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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63

"과거(科擧)"역사상 최고의 장원(狀元)은 누구인가? 글: 국가지리중문망(國家地理中文網) 중국고대의 과거시험은 청나라때 끝나기까지 모두 1300여년동안, 700여명의 장원(일설에는 500여명)을 탄생시켰다. 그중 "육수장원(六首狀元)"은 단 두 명이다. 옛날 과거시험은 6단계로 나뉘어졌다: 현시(縣試), 부시(府試), 원시(院試),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현시, 부시, 원시의 1등을 "안수(案首)"라고 부른다. 속칭, "소삼원(小三元)"이다. 뒤의 세 단계전 전국의 엘리트들이 함께 치르는 시험이고,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 향시, 회시, 전시의 1등을 해원(解元), 회원(會元), 장원(狀元)이라 부르며 합쳐서 "대삼원(大三元)"이라 부른다. 해원, 회원, 장원을 모두 이루는 경우를 "삼원급제(三元及第)"라고 불렀다. "삼원급제"는 이미 기.. 2023. 6. 28.
"북경(北京)"은 왜 "북평(北平)"으로 불리웠는가? 글: 진신(陳新) 북경은 3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이다. 왕조가 교체됨에 따라, 전후로 60여개의 정식명칭과 별칭이 있었다. 세계의 도시역사상 명칭이 가장 많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중 북경과 북평 두 명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북경은 왜 역사상 북평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명나라의 창업자 주원장(朱元璋)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원나라말기, 몽골통치자에 반항하는 농민반란이 거세게 일어나 전국을 석권한다. 주원장은 농민군의 진우량(陳友諒), 장사성(張士誠)의 세력을 흡수한 후, 강남의 반벽강산을 차지한다. 그리고 원나라 지정27년(1367년) 대장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에게 군사를 주어 북벌에 나선다. 1368년, 주원장은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남경)을 경사(京師).. 2023. 3. 1.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의 원흉인 왕진(王振)은 충신인가, 간신인가?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토목보지변"은 명나라 수십년간 축적한 국력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날려버린 사건이다.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문신, 무장,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이 전쟁은 명나라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후 명나라는 다시 대규모로 병력을 일으켜 몽골을 공격하지 못한다.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명나라가 수십만대군을 일으켜 몽골을 친지 겨우 25년이 지난 때였다. 그리고 이 비극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왕진이었다. 천순(天順)원년, 명영종(明英宗)은 왕진의 관직을 회복시켜주고, 영예롭게 장례를 치러주고(의관총), 왕진을 위해 사당을 지어 기념한다. 지금도 그 사당은 남아 있는데, 바로 베이징의 지화사(智化寺)이다. "왕진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지내도록 하고, 사당을 세워주었다(賜王振祭葬, 立.. 2023. 1. 9.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의 형제들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까? 글: 흔다적노력(很多的努力) 주체(朱棣, 나중의 명성조 영락제)는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4남이다. 주표(朱標)는 주원장은 장남이다. 홍무원년, 주표는 황태자에 오른다. 즉 제국의 합법적인 후계자이다. 주원장은 관리들을 극단적으로 불신해쏙, 많은 개국공신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주원장은 황태자 주표에 대한 교육을 아주 중시하여, 송렴(宋濂), 이선장(李善長), 서달(徐達), 유기(劉基)등은 모두 주표를 가르친 바 있다. 주원장과 달리, 주표는 온문이아(溫文爾雅)했으며, 일처리는 온화했다. 여러번에 걸쳐 주원장에게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지 말 것을 권했다. 만일 그가 순조롭게 황위를 이어받았다면 아마도 인후한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주원장의 생각은 일장일이(一張一弛)였다. 그가 지배하는 국가는 .. 2022. 6. 24.
조휘(趙輝): 중국역사상 가장 장수한 부마, 명나라 9조(朝)의 황제를 겪다 글: 도도설문사(濤濤說文史) 최근 몇 년간 전통적인 한문화를 젊은이들이 갈수록 더 좋아하고 있다. 원래 TV를 수십년동안 차지하고 있던 청나라궁중드라마가 많이 줄어들었고,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드라마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최근 비교적 인기리에 방영된 그리고 이전의 그리고 오랫동안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던 . 봉건왕조중 가장 마지막 한족통치의 왕조로서, 명나라는 독보적인 매력이 있다. 명나라는 끝까지 화친하지도 않고, 투항하지도 않으면서 천자가 국문을 지켰던 왕조이다. 대명은 후세에 많은 보물을 남겼다. 예를 들어 4대명저, 본초강복, 그리고 수많은 문인, 장수. 예를 들어 왕양명, 탕현조, 서하객, 이시진등등. 그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설적인 인물도 있다. 예를 들어 9명의 황제를 .. 2022. 6. 7.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은 자손을 남겼을까? 글: 원재예(袁載譽) 1398년, 주윤문이 황제에 등극하여, 주씨 명왕조의 두번쨰 황제가 되었다. 다만, 황제의 자리가 안정되기도 전에 그의 숙부인 주체(朱棣)가 1399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지금의 북경을 기점으로 당시의 수도인 남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주체의 군대는 파죽지세였고, 주윤문의 군대는 계속 패퇴한다. 1402년, 남경성이 함락되고, 황궁에서는 불이 나고, 주윤문은 행방이 묘연해진다. 얼마 후, 주체는 남경 봉천전(奉天殿)에서 황제에 오른다. 역사에서 "정난지변(靖難之變)"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전체 정난지변때 대부분의 역사애호가들은 주체의 반란이 4년의 시간을 들여서 건문제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것에 탄식하는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은 주윤문이 도대체 죽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궁금해 .. 2021. 12. 1.
건문제(建文帝)는 정말 실종되었는가? 글: 종고관금(縱古觀今) 사료로 보면, 영락제 주체(朱棣)는 확실히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을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황궁은 불이 붙었고, 궁전이 모조리 불타버렸으며, 주윤문의 시체도 찾아내질 못했다. 그리하여 일련의 전설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주체가 후기에 계속하여 주윤문을 수색했다고 하고, 정화의 7차에 걸친 하서양(下西洋)까지도 모두 주윤문의 행방을 찾기 위한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주체는 왜 요란하게 주윤문을 찾아다녔을까? 혹시 뭔가를 감추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을까? 목적은 아주 간단하다. 세상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이다: 건문제는 내가 핍박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그는 아직 살아있다. 그저 민간에 도망쳤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시군살질(弑君殺侄)의 죄명을.. 2021. 1. 31.
정난지역(靖難之役)후 주체(朱棣)는 왜 5번이나 몽골정벌에 직접 나섰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정난지역이후, 주체는 성공적으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으로부터 황제위를 빼앗는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그가 '황위를 찬탈'한 일에 대하여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를 '영락대제(永樂大帝)'로 칭송한다. 주체의 주요 공적을 나열해 보자면, 북경천도, 영락대전편수, 정화하서양, 안남수복, 오정막북(五征漠北)이 있다. 특히 5차례에 걸쳐 막북을 친정(親征)한 것은, 후세의 찬양을 받는다. 자고이래 제왕이 직접 정벌에 나서는 일도 많지 않지만, 주체는 역사상 최초로 직접 장성이북을 친정한 황제이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주원장이 원왕조를 쫓아낸 후, 몽골통치자의 잔여세력은 완전시 소멸되지 않고, 새외(塞外)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립한다.. 2020. 10. 31.
역사상의 "태종(太宗)": 모두 "내로부정(來路不正)"한 황제들이다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중국 수천년의 왕조사에서 묘호(廟號)는 아주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묘호"와 "시호(諡號)"는 모두 어느 정도에서 황제일생의 공과시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다만 후세의 황제는 시호의 수가 늘어나서, 자손들이 조상을 위하여 시호를 정할 때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기 어려워졌다. 다만 '묘호'는 '시호'를 대체하여 황제에 대한 개관정론(蓋官定論)의 중요한 근거이다. 가장 원시적인 묘호는 상(商)나라때 건립된다. 당시에는 단지, "태(太)", "고(高)", "세(世)", "중(中)"의 4종이었다. 그리고, "조유공이종유덕(祖有功而宗有德)", 조는 공이 있는 황제에게, 종은 덕이 있는 황제에게 붙인다는 기준으로 조종의 묘호를 정했다. 나중에 왕조가.. 2020. 10. 26.
남명(南明)에 기회는 없었을까? 글: 구어정(九魚亭) 주체(朱棣,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예비방안을 마련해 두었다. 북방은 어쨌든 리스크가 큰 곳이다. 그래서 남경에 온전한 행정조직을 보류해둔 것이다. 육부육과(六部六科)를 모두 갖추었다. 남명에 괜찮은 지도자만 있었더라면, 그 효율은 북경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남명이 판세를 뒤집을 기회도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는 항상 스쳐지나가 버렸다. 송고종이 건염남도(建炎南渡)할 때, 그는 1인황제라 할 수 있었다. 병사도 없고 장수도 없다. 그리고 금나라군대에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그에게서 제왕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조구(趙構)는 결국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점차 역량을 모아서 금나라와 대치한다. 조구는 비교적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가 .. 2020.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