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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北京)"은 왜 "북평(北平)"으로 불리웠는가?

by 중은우시 2023. 3. 1.

글: 진신(陳新)

 

북경은 3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이다. 왕조가 교체됨에 따라, 전후로 60여개의 정식명칭과 별칭이 있었다. 세계의 도시역사상 명칭이 가장 많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중 북경과 북평 두 명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북경은 왜 역사상 북평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명나라의 창업자 주원장(朱元璋)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원나라말기, 몽골통치자에 반항하는 농민반란이 거세게 일어나 전국을 석권한다. 주원장은 농민군의 진우량(陳友諒), 장사성(張士誠)의 세력을 흡수한 후, 강남의 반벽강산을 차지한다. 그리고 원나라 지정27년(1367년) 대장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에게 군사를 주어 북벌에 나선다. 

 

1368년, 주원장은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남경)을 경사(京師)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명(大明), 연호를 홍무(洪武)라 한다. 그해 팔월 이일(9월 12일), 명군은 원나라의 대도(大都)를 함락시키고, 북평부(北平府)로 개칭한다. 홍무3년(1370년) 주원장은 넷째아들 주체(朱棣)를 연왕(燕王)으로 봉해 북평에 주둔하게 하여 북방의 방어를 공고히 하며, 몽골족의 남침을 막게 한다.

 

홍무31년(1398년), 주원장이 사망하고, 황태손(皇太孫) 주윤문(朱允炆)이 즉위하고 연호를 건문(建文)이라 한다. 연왕 주체가 정난지역(靖難之役)으로 건문제를 쫓아내고 황제에 오르는데 성공한 후 1403년(영락원년) 수도를 북평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북평을 북경으로 개칭한다. 그리고 응천부는 유도(留都)로 삼는다. 명나라의 북경성의 건설은 1406년(영락4년)부터 시작하여 영락18년(1420년)에 기본적으로 준공된다. 15년의 시간이 든 것이다. 영락19년(1421년) 정월, 정식으로 북경에 천도한다.

1644년, 청군이 북경성에 진입하고, 명나라가 멸망한다. 청나라도 북경을 수도로 삼아 경사순천부(京師順天府)라 칭하고 직예성(直隸省)에 속하게 한다. 그리고 기민분거정책(旗民分居政策, 팔기 즉 만주족과 민간 즉 한족의 거주지를 분리하는 정책)을 써서, 팔기는 내성에 거주하고, 한족과 회족은 외성에 거주하도록 한다.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명나라의 북경성을 그대로 쓰고 고치지 않았다. 자금성을 포함한 건축물에 대하여도 약간의 중수와 부분적인 소규모의 개축,증축공사만 하였다. 청나라때는 200여년간 대규모로 북경서북교외의 원림풍경구를 개발했고, 규모가 거대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궁건축군(離宮建築群)을 형성하게 된다. 이곳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서북교외의 "삼산오원(三山五園)"이다. 즉, 옥천산정명원(玉泉山靜明園), 향산정의원(香山靜宜園), 만수산청의원(萬壽山淸漪園, 頤和園을 가리킴), 그리고 창춘원(暢春園), 원명원(圓明園)이다. 청나라황제들은 이곳에서 산수를 감상하면서 조정업무를 처리했다. 그리하여 북경성에서 자금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다른 정치중심이 된다. 청나라때 발생한 많은 중대역사사건은 모두 이 일대의 밀림에서 벌어진다. 어떤 사람은 북경이 '일남일북(一南一北)'의 쌍성제(雙城制)였다고 말하는데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청나라가 멸망한다. 1월 1일, 중화민국은 남경을 수도로 정한다. 같은 해 3월에는 북경으로 천도한다. 1928년 장개석이 이끄는 북벌혁명군이 북경을 점령하면서 북양정부가 무너진다. 처음에 북경의 지방체제는 여전히 청나라의 제도를 따랐고, 여전히 순천부로 불렸다. 1913년, 순천부를 경조지방(京兆地方)으로 개칭하면서 북양정부가 직할했다. 이 시기에 북경에는 새로운 궤도전차시스템이 건설되고, 우수한 문화교육기관들 예를 들어, 청화대학, 북경대학, 연경대학, 협화의학원등이 건립된다.

 

1928년 6월 4일, 북양정부의 대수(大帥) 장작림(張作霖)이 기차를 타고 북경에서 심양으로 가던 중 황고둔(皇姑屯)에서 폭사한다. 같은 날, 남경정부는 염석산(閻錫山)을 경진위수총사령(京津衛戍總司令)으로 임명하여 북경을 접수하는 업무를 맡게 한다. 그후, 남경정부는 6월 15일 '통일을 완성했다'고 선포한다. 6월 20일 직예성을 하북성(河北省)으로 개칭한다고 선언하고, 진입부(陳立夫)는 국민당정부의 수도를 남경에 두었는데, 북경에 '경(京)'자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북경을 북평으로 개칭한다. 그리고 특별시로 삼고 '경조지방'을 취소한다.

 

1930년 6월에는 북경을 하북성의 성할시로 격하시킨다. 같은 해 12월 다시 원할시(院轄市)로 승격시킨다. 이 시기에 북경은 수도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문화교육방면에서는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그리하여 외국인들은 '중국의 보스턴'이라고 불렀다. 

 

1937년 7.7사변후, 7월 29일 북평은 일본군에 점령된다. 친일정권이 들어서고, 10월 12일, 북평을 다시 북경으로 개칭한다.

 

1945년 8월 21일 국군제11전구 손련중(孫連仲)부대가 북경을 수복한다. 일본이 북경에서 투항한 후, 다시 명칭을 북평으로 고친다.

 

1949년 9월, 중국공산당이 북평을 다시 북경으로 고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삼는다.