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행산 8

나는 왜 고향 산시(山西)로 돌아가지 않는가?

글: 시정(柴靜) 나는 1993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산시(山西)를 떠났다. 기차는 3시간가량을 달려고 후난(湖南)에 도착했다. 새벽에 창문의 커튼을 올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작은 호수가 있는데 그 안에 연꽃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런 게 세상에 정말 있었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아이의 마음으로 그때 결정했다. 다시는 산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바로 그 해에, 중국은 전기용석탄외의 석탄가격을 자유화했다. 나는 대학을 가지 않은 친구가 있었는데, 부친와 함께 사업을 했다. 당시 석탄1톤에 17위안정도였는데, 그후 10년간 1톤에 1,000여위안으로 급등한다. 석탄,코크스는 이때부터 크게 발전하여, 산시의 GDP에서 70%를 차지하게 되고, 가장 중요한 지주산업이 된다. 2003년 설날 나는 린펀(臨汾)기차역..

"홍기거(紅旗渠, 홍치취)"의 진상은...?

글: 주효휘(周曉輝) 연안에서 모택동을 참배한 후, 시진핑은 신임 정치국상위를 이끌고 다시 허난(河南), 안양(安陽) 린저우시(林州市, 옛 이름은 林縣)로 가서 또 다른 "홍색교육기지" 홍기거기념관(紅旗渠記念館)을 참관했다. 홍기거라는 이름에 대하여, 많은 중국인들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각종 '정신'을 창조하는데 뛰어나 정신병자라는 조롱을 받고 있는 중공은 일찌감치 1971년 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어 소위 '홍기거정신'을 대거 선전했다. 작년 중국당국이 내놓은 100부짜리 다큐멘터리 제36부에서도 역시 중공의 거짓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중국당국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홍기거는 1960년대, 현지인민들이 천수답의 열악한 생존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중공당국의 지지하에 태행산(太行山)의 산허리에 '인장입..

심하고보군(沁河古堡群): 북방제일문화거족지택(北方第一文化巨族之宅)

글: 손량전(孫亮全) 일찌기 선진(先秦)시기의 에는 산서(山西)라는 이 지역을 "표리산하(表裏山河)"라고 표현했다. 안에는 높은 산이 있고, 밖에는 큰 강이 있다는 것이다. 산과 강의 천험(天險)이 병풍역할을 한다. 황토고원의 동족에 있는 산서의 가장 동쪽은 동북방향으로 이어지고 다시 남으로 뻗어나간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있고, 서부는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여량산맥(呂梁山脈)이 있다. '좌수일지시태행(左手一指是太行), 우수일지시여량(右手一指是呂梁)" 두 개의 산맥 사이에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은 분지에서 분하(汾河)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 '양산협일천(兩山夾一川)" 두 산이 강 하나를 끼고 있는 독특한 지형의 면모를 보인다. 이 '양산일천'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바로 물길이 거센 황하(黃河)이다. 산서는..

원세개의 묘지에 얽힌 이야기

글: 중화유산 잡지(2007. 7.)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를 얘기하면 모두 그를 난세의 간웅과 비슷한 나라를 훔친 큰 도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는 사람이 적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가 조조와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 묘지를 만들어놓았다는 전설아닌 전설을 퍼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