '낙후'하다고 배척하고, '야만'스럽다고 질책하며 심지어 소위 '국제법'에 위반된다고 주.. 2022. 9. 8.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자주한관'정책의 한계성 6. '자주한관' 정책의 한계성 비록 명청정부의 '자주한관'정책은 외래침략을 방어하는 일면이 있고, 중외교류를 가로막지는 않았지만, 이 정책이 완전히 정확했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그 한계성은 아주 분명하다.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한편으로, 소극적인 방어가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다. 16-19세기 서방식민침략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계속 중국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데, 명청통치자들은 이 역사적 대변국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나 과학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전통의 조공체계에 만족하면서, '천조상국(天朝上國)'으로 자처했고, 마음 속으로 대외왕래를 제한하거나 감소시키면 천하태평이 올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일구통상'이후 거대한 이익을 얻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해금을 실시한 .. 2022. 9. 8.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명청시대 중앙정부의 대외정책 4. 명청시대 중앙정부의 대외정책 서방식민세력이 점점 압박해 들어오자, 명청 두 왕조의 통치자는 군사, 경제, 문화등 서로 다른 층면에서 일련의 정책을 취한다. 먼저, 군사적으로 서방국가에 대한 방비를 강화한다. "입중외지대방(立中外之大防)". 명나라 정덕연간, 포르투갈사신단이 베이징에서 쫓겨난 후, 중국과 포르투갈의 관계가 악화된다. 가정원년(1522년), 포르투갈선단이 중국연해로 들어갔다가 중국관병에 제지당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서초만지역(西草灣之役)"이 발발한다. 이 사건은 명나라통치자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외이(外夷)'에 대한 불신감을 증가시켰다. 그후 명나라는 연해지구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다. "혁도선(革渡船), 엄보갑(嚴保甲), 수포간민(搜捕奸民)" 해방의 관병을 정돈하고.. 2022. 9. 8.
"명청시대폐관쇄국문제신탐": 폐관쇄국 개념의 기원과 변천 2. "폐관쇄국" 개념의 기원과 변천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문헌에서 '폐관쇄국'에 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중국전통의 역사개념이 아니다. 17-19세기 서방인은 중국을 묘사할 때 '폐관쇄국'과 대응하는 말을 내놓지 않았다. 중국이 상대적으로 서방의 주변에 있다는 지리적위치로 인하여 서방인들은 자주 중국이 일종의 세계와 '단절된(isolation)' '고립된(seclusion)' '외부영향을 받지 않는(hermetic)' 상태로 인식했다. 여기의 '단절'과 '고립'은 왕왕 '폐관자수(閉關自守)' 혹은 '폐관쇄국'으로 번역되었다. 확실히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 개념은 서방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폐관쇄국"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것의 의미는 또 무.. 2022. 9. 8.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학술계의 "폐관쇄국" 및 관련이슈에 대한 토론 글: 중국역사연구원과제조(중국역사연구원 2022년 제3기) 여하한 정책도 모두 시대의 산물이다. 명청시기, 세계는 자본주의상승기에 처해 있었고, 서방열강은 전세계에서 식민지확장의 과정을 가속화했다. 국제환경의 사상유례없는 거대한 변화,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방의 식민붐에 직면하여, 명청 두 왕조의 중앙정부는 이에 적응하는 대외정책을 채택한다. 민국시대이래, 명청의 중앙정부의 대외정책은 시종 국내회학계에서 토론하는 중요이슈였다. 학술계에서 주류를 점하는 견해는 명청 두 왕조의 중앙정부가 '폐관쇄국'정책을 취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전면적으로 나라의 문을 걸어닫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학술견해의 배후에 숨은 핵심문화개념은 봉쇄(封鎖)와 개방(開放), 야만과 문명의 이분론이다. 특정시기 유럽중심.. 2022. 9. 8.
중일관계의 역사원류 글: 유사하(流沙河) [이 글은 2014년 12월 28일, 유사하가 성도 만상서성 서서불서점에서 한 강연이다. 유사하는 정말 당세의 살아있는 보물이다. 그의 박학한 역사지식과 깊이있는 인문견해는 전체강의동안 조용하게 만들었고,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은 녹음.. 2015. 2. 10.
청승명제(淸承明制): 진실한 거짓말 작자: 미상 1644년, 이자성이 북경성을 함락시키고, 숭정제는 자살순국하며 명왕조는 멸망한다. 그후, 오삼계는 산해관을 만청에 바치고, 만청은 중원으로 들어와서 주인이 된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흥한다. 명왕조 중말기때 경제, 과기, 문화, 사상과 대외교류의 발전에 따라, 중국.. 2013. 8. 4.
문사계(文士界)의 “포청폄명(褒淸貶明)”현상 문사계에서 상용의 수법은 청나라의 악정에 명나라를 끼워넣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자옥(文字獄)”을 얘기할 때는 “명청문자옥”이라고 얘기한다. 실제로 명나라때의 문자옥은 주원장이 집권한 홍무17년에서 29년의 겨우 13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었다(오함의 <<주원장전>>). 그리고, 이.. 2006.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