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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8

원고낭(元姑娘): 중국 최초의 여황제 글: 육기(陸棄) 중국역사상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온 이래로, 부녀의 사회적 지위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었다. 천당에서 지하로 떨어진 셈이다. 특히 "부위처강(夫爲妻綱)"의 대에 부녀는 어떤 사회적 지위도 없었다. "시집가기 전에는 부친을 따르고, 시집간 후에.. 2017. 12. 5.
무측천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글: 예방육(倪方六) 무측천(武則天)의 이름이 무엇일까? 이렇게 물으면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기괴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무측천의 이름이야 무측천이지 뭐겠느냐는 식으로. 역사애호가들은 아마도 무측천의 이름은 무측천이 아니라 무조(武曌)라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리고, 조금 더 파고 들.. 2010. 11. 1.
무측천의 연호(年號) 글: 독서삼미(讀書三味) 무측천이 사용한 연호는 아주 많다. 그녀가 태후(太后)의 자격으로 임조칭제(臨朝稱制, 조회를 주재하고 초고명령을 내리는 것)할 때 쓴 것이 4개이고, 정식으로 대주(大周)의 황제가 된 이후에 쓴 것이 13개이다. 첫번째 연호: 광택(光宅) 이것은 무측천이 임조칭제한 첫해에 붙.. 2008. 2. 21.
무측천: 중국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한족 황제 중국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던 한족 황제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바로 무측천(624-705)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무조(武照)였으며, 황제를 칭한 후에는 무조(武曌)로 바꾸었다. 그녀는 병주 문수(현재의 산서성 문수현) 사람이었고,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다. 그녀가 황제에 오른 후에.. 2006. 11. 2.
건릉(乾陵, 측천무후, 당고종의 합장묘)에 얽힌 이야기 (2) 건릉은 도굴된 적이 있는가? 1960년, 몇몇 농민이 폭약으로 돌을 깨다가, 부주의로 무척천의 묘도입구를 깬 적이 있다. 이 묘도입구는 참으로 국가의 절대기밀사항이었다. 도굴군들이 천여년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고, 황소(黃巢)가 40만대군을 시켜 수년을 팠지만 파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 2006. 10. 20.
무측천의 뒤를 이어 황제자리를 꿈꾸던 여인들 무측천(武則天)은 당태종 이세민의 재인(才人, 후궁중 낮은 등급)이었고, 이세민의 아들인 당고종 이치(李治)의 황후였으며, 중국을 수십년통치한 "측천대황제(則天大皇帝)"였다. 그녀는 중국에서 유일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황제였다. 무측천은 총명하고 영리하였으며, 속이 깊고 음험하고 독랄하였.. 2006. 6. 16.
문가황제(文佳皇帝) : 중국 최초의 여황제?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는 무측천(측천무후)라는데 역사학자들은 이의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반란군지도자로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던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바로 당고종때 농민반란을 이끌었던 진석진(陳碩眞)이라는 여자인데, 그녀는 스스로 문가황제로 .. 2006. 4. 26.
중국역사상 세 개의 무자비(無字碑) 건릉(무측천)에 있는 무자비 중국역사에 무자비(無字碑)를 세운 인물로 유명한 사람은 세 명이 있다. 무자비는 비석만 세우고, 그 비석에 아무 글도 적지 않은 것을 말한다. 첫째, 사안(射安). 동진(東晋)의 "비수지전([水+肥]水之戰)의 주장으로, 교만하기 이를데 없던 부견(符堅)을 격패시켜, 동진의 강.. 2005.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